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전주에서 이무기의 정수와 [아르스 게티아]를 얻은 후, 곧장 서울로 돌아왔다.
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지영이가 환한 표정으로 달려오더니.
“스승님! 제가 드디어 카를라한테 유효타를 성공시켰어요!”
라고 말하면서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부모님한테 칭찬해 달라고 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한데, 말투는 그렇다 쳐도 그 내용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카를라가 도약할 때 공간을 압축하잖아요. 거기서 제가…….”
지영이는 한동안 두서없이 재잘거렸다.
흥분한 탓에 평소보다 말이 길었지만, 나는 쭉 들어 주었다.
“……그래서 카를라가 밀려났어요.”
대단하군.
벌써 결계의 증폭 효과를 응용해 낼 줄이야.
회귀하기 전보다 훨씬 빠른 성장속도다.
결계를 겹치는 운용방식이야 튜토리얼에서 내가 알려 줬다지만.
이번에는 카를라와 대련을 하다가 영감을 얻어서 스스로 깨친 거잖아?
단순히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길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니, 지영이도 가파른 성장세를 띄었다.
“장하다.”
“헤헤, 다 스승님의 지도 덕분이죠.”
“나 없는 사이에 깨달음을 얻어놓고는.”
“이러다가 청출어람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제발 부탁이니 그렇게 해라.”
난 지영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치하했다.
결계의 새로운 운용 방법을 깨친 것도 대단했지만.
한 방 먹인 상대가 ‘카를라’라는 사실도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카를라의 고유 능력은 결계의 하드 카운터니까.
“호오, 여는 해낼 줄 알았느니라.”
“말했잖아.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닉스의 칭찬에 지영이의 입술 끝이 하늘까지 닿을 만큼 치솟았다.
그때.
“오셨어요?”
무뚝뚝한 음성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카를라였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지영이가 어설프게 웃더니,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한 방 먹였다고 기뻐한 당사자가 왔으니 민망할 만도 하지.
“나한테 할 이야기라도 있나?”
“대련.”
“응?”
“해 주세요.”
오자마자 대련이라.
닉스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재미있구나.”
하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거, 재미있는 일은 혼자만 알지 말고 귀띔이라도 좀 해 주지?
“그래. 오늘 일정도 끝났으니 상관없겠군.”
카를라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쿠당탕- 카를라가 훈련장 바닥을 나뒹굴었다.
“설 수 있겠나?”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낫을 지팡이 삼아서 일어나는 카를라에게 다시 한번 다가갔다.
[백수제왕무 - 5초식]
[광서지를 사용합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날카로운 창처럼 카를라의 심장을 노린다.
팽그르르! 회전하는 창대에 아른거리는 공간 왜곡 현상.
공간 일부가 볼록렌즈처럼 앞으로 돌출되더니 광서지의 궤적을 틀어버렸다.
내공을 발출해서 다음 초식으로 이어가기에는 부족한 시간.
나는 당황하지 않고 왼손으로 [괴력]을 펼쳤다.
볼록렌즈의 정면을 가격하는 주먹.
공간 왜곡 능력이 깨지고, 회전축 중심을 가격당한 낫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괴력]으로 강화된 힘을 모두 해소하지 못한 카를라는…….
“읏.”
또다시 바닥을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지근거리에서 펼치는 광서지를 창대 회전과 공간 왜곡으로 흘려보낼 줄이야.
발상은 그렇다 쳐도, 고유 능력을 다루는 실력이 빠르게 늘어났다.
지영이에 버금가는 재능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흐읏,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설 힘도 없으면서. 무리하지 마라.”
“…….”
카를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운류보를 사용합니다.]
[혈조공 - 4초식]
[사두조를 사용합니다.]
하얀 목덜미 앞에서 멈춘 손.
“봐. 지금 반응도 못할 만큼 지쳐 있잖아.”
나는 지영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카를라야, 부축해 줄게.”
