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철퍽!
차가운 물이 발목까지 차오른다.
부츠 안으로 들어간 물 때문에 감각이 예민해지는 느낌이군.
[용이 머무는 뜰]은 이름과 달리 가파른 계곡이다.
극야로 발판을 만든 닉스.
와, 나는 쏙 빼놓고 자기만 물에 발 안 담그려고 극야까지 쓴 거야?
“왜 그러느냐.”
“치사하다.”
“그대도 여와 같이 할 수 있지 않느냐.”
닉스는 콧대를 높이 세웠다.
“예예. 아주 잘나셨네요.”
난 망설임 없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발을 내밀 때마다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
닉스가 극야로 물이 튀는 것을 막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교양 없는 행동은 자제하여라.”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동작을 일부러 크게 하는데도, 닉스는 극야의 힘을 절묘하게 다루어서 물방울을 다 막아 냈다.
“그대도 한번 받아 보아라!”
찰팍!
극야의 힘으로 개울을 치자, 물이 비산했다.
패턴 없이 무작위로 튀는 물방울들.
닉스가 한 것처럼 해 볼까?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스스슷!
극야를 다섯으로 나누어서 물방울들을 쳐 냈다.
“어때?”
“그대의 허벅지를 보아라.”
아.
미처 튕겨 내지 못한 물방울들이 옷을 물들였다.
내 사고(思考) 속도와 극야의 컨트롤 능력이 물방울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정해진 패턴 없이 날아드는 공격을 쳐 낸다, 라.
“이거, 괜찮겠는데?”
“무엇이 말이더냐.”
“수련 말이야. 극야의 힘을 다루어 낼.”
기발한 생각이 났다.
무작위로 날아드는 물방울들.
하나하나에 깃든 마나는 희미하기에, 마안으로 궤적을 모두 읽어 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정해진 규칙 없이 날아드는 물방울들을 모두 인지하면서 극야로만 쳐 내는 수련은 어떨까?
“이 상황에서 수련법을 떠올리다니.”
닉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다 여신님 덕분인걸.”
“참으로 그대다운 생각이니라.”
이상하군.
칭찬 같은데 왜 욕으로 들리는 거지?
“뭐, 수련은 나중에 하고.”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재배열되는 마나.
손바닥에 맺힌 마법진 너머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윈드 밤을 사용합니다.]
사방에서 몰아친 바람이 농구공 크기로 뭉쳐진다.
바람의 정령에게서 얻은 스킬.
난 구체가 완성되자마자 옆으로 투척했다.
계곡 측면으로 쏘아진 바람의 공이 개울물에 닿는 순간.
휘이잉-!
응축시킨 바람이 일제히 방출되면서 개울물을 밀어냈다.
“쉿, 쉬이잇!”
“쉬쉿!”
혓소리를 내면서 사방으로 튀어 오른 뱀들과 함께.
“호오, 저 뱀들이 게이트의 주인인가 보구나.”
“주인이라기보다는 종들이지.”
뱀 새끼들이 기척을 숨겨 봤자 내 눈을 속이지는 못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자리를 잡은 뱀들.
윈드 밤으로 선제공격을 가하니 습격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허공으로 튀어 오른 뱀들을 사냥하는 것쯤은…….
“파이어볼.”
반지에 맺힌 화염을 [탐욕의 가호]로 붙든다.
곧장 방출되지 않는 화염구.
뒤이어 윈드 밤을 전개, 간발의 차이로 연달아서 발사했다.
먼저 쏘아진 파이어볼이 폭발.
직후에 도달한 윈드 밤의 바람이 해방되면서 폭발력을 강화시켰다.
콰아아앙!
세 배가량으로 넓혀진 폭발 범위.
[탐욕의 가호]로 한층 강해진 위력에, 윈드 밤의 상호작용이 더해지니 본 마법보다 수배에 달하는 위력을 띠었다.
“쯧.”
“훌륭한 마법 연계였는데 어이하여 혀를 차느냐?”
“너무 과했어. 흔적도 안 남아 버렸잖아.”
난 미간을 찌푸렸다.
폭발 중심지에 휘말린 뱀은 타다 못해 가루가 되어 버렸다.
화력이 너무 센 것도 고민해 볼 문제군.
“또 정수 타령이로구나.”
“그건 내 근본이거든요? 절대 포기 못하지.”
“참으로 그대답도다.”
닉스는 짧은 한숨과 함께 손을 휘저었다.
수십 번 꼬아 낸 극야가 개울물 위로 솟구치더니, 뱀들을 낚아챘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던 뱀들.
