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1차 대침식 이후 한 가지 편해진 게 있다면, 레벨을 올리는 일이다.
하루에 두 번만 도전할 수 있는 탑과 달리.
게이트는 내 체력만 된다면 언제든지 출입할 수 있으니까.
“헤엑, 헥. 스승님, 또 게이트 공략인가요?”
“넌 안 와도 돼.”
“바늘 가는 데 실이 가야죠!”
언제부터 내가 바늘이고, 네가 실이 되었는데?
근데 지영이만 나랑 붙어 다니는 게 아니었다.
“흥. 내가 빠지면 곤란해할 테니, 이번에도 힘을 보태 주지.”
“팀장님의 지시라면.”
툴툴대는 핑 레이와 무표정한 카를라.
“팀장님,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100레벨을 진즉부터 달성한 김영수도 게이트 공략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레벨도 못 올리는 양반이 왜 그래?
“더 많이 실전을 경험해 봐야 인형술도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김영수는 내 질문에 허허로이 웃었다.
거참.
내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적극적인 거야?
그 덕에 신이 난 건 한수창 팀장이었다.
-이번에도 힘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별거 아닌 일 가지고.”
-별거 아니라뇨. 다른 팀이나 길드에서는 손도 대지 않던 게이트 아니었습니까?
내가 게이트를 공략하는 기준은 ‘난이도’다.
보통은 낮은 난이도를 선호하겠지만, 그래서는 사냥할 괴물의 수가 적어서 경험치가 느리게 올라가잖아.
등급 대비 고난이도!
과천에서 생성되었던 [낙원의 밤] 같은 곳들 위주로 공략했다.
-모든 특무대원이 진호 님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게이트 공략은 길드에도 맡기잖아요.”
-에이, 그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위험 부담 적고 보상을 많이 줄 것 같은 게이트를 배정받으려고 애쓰죠.
한수창의 목소리에서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탑과 달리, 게이트를 공략할 때에는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지.
나야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몸이라서 감흥이 없는 것뿐.
길드들이 몸을 사리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협회는 요즘 어떻습니까?”
-엄청 바쁘죠. 전보다 권한이 커졌다보니 내부 개편도 많습니다.
게이트 레이더.
어느 곳에 게이트가 생성되었는지, 그리고 난이도를 알려 주는 장치다.
협회에서는 손바닥 크기의 레이더를 컴퓨터에 연결.
수십 배로 키운 화면으로 모니터링하는 인원들을 배치했다.
-길드들이 협회의 비위를 살피는 날이 올 줄은 몰랐죠.
나는 알고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미리 선을 대 놨지.
-전처럼 따로 수배하실 게이트는 없습니까?
“아직은요.”
1차 대침식 이후에 꼭 챙겨야 할 기연들은 모조리 손에 넣었다.
특히 전주에서 획득한 [아르스 게티아]는 예정보다 일찍 다크매터 코어를 얻은 덕에 유용하게 쓰는 중이었다.
“일 있으면 연락 주십쇼.”
-알겠습니다.
게이트 폐쇄도 특무대원의 임무로 포함되기에, 두 달에 한 번은 협회의 호출에 답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지만, 게이트 공략 외에 내 힘이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 미리 언급해 두었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난 지나가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다가올 브론즈 승급전을 준비했다.
* * *
인류의 첫 다이아몬드 승급전으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지구 외에도 존재하는 다른 차원.
각 나라 최고 랭크로 손꼽히는 플레이어가 전패했다는 충격도 조금씩 잊힐 무렵.
승급전을 치르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레벨 제한은 연이은 게이트 공략 덕에 충족한 지 오래.
나는 카를라와 핑 레이를 호출했다.
“둘 다 고향 좀 다녀와라.”
“야호……가 아니지. 커흠,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훈련받아야 해요.”
핑 레이 새끼, 입가에 가득한 웃음기나 지우고 말할 것이지.
