123화
승급전의 무대인 고대의 협곡.
이곳은 바벨탑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차원의 전장을 본떠 만든 공간이다.
대립 중인 세 나라가 주기적으로 충돌했던 장소.
군락이나 하수인 버프 수정체 같은 건 고신족들이 세팅해 둔 것이지만.
협곡의 주인인 ‘내샨 대공’만큼은 다르다.
다른 차원에서 실존하는 괴물!
[공허의 거울]이란, 탑이 만든 모조품이 본체를 투영하여 변모하는 스킬이다.
“크리리리릭!!!”
점점 더 성장하는 내샨.
천안(千眼)에 비친 아우라가 수배로 증폭된다.
“스, 스승님, 저걸 어떻게 상대하죠?”
“어쩌긴. 도망쳐야지.”
“너무 담담하신 거 아니에요!?”
이차원에 존재하는 ‘초월’급의 괴물.
그 힘을 상당수 구현하는 데 성공했으니, 저 다리를 정면으로 맞으면 나도 위험했다.
“훌륭한 전법이로구나.”
“넌 또 왜 그러는데!”
“이런. 필멸자의 눈에는 그리 비칠 줄이야.”
닉스는 훗,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 흉측한 몸뚱이를 보아라. 제힘을 이기지 못하여 붕괴하지 않느냐?”
내샨 대공 2페이즈는 아이언 등급 플레이어의 수준으로 절대 당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호수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 놈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는 게 정석적인 공략 방법이다.
여신님의 관찰력도 쓸 만한걸? 용케 그걸 봤어.
“그러면 빨리 도망을…….”
지영이가 다급하게 뒷걸음치는 순간.
번쩍!
내샨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놈이 우리의 존재를 다시금 인식하는 순간-.
쭉 늘어난 다리가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지영이.
협곡의 스페셜 보스인 내샨이라면 공격이 닿지 않을 위치였지만.
탑이 빚어낸 피조물이 아닌, [공허의 거울]로 비춘 원본한테는 사정거리 내였다.
[가시 갑피를 사용합니다.]
[록 스킨을 사용합니다.]
…….
[핏빛 도취를 사용합니다.]
7층의 보스인 악귀의 정수에서 추출한 스킬.
범위 안에 있는 생물을 내 쪽으로 당겨 오는 효과다.
지금은 ‘생물’이라기보다는 다리 한쪽이지만.
쇄애애액!
지영이한테 날아들던 다리 한쪽의 궤도가 틀어졌다.
사용 가능한 방어 스킬들을 모두 펼친 채, 손을 곧게 펼쳤다.
손바닥을 검게 물들이는 수라마령심공의 내공.
[백수제왕무 - 8초식]
[비익대붕장(飛翼大鵬掌)을 사용합니다.]
태풍의 흐름을 타고 날아가는 대붕(大鵬)의 손길처럼, 강한 힘에 맞서지 않고 되돌리는 장법이다.
쩌엉!
내샨의 다리를 빗겨서 쳐 냈는데도, 갑피의 내구도가 1/3 정도 소모되었다.
후들거리는 팔.
정면으로 받아쳤으면 갑피에 금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산산조각 났겠지.
“내 뒤로 물러나.”
그나마 호수 바깥이라 쳐 낼 수라도 있지.
안쪽이었으면 일행을 지키긴 고사하고 나조차도 못 버텼을 거다.
한계 이상으로 늘어난 다리 몇 개가 날아들 때마다 비익대붕장으로 흘려보냈다.
우드득!
제자리를 벗어난 오른팔.
연이은 공세를 쳐 내는 와중에 온갖 방어 스킬이 무력화되었다.
[변이를 사용합니다.]
[육체 일부가 재구성됩니다.]
조각조각 난 뼈가 재생되고, 원래의 위치를 벗어난 팔이 어깨에 고정된다.
탈피와 결합하면서 안정성이 대폭 늘어난 변이.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한순간이지만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위기의 순간에만 써야지.
자주 쓸 정도의 스킬은 아니다.
“스승님, 미력하지만 저도 도울게요!”
“여도 가세하마.”
휘몰아치는 극야도.
몇 겹이나 겹쳐서 방어력을 강화시킨 진동 결계도 내샨의 다리에 찢겨 나갔다.
하지만.
[공허의 거울]이 발동된 지 3분이 지나자, 내샨의 움직임이 굼떠졌다.
“크리리릭. 건방진…….”
“힘도 다 끌어 썼으면서 허세 부리긴.”
부풀어 올랐던 몸뚱이가 원래보다 작아지고.
자색 갑피는 윤기 대신 푸석푸석해져서 툭 치면 가루로 변할 것처럼 보인다.
