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성물, 혹은 성유물.
하늘에 수놓은 별자리에 이름을 기록한 성좌(星座)의 격이 스며든 물건이다.
회귀 전 내 가슴팍을 찔렀던 히페리온의 창, [태양의 심판]도 성유물이었지.
탑에서 최고 등급으로 분류되는 ‘신화’ 등급 아티팩트와 동급.
성유물의 종류에 따라서는 그보다도 한 수 위로 취급하는 게 성유물이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은 해당 성유물의 용도를 궁금해합니다.』
『용의 총통이 당신의 발언에 분개합니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용의 총통을 억누릅니다.』
『용의 총통이 추방됩니다.』
마신의 이름 앞에 붙은 위(位)가 반드시 ‘강함’이나 ‘위계’를 상징하지는 않는다.
지옥 남부를 지배하는 강력한 악마 대공인 벨리알만 해도 68위(位)에 있으니.
‘사악한 뱀신상’의 주인인 발라크도 72마신 중에서 상당히 강한 편이다.
문제는 협상 대상이 72마신의 수장인 바알이라는 거지.
잠시 후.
『오염된 왕좌의 주인은 당신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바알이 수락함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끈이 내 영혼을 옥죄었다.
[탑 시스템은 당신이 오염된 왕좌의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을 근거로 추가 미션을 부여합니다.]
[엑스트라 미션 - 성좌와의 내기가 생성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당신을 주목해 온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합니다.
정해진 기한 안에 실버 등급으로 승급하세요.
내기에서 승리하면 보상과 성좌들의 관심을 얻을 수 있지만, 패배하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목표: 다음 승급전에서 실버 등급에 진입.
▶제한: 30일
▶실패 페널티: 아르스 게티아 회수.
정식으로 추가된 미션.
그와 동시에, 나를 지켜보는 성좌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바알의 위계는 각 신들의 사회에서 신왕으로 군림하는 이들과 동급.
판데모니엄은 전 차원에서 반드시 존재하는 ‘악’이라는 개념을 주관하기에, 신왕들조차도 바알한테 한 수 굽히고 들어간다.
그런 존재가 필멸자와 내기를 했으니.
다른 성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올림포스의 전쟁신이 글라디우스를 휘두릅니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은 오염된 왕좌의 주인을 노려봅니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코웃음을 칩니다.』
“저 아이는 꾸준하구나.”
닉스가 작게 속삭이며 살포시 웃었다.
참, 그러고 보니 아레스는 닉스한테 증손자뻘 신격이니, 아이라고 해도 되겠구나.
“그래 봐야 선물 하나 안 주는 성좌님이야.”
나는 은근슬쩍 아레스를 힐난했다.
이전이었으면 시도조차 못 했을 오만한 발언!
하지만 여러 성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이 다급한 동작으로 손을 젓습니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은 당신에게 전쟁신의 가호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탑 시스템이 올림포스의 전쟁신의 행위에 개입합니다.』
『시스템은 오염된 왕좌의 주인과 플레이어의 내기에 공정성을 더하기 위해 어느 성좌의 개입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호라.
아레스도 애가 탄 듯,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탑 시스템의 관여로 받지는 못했지만, 아레스가 이미 ‘가호’를 부여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한 달 뒤에는 아레스한테 다시 한번 가호를 요구해야겠군.
“또, 또. 그렇게 웃는구나.”
“남이 웃는 것까지 참견하지 마시죠.”
“가만히 있을 때는 봐 줄 만하건만, 부탁이니 그렇게 웃지 말거라.”
닉스의 한탄을 뒤로한 채, 다음 군락을 향해 움직였다.
* * *
[한국 팀 소속 하수인들의 공격력·방어력·생명력이 10% 증가합니다.]
광신자들의 군락 세 군데를 모두 털어 버리고는 본진으로 무사 귀환했다.
수정체를 털어 넣는 순간 바로 강화되는 하수인들.
“팀장님, 아무래도 필리핀 쪽 전장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쪽 플레이어들이 그렇게나 강해요?”
“아니요. 숫자가 좀 많군요.”
김영수의 말대로, 두 국가는 나를 엄청나게 의식한 모양이다.
입가에 아른거리는 쓴웃음.
회귀 전에 EU 방면 전선의 최고지휘관까지 오른 사람은 보는 눈이 다르네.
“두 사람은 천천히 와요.”