극명하게 갈리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그래야죠, 팀장님.”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핑 레이는 입술을 안으로 만 채 꾹 다물었다.
“파멸을 부르는 조동아리.”
“예?”
“너 말이야.”
속내가 투명하게 보이는 녀석 같으니라고.
이제부터 네 별명은 파멸을 부르는 조동아리다.
움찔거리는 핑 레이를 흘겨본 후, 다시 입을 떼었다.
“승급전 치르고 와야지.”
“아…….”
카를라가 입술을 모으며 탄식했다.
나랑 훈련을 못 하는 게 그렇게나 아쉬운 일인가.
가끔은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날리려고 이를 악물던데.
뒤통수를 조심해야겠어.
“협회의 인정으로도 승급전은 치를 수 없어. 둘 다 알고 있지?”
미션 중 상당수는 [국가별 매칭]으로 진행된다.
두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같은 팀에서 활동이 가능한 건 플레이어 협회에서 비자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
다만, 승급전은 예외다.
“그렇군요. 본국에도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핑 레이는 웃음을 참았다.
아오, 얄미워라.
넌 다녀오면 훈련량 2배다.
아무도 모르게 핑 레이의 사형선고를 마음속으로 선고한 후, 카를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불복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오. 팀장님 말씀에 따르겠어요.”
얘는 골드 문 소속인데도 우리 팀에 머무르는 걸 더 좋아한단 말이지.
엘렌이 알면 섭섭하겠어.
“좋아. 그럼 해산, 각자 짐 싸고 나중에 봅시다.”
짝!
박수를 한 번 치는 걸로 축객령을 내렸다.
두 사람을 보낸 후, 나머지 팀원들을 모아서 승급전을 준비했다.
지영이가 불쑥 손을 들더니.
“스승님, 저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얼마든지.”
“우리가 질 거 같지 않아서요. 따로 준비할 게 있나 해서…….”
라며 말끝을 흐렸다.
“방심은 좋지 않지만, 네 말이 맞지.”
“헤헤, 스승님이 있는데 진다는 그림이 안 떠오른단 말이에요.”
“우리가 준비할 건 내샨 레이드다.”
내샨.
아이언 승급전에서는 볼 수 없는 [고대의 협곡]의 스페셜 보스 몬스터다.
협곡 중심에 위치한 호수.
세 진형 중 어느 한쪽도 패배하지 않은 채 이틀이 지나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괴물이다.
김영수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내샨이면 최소 50명은 달라붙어야겠군요.”
“스승님이면 뭐. 그렇죠?”
“그렇군요. 저희는 타국의 플레이어들을 견제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둘 다 레이드에 참여해야 합니다.”
욕망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붉은 광물.
“그건 뭔가요, 스승님?”
“아다만티움. 희귀 광물이다.”
지영이는 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시점에서는 아다만티움의 효용성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 저럴 만도 하지.
“팀장님, 그걸 보여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다만티움을 내샨한테 먹이면 3배로 강해지거든요.”
김영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만년 아이언에 머물러서인지, 내 말을 금방 알아듣는군.
“공략이 가능하긴 합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두 사람이 힘을 보태야 한다고.”
20층의 숨겨진 요소.
그건 아다만티움을 놈에게 먹이면 3배로 강해진다는 거다.
어째서 오리하르콘에 버금가는 희귀 광물을 왜 보스 몬스터한테 먹이면서 강화까지 시키는지 물어볼 만한데.
김영수는 내 발언 자체에 충격을 받아서 거기까지 생각을 못 하는 것 같고.
옆에 있는 지영이는…….
“스승님은 늘 이기는 싸움만 하시니까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튼 해산. 둘 다 컨디션 관리 잘해요.”
실버 등급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인 이무기도 홀로 사냥한 나다.
하지만.
아다만티움을 먹인 내샨은 현 수준의 나라고 해도 100%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승급전에서 부딪치는 두 나라의 플레이어들도 변수이고.
이번에도 아군 측 플레이어들이 대화가 잘 통했으면 좋겠군.