바벨탑이 만든 모조품.
고대의 협곡의 보스 몬스터로는 차원 너머의 진짜 ‘내샨 대공’의 힘을 담아 내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쇠약해진 내샨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
“크리릭. 죽어라!”
빗발치는 다리들을 쳐 내고는 [민첩한 뒷발]로 내샨의 머리에 도약했다.
“죽는 건 너다.”
쭉 늘린 손톱을 금속화로 감싼 후, 탐욕의 가호로 강화했다.
[백수제왕무 - 2초식]
[산군파랑조를 사용합니다.]
검은 내공이 아른거리는 손톱으로 내샨의 목덜미를 훑자.
푸아아악!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출혈과 함께 놈의 몸뚱이가 호수로 고꾸라졌다.
[한국 팀이 내샨 대공을 쓰러트렸습니다.]
[해당 진형은 ‘협곡의 주인’의 인정을 받습니다. 하수인의 능력치가 100% 증가합니다.]
[협곡의 주인 버프는 60분 동안 유지됩니다.]
“해, 해냈어요, 스승님!!!”
“고생하셨습니다.”
환호하는 지영이.
옆에 있는 김영수도 화색을 띠었다.
“모름지기 여의 계약자라면 이 정도야 당연한 것이거늘.”
닉스가 코웃음을 쳤지만, 입가가 씰룩이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이럴 땐 허세 부리지 말고 솔직해져도 될 텐데.
은근히 귀엽단 말이야.
“팀장님, 한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그 아다만티움 말입니다만. 왜 먹인 건가 해서 말입니다.”
“미션을 진행하다 얻은 정보였어요.”
아다만티움과 내샨의 상관관계는 탑 8층, 지하 미궁에 숨겨져 있다.
내가 찾은 건 아니고, 원 역사에서는 4년 뒤에 탐험가 로렌트가 8층 미션에서 발견한 문헌이지만.
〔여러 패턴으로 된 미궁을 돌다 보니 고대의 문자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더군요.〕
〔그 모든 단어들을 조합해 보니 20층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고대의 협곡의 주인, 내샨. 그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 내려면 아다만티움을 바쳐라.〕
〔진정한 두려움을 마주하고 이겨 낸 자에게는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리라.〕
답안지를 보고 이야기한 꼴이지만, 뭐 어때.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 그렇군요.”
“나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위험했네요.”
“다음에는 모험을 할 때 귀띔 한번 부탁드립니다. 제 심장에 안 좋습니다.”
김영수는 가슴팍에 손을 얹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 형님도 참.
나를 따라다니면 이보다 더한 일도 엄청나게 많을 건데.
다음에는 우환청심환이라도 챙겨 줘야겠다.
자, 그럼 수금을 해 보실까?
* * *
혀를 깨문 채 쓰러진 내샨.
말려있는 혀 안쪽에는 보랏빛을 품은 보석이 있었다.
[공허의 보석]
등급: 초월
분류: 성유물
내구도: 500/500
아다만티움이 공허의 힘을 받아들여서 변모한 형태입니다.
가공 시 공허의 힘을 벼려 낼 수 있습니다.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두 사람.
두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무엇이 그리 놀라운 것이더냐?”
“초월이면 신화 등급 바로 아래거든. 거기에 성유물이기도 하잖아.”
초월 등급 성유물.
현시대에도, 회귀 전의 미래에서도 값을 매기기 어려운 물건이다.
아다만티움을 얻고 나서 바로 가공하지 않은 이유!
명색이 성유물인 만큼, 달콤한 향이 자색으로 빛나는 보석에서 흘러나왔다.
“그 보석은 팀장님 뜻대로 하십시오.”
“팀으로 공략한 건데요?”
“제 능력으로는 일반 내샨도 못 이겼을 겁니다.”
고개를 젓는 김영수.
“거기에 아다만티움을 투자한 것도 팀장님이지 않습니까. 전 숟가락만 얹었고요.”
“동감이에요. 스승님께서 세팅하신 건데, 분배해달라는 건 욕심인 것 같아요.”
두 팀원은 공허의 보석의 지분을 말끔하게 포기했다.
가벼운 설득 정도는 염두에 두었는데.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걸?
“초월 등급 성유물은 그리 쉽게 구경할 수 없을 겁니다만.”
난 과장된 동작으로 공허의 보석을 내밀었다.
“팀장님께서 저한테 투자해 주신 값이라고 생각하죠.”
“저도 스승님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도 못 왔을 거예요.”
눈빛 하나 안 흔들리는 두 사람.
허허허, 내가 팀원을 보는 눈이 있었네.