지영이는 훈련장으로 진입하더니 카를라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훈련장에서 멀어지는 두 사람.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의욕이 과해도 안 좋은데.”
“후훗, 그대는 사람의 심리를 다 들여다보는 것 같으면서도 이런 쪽에 유독 약하구나.”
“그거는 또 무슨 말이야?”
“저 아이, 지영이한테 호승심을 느낀 것이니라.”
호승심이라.
엘렌 녀석이 카를라와 틀어진 이유가 ‘힘’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렵네.”
“저 아이 말이더냐?”
“그래. 핑 레이는 차라리 뭔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데.”
핑 레이는 회귀 전과 비교하면 애송이였다.
감정적이고, 또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도 강했다.
어느 부분을 자극하면 부려 먹을 수 있는지가 뻔히 보인다는 말이지.
“카를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거라. 그래 봬도 순수한 아이이니라.”
“여신님의 눈에야 그렇겠지만 난 어렵다고.”
“하면, 여에게 저 아이를 맡겨 보는 건 어떠느냐?”
“여신님이 귀찮을 것 같은데.”
“후훗, 그대가 저 아이를 팀원으로 받은 건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어서일 터.”
“그거야 그렇지.”
회귀 전, 엘렌이 술에 취했을 때마다 종종 아쉬워했던 인재.
대련을 해 보니 왜 그녀가 아쉬워했는지 이해가 갔다.
완전한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으면…….
“여와 지영이에게 맡겨 보아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성과가 있든 없든.
뭐든 시도해 보는 게 좋겠지.
* * *
훈련장에서의 해프닝 후.
나는 숙소에 들어와서 옷가지를 모두 벗었다.
“여신님도 영체화 해.”
“혹 그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여가 지켜 줘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 그러니까…….”
내가 오욕칠정을 아득하게 넘긴 초월자도 아니고.
애초에 내 ‘초월’ 방법은 도를 닦는 것하고는 180도 달랐다.
벌거벗은 상태로 매력적인 여인과 한방에 있는 건 나라도 좀 힘들었다.
근데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 버리면 닉스가 약 올리기 딱 좋겠지?
“여신님한테 영향이 갈 수도 있어서 그래.”
“흐응, 이번에는 그대의 부탁대로 하마.”
닉스는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영체화를 했다.
작은 모습으로 있으니 그나마 좀 낫군.
등허리에 난 땀을 닦아 내고는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정수로 개변시킨 육체.
내 육신에는 여태껏 흡수한 정수들 중 상당수가 심어져 있다.
혈관, 심장, 피, 눈, 그리고 단전 등.
개변된 육체에 스며든 정수들이 형형색색의 빛을 흩뿌리는 걸 보고 있자니, 마치 별자리 같았다.
이제 하나씩 더 채워 나가야지.
난 아직 일체화시키지 않은 정수 중에서 둘을 불러왔다.
[변이 – 키메라의 정수]
[탈피 – 백년 뱀의 정수]
키메라는 여러 DNA를 인공적으로 융합해서 만들어진 불완전한 생물체.
놈의 정수에서 나온 ‘변이’ 스킬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건 정수의 근본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개변을 마치고도 키메라의 정수를 육체에 일체화시키지 않은 이유지.
한데, 이제는 그 불완전성을 보조해 줄 정수가 생겼다.
탈피를 거듭하면서 이무기, 나아가 초월종인 용으로 거듭나는 백년 뱀.
그 정수라면 변이의 페널티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변이’가 세포에 동화됩니다.]
꾸드득-!
키메라의 정수를 받아들이는 순간, 몸을 구성하는 세포가 하나둘 제 형태를 벗어나려고 꿈틀거렸다.
당장은 괜찮지만.
키메라의 정수를 통제하지 못하면 인간을 초월하기는커녕 지성 없는 괴물로 영락해 버릴 거다.
저번 신체 개변 때 동화시키지 않은 것도 그 이유.
[‘탈피’가 세포에 동화됩니다.]