“스승님, 저도 따라가면 도움이 될 거예요!”
“아냐. 수준을 보니 나 혼자서도 충분하고, 그게 더 빨라.”
-후후훗, 계약자는 여가 보조해 주겠느니라.
영체로 변한 닉스가 내 어깨에 걸터앉고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끝내기 전에 오든지.”
“쳇.”
혀를 차는 지영이를 뒤로 하고, 필리핀 전선으로 향했다.
협곡에 뭉쳐 있는 필리핀 플레이어들.
그 숫자가 백을 넘어섰지만, 망설이지 않고 정면으로 돌진했다.
아이언 승급전 때는 90명의 발을 묶는 데 그쳤지만, 난 2개월 사이에 그보다 훨씬 강해졌거든.
[악귀의 분노를 사용합니다.]
[피오르의 축복을 사용합니다.]
[밤의 축복이…….]
순식간에 중첩되는 버프 주문.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유진호다!!”
최전선에 있는 필리핀 플레이어가 날 보더니 비명을 질러 댔다.
하, 필리핀도 일본이랑 마찬가지군.
“숫자로 밀어붙인다.”
“유진호의 주특기는 일격이탈이다. 발을 묶으면 전투력도 급감할 거야.”
“모두 처음에 이야기한 작전대로 갑시다!”
날 상대한다고 작전까지 세웠어?
감동해서 눈물 나겠네.
두근- 두근- 육감이 경고음을 울린다.
옆구리와 등 뒤.
나를 둘러싼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휘둘렀다.
사면초가.
제 발로 적진에 달려든 꼴이라서 벗어날 곳은 없었다.
근데 말이야.
조사한 게 다 맞는 건 아니야.
[가시 갑피를 사용합니다.]
[록 스킨을 사용합니다.]
[스톤 스킨을…….]
갖가지 방어 스킬을 전개.
마지막에는 [탐욕의 가호]로 갑피와 피부를 물들여서 방어력을 극대화했다.
채채챙! 필리핀 플레이어들의 공격이 빗발친다.
일반 공격도 아니고.
하나하나가 마나와 체력을 소모해서 펼친 공격이다.
[볼링 배시]
[데들리 블로]
[브랜디시 스피어]
…….
타격 시 확정적으로 경직을 유발하는 볼링 배시.
그 외에도 온갖 스킬들이 내 몸을 강타했다.
사방으로 튀는 불똥.
금속으로 된 병장기가 갑피와 충돌하면서 발생한 마찰열이 만든 불씨다.
하지만.
그 어떤 공격도, 내 갑피를 뚫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준비한 건 이게 끝?”
[백수제왕무 - 2초식]
[산군파랑조를 사용합니다.]
촤촤촥!
날카로운 손톱 위에 [탐욕의 가호]를 씌운 후, 수라마령심법의 패도적인 내공을 발출했다.
산군파랑조의 궤적에 닿은 플레이어들이 회색 가루로 화한다.
“데들리 블로에는 명중 시 경직 효과가 있을 텐데?!”
“그뿐만이 아니다. 볼링 배시의 강제 이동 효과도 무시했어.”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당황하긴.
[악귀의 분노가 육체에 간섭하는 스킬 효과를 무효화합니다.]
3성급 스킬 이하로는 내 발을 묶을 수 없었다.
“시간이 아까우니 한꺼번에 덤벼라.”
“혼자면서 건방지…….”
푸아악!
겁 없이 떠들던 플레이어 하나가 순식간에 가루로 변했다.
시시하군.
내샨 공략만 아니었으면 이대로 밀어 버리는 건데.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로부터 10분 뒤.
협곡에 있던 필리핀 측 플레이어들은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 * *
초장부터 두 국가를 압도한 우리나라.
“역시 진호 님은 다르십니다!”
오지원은 전장에서 돌아온 나를 보자마자 읍소하다시피 했다.
십인장으로 임명한 다른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
승급전 시작과 동시에 승기를 굳혔으니, 흥분할 만도 했다.
“마침 잘됐군요. 지시할 게 있었거든.”
“어떤 명령이든지 내려 주십쇼. 저희는 진호 님만 믿겠습니다.”
“그러면 이틀 차 아침까지 다들 쉬엄쉬엄하십쇼.”
한국 플레이어들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전력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요?”
“내샨을 공략할 거라서요.”