“그렇게까지 말하면 사양하지 않고.”
공허의 보석은 욕망의 주머니에 보관해두었다.
“바로 포식하지 않는 것이더냐?”
“그러면 배탈 나.”
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공허의 보석에는 ‘신화’ 등급 정수가 담겨 있다.
이미 가이아와 닉스의 정수를 포식했기에, 섣부르게 포식했다간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감당할 순 있지만…… 포식을 도와줄 소화제를 준비한 뒤에 먹는 게 낫거든.
[공허의 보석]이 어떤 정수를 품었는지는 알고 있으니까.
“자, 이제 메인디시 차례군.”
호수에 널브러진 내샨의 사체에 손을 얹었다.
[각성한 내산 대공에게 포식을 사용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전설]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근력 + 25]
[체력 + 25]
[맷집 + 25]
[스킬 - 공허의 거울이 추가됩니다.]
[공허의 거울]
등급: ★★★★
분류: 액티브
공허의 거울로 사용자의 영혼을 비춘다.
거울은 대상의 혼에 새겨진 진정한 힘을 끌어올려 준다.
지속 시간은 영혼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재사용 시간: 12시간
회귀 전에는 얻지 못했던 정수.
설마하니 내샨이 2페이즈 때 사용했던 스킬을 그대로 얻을 줄은 몰랐다.
혼을 투영하는 힘이라.
작동 원리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시험해 볼 가치는 있겠어.”
나는 회귀를 하면서 모든 영혼의 격을 상실했다.
본질은 동일하다 해도, 무수한 투쟁과 포식으로 쌓아 올렸던 업(業)은 회귀를 한 후의 시간 선을 따르니까.
그렇지만.
난 회귀 후에도 포식으로 다시금 업을 쌓아 올렸다.
공허의 거울로 여태 집어삼킨 정수를 비추면 어떻게 될까?
[공허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거울이 사용자의 혼을 비춥니다.]
[사용자의 혼에서 여러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오호.”
공허의 거울은 지금까지 쌓아 올린 ‘정수’도 혼에 내재된 힘으로 인식했다.
이 정수, 생각보다 훨씬 유용하겠어.
나는 신체 개변의 핵심인 [티라노사우루스의 정수]를 비추었다.
[원시종의 흔적이 거울에 비쳐집니다.]
[혼에 기록된 형태로 변환됩니다.]
[사용자의 수준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구현도입니다. 지속 시간이 5분으로 설정됩니다.]
[공허의 거울]이 비춘 모습은 복원도나 영화로 본 적 있는 티라노사우루스였다.
드득! 드드드득!
내 육신이 거울에 투영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계약자여, 무슨 일이더냐?”
“괜, 찮…….”
굵어진 음색.
목소리가 안 나오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면서 닉스의 걱정을 일축했다.
육체가 급속도로 팽창, 이미 반쯤 걸레가 된 옷가지가 완전히 찢어졌다.
확 높아진 눈높이.
다리는 통나무보다도 굵어졌고, 등 뒤에 꼬리가 솟아났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와 짧은 앞발.
[공허의 거울]은 내가 흡수한 원시종, 티라누사우루스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카오오오오!!!!”
넘치는 힘.
과연, 여러 원시종 중에서도 ‘폭군’이라고 불렸던 괴물다웠다.
공허의 거울로 변한 상태에서는 내공이나 극야 같은 특수 스텟을 제외한 능력치가 수배로 뻥튀기되어 있었다.
이 상태에서 [악귀의 분노]를 사용하면…….
“크크큭. 엄청나잖아.”
난 조소했다.
마냥 장점만 있지는 않았다.
신체 구조가 변한 탓에 무공을 펼치기 힘들고, 마법 같은 일부 스킬들은 봉인되었다.
이 손으로는 아르스 게티아를 펼치는 것도 불가능하겠어.
“저기요, 스승님 맞으세요?”
“맞다.”
“와, 공룡이라니.”
“무서워할 필요 없다.”
“왜 무서워요? 이렇게나 멋진걸요!”
지영이가 눈동자를 빛냈다.
“여가 보기에는 야만의 화신 같다만.”
“공룡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지금 여를 동정하는 게냐!”
티격태격하는 닉스와 지영이를 보고는 콧김을 킁, 하고 불었다.
“시간 없으니까 싸우지 말고, 타.”
“스승님의 등에요?”
“깽판 좀 놔야지.”
호수를 지나가면 두 진형 중 어느 곳도 갈 수 있다.
지속 시간은 5분.
둘 다 털긴 부족하지만, 하나 정도는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올라타마.”
닉스는 영체화를 하더니 냉큼 내 머리 위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