이번에는 ‘산성 피’처럼 한 정수를 메인으로 두지 않았다.
한 부위에 두 정수를 동시 적용!
나머지 정수들의 힘을 조율하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정수를 육체에 녹여 냈다.
탈피는 기존의 구성물 중 불완전한 부분을 버리고 새로 육체를 구성하는 성질을 가졌기에 가능한 시도다.
백년 뱀의 정수가 세포에 스며들자, 제 형태를 바꾸려고 꿈틀대던 세포들이 안정을 되찾았다.
아오! 말이야 쉽지, 두 정수를 세포에 받아들이는 과정은 눈물 나게 아팠다.
온몸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
키메라의 정수가 날뛴 탓에 비명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두 정수가 융합합니다.]
[탈태 스킬이 추가됩니다.]
[탈태]
등급: ★★★
분류: 액티브
신체를 재구성한다.
사용 시 원하는 능력치를 1% 올릴 수 있다.
소량의 마나와 체력을 소모한다.
*재사용 시간: 60일
두 정수를 신체에 동기화시고는 바로 눈을 떴다.
-그리도 고통스럽더냐?
“뭐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더구나.
닉스의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
저거 봐, 놀릴거리 찾았다고 기뻐하는구먼.
한 명뿐인 계약자는 눈물 나게 아파했는데.
“두고 봅시다.”
“어이하여 그리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그 입에 맺힌 웃음기부터 지우고 말하지 그래?
닉스를 흘겨보고는 가부좌를 틀었다.
안정화된 ‘키메라의 정수’.
이제는 변이를 써도 눈이 세 개가 된다든가 팔 하나가 더 튀어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재생 능력에서 장점만 취하고 단점을 버린 획기적인 효과!
얻은 건 그거 말고도 더 있지.
[탈피를 사용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드드드드!
살짝 드러난 피부가 한 꺼풀 벗겨졌다.
한겨울에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맨 것 같은 느낌.
전신을 감싼 허물을 찢지 않고, 그 자리에서 [탈태]까지 사용했다.
강화시킬 능력치는…….
“근력.”
[탈태의 효과로 세포가 재구성됩니다.]
[근력이 1% 상승합니다.]
키메라와 백년 뱀의 정수가 서로의 단점을 없애고 장점만을 극대화시킨 스킬!
세포 하나하나의 성질이 변화한다.
탈피 때하고는 달리, 이번에는 검은 때가 우수수 벗겨졌다.
-평소에 잘 씻지 그러느냐?
“그런 거 아니거든!”
-여의 계약자라면 늘 품위를 지키어라.
이 여신님이!
탈태를 마친 후에 두고 봅시다.
피부에서 떨어진 때가 반투명한 허물 아래로 흘러내린다.
내가 이래서 허물을 그냥 뒀지.
조심스럽게 몸을 뺀 후, 탈피하고 남은 허물을 꼭꼭 싸매서 휴지통에 넣었다.
“흐흐흐흐.”
이번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얻은 게 많군.
[탈태]를 얻는 시기가 당겨지면서 스텟도 좀 더 빠르게 늘릴 수 있게 되었고.
자주 쓸 수는 없지만, 초재생 능력에 버금가는 ‘변이’까지 얻었다.
더 좋은 건 [탈피]와 [탈태]의 재사용 시간이 서로 겹치지 않는다는 것.
정수 융합을 해도 본래의 성질이 사라지지 않기에, 두 스킬을 번갈아서 전개해도 지장이 전혀 없다.
두 달마다 원하는 스텟 하나를 1%씩 늘릴 수 있다, 라.
지금이야 능력치가 100 단위이다 보니 증가치가 2나 3이지만, 더 강해질수록 효과도 커질 거다.
이 정도면 별다른 스펙 상승 없이도 브론즈가 아니라 실버까지 쭉 통과할 수 있겠어.
“음흉하게 웃는 걸 자제할 수는 없느냐?”
닉스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