“아, 내샨의 출현 조건은 이틀 차 아침이었지.”
“그래도 두 손 놓고 구경하기에는…….”
의구심이나 불만을 드러내는 플레이어들.
뭐, 당연한 반응이다.
쉽게 갈 수 있는 것을 일부러 돌아간다고 생각하겠지.
“구경만 하라고는 안 했는데요?”
피식.
실소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각자 킬 카운트도 욕심이 날 테고, 공헌도 문제도 있으니 마음껏 싸우세요.”
“그렇다면 진호 님이 나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군요.”
“단, 군락은 제 선에서 정리하죠.”
“알겠습니다.”
십인장으로 임명된 플레이어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곧장 전장으로 향했다.
단 한 명.
오지원만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마지못한 기색으로 돌아섰을 뿐.
나는 경멸 섞인 눈빛으로 십인장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팀장님, 괜찮겠습니까?”
“영수 형님,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우리 팀원들을 뺀 플레이어의 수준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쓸 만한 플레이어는 200명 중에 오지원 한 명뿐.
나머지 인원들만 가지고는 두 국가의 전력을 압도하기는커녕, 전선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울 거다.
“아군 라인이 밀리면 그때 나서지 뭐.”
“제 생각이지만, 상대도 그렇게까지 무리는 안 할 겁니다.”
“그래요?”
“섣부르게 전력을 투입했다가는 진호 님께 당할 테니까요.”
“우리는 마음 편하게 군락이나 공략하면 되겠네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크.
내가 이래서 영수 형님을 미리 영입해 두었지!
실시간으로 시야 공유 및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
나중에 면적이 넓은 대형 게이트를 공략할 때 더더욱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으핫!”
아군 측 군락에 자리를 잡은 건 검은 날개의 수인족, 블랙 페더.
다이아몬드 승급전에서 마주친 종족, 오크와 마찬가지로 실존하는 차원의 주민을 구현한 괴물이다.
[블랙 페더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일반]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검은 선풍이 추가됩니다.]
[검은 선풍]
등급: ★
분류: 패시브
바람 관련 스킬의 효과를 5% 늘려준다.
바람의 흐름에 예민해진다.
언뜻 보기에는 앤트 라이온의 정수, ‘땅의 호흡’과 비슷한 효능.
하지만.
바람의 흐름을 더 잘 읽어낼 수 있다는 추가 옵션이 [검은 선풍]만의 차별점이다.
당장에는 쓸모가 없지만 비행 관련 정수를 흡수하면 유용하거든.
[필리핀 팀 소속 하수인들의 공격력·방어력·생명력이 10% 증가합니다.]
아군 측 군락들을 정리할 무렵, 필리핀의 하수인도 강화되었다.
“으, 저쪽이 한발 빠르게 움직였네요.”
“빠르기는. 저게 보통이지.”
해가 떨어지면 본격적으로 군락을 둔 전투가 벌어진다.
그때에 필리핀 쪽 진형에 있는 괴물들을 노리면 되니, 아직 여유는 있다.
[밤이 되었습니다.]
[하수인이 출몰하지 않습니다.]
[괴물 군락에 병력이 충원됩니다.]
[협곡의 샛길이 열립니다.]
밤에 재생성되는 군락의 괴물들.
난 해가 떨어지자마자 필리핀 진형으로 난입했다.
-키키키키.
-신선한 육체다.
-먹어 버리자.
필리핀 측 진형에서 출몰하는 괴물은 악령.
마력이나 내공을 실은 공격, 혹은 마법으로만 타격이 가능했다.
회귀 전.
[스캐빈저] 때는 포식이 불가능했던 괴물이지만…….
“내가 이미 실험해 봤거든.”
이매망량.
반쯤 영체인 괴물들도 포식했는데, 너희라고 안 되겠어?
[악령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일반]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검은 눈빛이 추가됩니다.]
[검은 눈빛]
등급: ★
분류: 액티브
암흑 마나를 눈에 투영, 바라보는 상대를 붙든다.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태 이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올라간다.
약화의 문장과 달리, 지속적으로 대상을 봐야 진가가 드러나는 스킬이다.
다수보다는 강적을 상대할 때 유용하겠어.
이 정수는 나도 처음 얻는 거라, 효과를 확인하려면 실전이 필요했다.
마침 적당한 상대도 있고.
난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태양이 다시 떠오르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