내가 ‘기습’ 사실을 알려 줘서 그런지, 이미 극야를 개울에 깔아 둬 놓았다.
“이 미물은 재빠르구나.”
“방어력은 약해도 공격력이 엄청난 놈이야.”
“후훗, 여는 토끼를 사냥할 때에도 전력을 다하느니라.”
그 말은 또 어디서 배웠대.
닉스가 손가락을 퉁기자, 뱀들을 휘감은 극야가 벌어진 입 사이로 파고들었다.
푸악!
내부에서 날뛰는 극야.
뱀들은 몸서리를 치다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여가 그대에게 주는 하사품이니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나는 뱀들의 사체를 포식했다.
* * *
용이 머무는 뜰.
그 이름과 달리, 개울을 따라 올라가도 계곡의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거기에 쉴 새 없이 나오는 뱀들.
이매망량의 구덩이에서 마주한 잡귀들까진 아니어도 엄청난 물량이 쏟아졌다.
“여긴 참으로 번잡하구나.”
“권장이 실버잖아.”
레벨 200 플레이어가 와도 버거운 난이도.
뱀들은 맷집이 약한 대신 공격력과 스피드가 엄청났다.
한순간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위험한 수준.
뱀의 치악력과 이빨에 감도는 독은 나조차도 경시할 수 없었다.
뭐, 애초에 안 물리면 그만이니까.
“카아앗!”
뱀의 치악력이 대단해도 [금속화]까지 두른 가시 갑피를 한 번에 뚫진 못했다.
이빨이 낸 흠집 사이에서 울컥울컥 흘러나오는 보라색 액체.
‘산성 피’로 혈액의 성질을 바꾼 나조차도 무시할 수 없는 맹독이다.
“아주 독한 녀석들이야.”
무공을 쓸 것도 없다.
스스스슷!
극야의 힘으로 갑피에 매달린 뱀을 베었다.
[백년 뱀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희귀]
[스킬 – 탈피가 추가됩니다.]
[탈피]
등급: ★★
분류: 액티브
허물을 벗음으로써 육체를 재구성한다.
사용 시 모든 능력치가 1% 증가한다.
소량의 마나와 체력을 소모한다.
재사용 시간: 365일.
탑에서 출몰하는 녀석과 동일한 정수.
역시, 생각대로다.
“365일이면 1년 아니더냐?”
“맞아.”
“필멸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스킬이로구나.”
“뭐, 사용하기에 따라 다르지.”
모든 스텟 증가는 유용한 옵션이다.
그 기간이 1년이라서 문제지.
하지만.
[원시종의 정수]로 육체를 한 번 개변해 놓았기에, 저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일 방법이 있다.
“호오, 그대에게는 계획이 다 있구나.”
“전에도 말했잖아. 쓸모없는 정수는 없다고.”
“아무거나 삼키다가 탈이 난 자가 할 말은 아니로다.”
제길.
비겁하게 팩트로 공격하다니.
“쉬잇!”
용수철처럼 몸을 말았다가 도약하는 뱀을 낚아챈 후, 목을 꺾었다.
과하게 힘을 준 탓인지 기괴한 방향으로 돌아가 버린 뱀의 머리.
“애먼 곳에 정념을 낭비하지 말거라.”
닉스가 그걸 보고는 후훗, 하고 웃음을 흘렸다.
으으, 오래간만에 한 방 먹는군.
계곡을 거스르며 올라갈수록, 뱀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본래 탑 30층 위에서나 볼 수 있는 괴물.
30층 구간에서 나오는 거 치곤 약하지만, 그래도 등급이 높다 보니 경험치를 엄청나게 주었다.
콰콰콰콰-!
거센 물줄기를 토해 내는 폭포.
난 손을 들었다.
“여기가 목적지인가 보구나.”
“아마.”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포수.
그 아래로, 강한 마력 파장이 꿈틀거린다.
“설마, 그 뱀처럼 수중전을 벌어야 하는 것이더냐?”
“노크를 해 보면 알겠지.”
물속에서 싸우는 건 이쪽도 사양하고 싶다.
“아이스 스피어.”
재배열된 마나가 뭉쳐지면서 통나무 크기의 얼음창으로 구현된다.
제단 공략 때 사용했던 것처럼 탐욕의 가호로 묶어 두고.
연속적으로 주문을 사용했다.
[더블 스펠] 같은 스킬이 없으니, 이런 편법이라도 써야지.