* * *
다음 날.
[바벨탑 접속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합니다.]
[현재 사용자가 머무는 공간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접속됩니다.]
[현재 브론즈 승급전이 활성화되어있습니다.]
[20층에 도전하시겠습니까?]
[Y/N]
10층 때와 마찬가지로 활성화된 승급전 버튼을 누르자, 주위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높이 솟아오른 성벽.
이번에는 대기실을 거치지 않고 곧장 전장으로 진입했다.
[이번 승급전은 한국 / 일본 / 필리핀입니다.]
[승급전에 참여한 플레이어 숫자가 가장 적은 국가는 필리핀입니다.]
[세 국가의 인원 차이가 10% 이상 나지 않으므로 조정 없이 시작됩니다.]
[한국 - 221]
[일본 - 227]
[필리핀 - 219]
[참여 인원이 많습니다. 맵 크기가 조정됩니다.]
이번에는 선발전 없이 본선이 바로 진행되었다.
미션 내용은 10층과 동일.
차이점이 있다면 주전장인 ‘고대의 협곡’의 크기가 전보다 2배 정도로 커졌다는 것이다.
“으으, 걷는 건 질색인데요.”
“별수 있나.”
참여 인원이 많아진 만큼 넓어진 전장.
속도전보다는 대회전 위주로 승부가 날 가능성이 크니, 내샨 레이드를 노리는 입장에선 환영할 만한 일이다.
“유진호 플레이어다.”
“와, 이번 승급전에 참여한다는 소문이 진짜였어?”
“이번에는 버스 좀 타겠네.”
“옆에는 이지영 플레이어도 있어.”
“그 결계 사용자?”
“역천 팀이 승급전에 참여한거구나.”
한국 측 플레이어들의 이목이 쏟아진다.
전보다 더 격렬해진 반응.
1차 대침식 초기에 [낙원의 밤]을 비롯하여 여러 게이트를 공략한 덕분이다.
유명세라는 게 귀찮긴 해도 이용하기에 따라 또 무기가 되거든.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발언권을 키우기가 좋았다.
그 순간.
“유진호 플레이어님!”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채로 다가오는 한 사내.
분명히 들어 본 목소리인데.
누구시더라?
“호오, 예전에 그대에게 옷을 헌납하였던 아이로구나.”
“아, 오지원이라고 했던가.”
튜토리얼 때 딥 슬라임한테서 구해 준 녀석.
그 뒤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여기서 또 만나게 되었군.
“오지원. 튜토리얼 이후로는 처음인가?”
“아, 아아. 진호 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해 주고 계실 줄이야!”
응. 아니야.
닉스가 말 안 해 줬으면 까먹었을 거다.
두 눈을 반짝이고 있는 오지원을 보고 있자니, 전보다 선망하는 감정이 더 짙어진 것 같다.
회귀 전에도 이만큼 열렬한 반응은 많이 못 봤는데.
괜찮은 거…… 맞지?
“진호 님, 이번 미션에서는 저희를 지휘해 주십쇼!”
오지원은 탱커 특유의 커다란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메아리치는 음성.
이번 승급전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지영이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내가 시킨 거 아니다.”
왜. 뭐.
나도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거든?
“유진호 플레이어라면야.”
“그 말, 괜찮은데.”
“의견이 갈라지는 것보다는 보증된 사람 말을 따르는 게 낫지.”
“좋아. 나는 그 의견에 찬성!”
“저도요!”
의외로군.
한둘 정도는 반발할 법도 한데, 의외로 군말 없이 오지원의 말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면 좀 편해지겠군.
“진호 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오지원이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 트롤 행위가 도움이 될 줄이야.
잠깐.
어쩌면 승급전의 지휘권, 다른 의미로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굳어 있는 김영수를 힐끗 봤다.
“영수 형님.”
“예?”
“저랑 일 하나만 하죠.”
지휘관이라는 재능.
이번 기회에 한번 꽃을 피워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