내 마력 수치가 어지간한 마법 계열 플레이어보다 높기 때문에 전개 속도 자체는 빨랐다.
허공에 맺힌 얼음창이 열 개로 늘어났을 때.
마지막으로 윈드 밤을 사용, 폭포가 쏟아지는 곳으로 투척했다.
퍼어엉!
하늘 위로 솟구치는 폭포수.
묶어 두었던 얼음 창들이 움푹하게 패인 물 아래로 쏘아졌다.
천안으로 읽은 마력 파장대로라면.
얼음창 다발은 저 아래에 있는 괴물에게 닿을 것이다.
잠시 후.
“크라라라라!!”
무언가의 포효 소리가 폭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영험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되먹지는 못해도 영물이니까 그럴 거야.”
그리스 로마 신화로 놓고 보면 페가수스쯤 되는 영물.
어디까지나 영혼의 ‘격’이 그렇다는 말이지, 둘이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니다.
잠시 후.
검은색 비늘로 뒤덮인 커다란 뱀이 폭포 위로 솟구쳤다.
[영락해 버린 이무기 류]
눈에 감도는 탁기.
비늘은 찬란함 대신 이끼가 드문드문 낀 것처럼 더럽혀져 있다.
그 이름대로 승천(昇天)에 이르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 이무기.
“크라라라라!!”
그럼에도.
존재감만큼은 회귀 후에 마주한 적들 중에서 가장 높았다.
“여신님 커버해 주는 건 어려워.”
“후훗, 그대야말로 여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그러게.”
천안(千眼)에 비치는 마력의 양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계곡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폭발적인 기세를 띤 이무기의 마력.
바라보는 것만으로 시신경이 자극되어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순순히 밖으로 나와 줘서 다행이네.”
인정해야겠네.
저런 괴물과 수중전을 벌이는 건 자살행위다.
도발이 먹히지 않았으면 게이트 공략도 어려웠겠어.
“여의 축복이 필요하겠구나.”
전신으로 스며드는 밤의 축복.
올라간 신체 능력 덕에 마음이 끓어오른다.
“크라라라!”
이무기의 입에 물려 있는 구슬이 빛을 토해 냈다.
[뇌둔(雷遁)의 술(術) - 낙뢰(落雷)]
삽시간에 몰려드는 먹구름.
굵은 벼락이 하늘에서 아래로 꽂힌다.
[민첩한 뒷발]로 비스듬히 도약.
번개가 떨어지기 직전에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가시 갑피를 사용합니다.]
[락 스킨을 사용합니다.]
[금속화를 사용합니다.]
방어 스킬 셋을 연달아 전개.
동시에 [탐욕의 가호]로 물 일부를 지배해서 딱딱하게 성질을 변형했다.
“너무 신중한 것 아니더냐?”
“여신님은 극야로 몸을 보호해서 모를 거야.”
개울물을 강타한 번개.
물은 전기를 퍼트리기에 가장 적합한 매질이다.
순식간에 퍼져 나간 뇌전의 기운이 폭포 아래로 흘러내리는 개울물로 퍼져 나갔다.
파지직!
계곡 여기저기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탄내가 올라왔다.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 터라 피해가 거의 없었지만, 혹시 몰라서 꽁꽁 싸맸다.
“그 바알이라는 작자가 준 반지는 사용하지 않는 게냐?”
“이무기랑 나랑 마력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그러다가 뒈져요.”
마나 업소브의 기준은 서로의 마력 차.
정확히는 그 마법에 실린 마력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느냐인데…….
이무기 녀석이 작정하고 사용한 도술을 막아 낼 만큼 내 스텟이 높지는 않았다.
나는 [탐욕의 가호]로 굳힌 물을 박차면서 하늘로 도약했다.
수면에서 5미터가량 떠 있는 이무기.
민첩한 뒷발까지 사용하니, 금세 지척까지 도달했다.
“크라라라!”
현란하게 움직이는 이무기의 꼬리.
꼬리 끝에도 머리가 달린 것처럼 교활한 동작으로 내 틈을 노렸다.
하지만.
내 마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
마력의 파장과 움직임을 빠르게 읽어 내고는 어딜 노리는지 확인했다.
[날카로운 발톱을 사용합니다.]
[금속화를 사용합니다.]
[탐욕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드드드!
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서 강화한 손톱.
거기에, 수라마령심공에 기반을 둔 패도적인 내공으로 산군파랑조를 펼쳤다.
서걱!
단단한 비늘이 잘려 나가고, 검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크라라라?!”
뱀 새끼야.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우는 소리 하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