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엘렌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섰다.
반대편에 선 오크 전사, 마라크가 콧김을 내뿜더니.
“쿠륵, 이 차원의 전사들. 약해빠졌다.”
라며 도발했다.
연속으로 패배한 골드 문의 플레이어들.
그 모습을 쭉 지켜본 엘렌은 묵묵히 전투를 준비했다.
[제5라운드를 시작합니다.]
서로를 가로막는 초록색 벽이 사라지는 순간.
드득, 드드득!
엘렌의 육신이 부풀어 올랐다.
탄력 있게 늘어나는 갑주와 옷가지들.
전보다 2배, 아니 3배 가까이 커진 엘렌은 말 그대로 전신이 흉기처럼 변했다.
[인크레더블].
엘렌의 고유 능력이다.
“쿠륵, 이 인간. 싸워 볼 맛이 낫겠다.”
“좀 매운 맛일 거야.”
허스키한 목소리로 변한 엘렌이 돌진했다.
마주한 오크 전사도 글레이브를 꼬나 쥔 채 앞으로 나섰고.
끝이 휜 곡도(曲刀)와 주먹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강력한 힘과 힘의 충돌.
그 여파로 광풍이 휘몰아쳤지만, 승급전에 나선 이들 중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프네, 조금.”
“쿠륵?”
칼날이 엘렌의 피부를 파고들었지만.
이내 살과 근육이 재생되면서 오크의 글레이브를 밀어냈다.
그뿐이랴.
엘렌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친 오크의 양팔이 반대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압도적인 힘과 재생력.
“쿠륵?”
“다음 선수 나와!”
엘렌은 무력화된 오크 전사의 목을 두둑, 꺾어 버리고는 호기롭게 외쳤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오크 전사가 연달아 패배했다.
하지만.
“쿠륵, 쓸 만한 전사가 딱 하나 있구나.”
다섯 번째 전사와 마주하는 순간, 엘렌은 직감했다.
만전의 상태로 부딪친다 한들, 눈앞의 오크 전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져 주지는 않아.”
엘렌은 이를 악문 채 최후의 오크 전사에게 달려들었다.
치열하게 이어지는 접전.
재생이 안 될 정도로 깊은 상흔이 하나둘 새겨졌고.
어느 순간, 엘렌은 움직임을 멈췄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웅덩이를 이룰 정도로 엄청난 출혈.
엘렌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가까스로 섰다.
“쿠륵, 진정한 전사로군.”
“너, 하나만 물을게.”
“쿠르륵, 진정한 전사. 너는 질문할 자격이 있다.”
“너희들은 크로크에서 얼마나 강한 거지?”
오크 전사는 엘렌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킁. 우리는 부족 최고의 전사다.”
“너희 부족이라는 게 나라라면…… 세계에 얼마나 있는 거야?”
“쿠르륵, 오크는 부족 많다. 우리는 검은돌 부족. 대부족은 아니다.”
부자연스러운 화법.
하지만.
엘렌은 저 괴상한 화법에서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었다.
미국 최고의 플레이어인 자신조차 넘을 수 없었던 오크 전사.
전 세계를 뒤져 봐도 단신으로 저 오크를 이길 만한 플레이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데…….
“빌어먹을.”
엘렌은 승급전에서 처음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인류에서 손꼽히는 플레이어.
그런 자신마저도 이기기 힘든 상대가 저 차원에선 최강자도 아니고 평범한 축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으로.
다이아몬드 등급 너머에서는 저런 괴물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가지도!
“이제 쉬어라, 진정한 전사.”
오크 전사의 도끼가 엘렌의 목을 베었다.
[크로크(56) 차원 측이 승리했습니다.]
[승리한 차원 측 인원은 전원 다이아몬드 등급으로 승급합니다.]
[패배한 차원 측은 40%만 승급합니다.]
[승급 인원은 공헌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골드 문의 허무한 패배.
전 세계 곳곳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 * *
로비가 적막으로 물든다.
충격적인 골드 문 플레이어들의 패배.
엘렌의 목이 잘리는 순간, 중계 화면도 꺼졌다.
눈을 둥글게 뜬 지영이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엘렌 님이 만전인 상태였으면 달랐을 거예요!”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거다.”
난 단호한 투로 말했다.
시간선이 달라졌어도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아니, 그래도 회귀 전보다는 낫구나.
그때는 첫 번째 선수한테 골드 문 플레이어 전원이 패배했었으니까.
시간 축이 틀어지면서 더 약한 팀을 만난 게 행운이었다.
닉스는 흥미로운 기색으로 TV를 바라보았다.
“저 괴물, 미션에서 보던 흉물과 비슷하게 생겼구나.”
“동일한 종족이야. 탑에서 만든 건 그들의 그림자를 비춘 모조품이지만.”
오크, 고블린, 트롤, 오우거 등.
바벨탑에 출몰하는 괴물들은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다.
고블린처럼 해당 차원이 바벨탑에게 흡수되어 멸망해 버린 곳도 있지만 말이야.
나는 카를라를 흘겨보았다.
“괜찮나?”
“네. 괜찮아요.”
무뚝뚝한 투로 대답하는 카를라.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사부로 모셨던 엘렌.
그녀가 처참하게 패배했으니,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흥. 내가 일찍 각성해서 승급전에 나섰으면 저렇게 패배할 일은……”
“그럴 만한 실력인지. 대련으로 확인해 볼까?”
“내가 잘못했다. 사과할게. 미안합니다.”
핑 레이는 바로 꼬리를 말았다.
허세 부리기는.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니치시 기준으로 00시 00분이 되자마자 승급전에 도전한 각국 유명 플레이어들.
중계 기능 덕분에 승급전 결과가 실시간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는 전패!
중국, 일본, 영국 등 플레이어 전력이 강한 나라들조차 모조리 오크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대형께서 패배하시다니.”
바닥에 주저앉는 핑 레이.
생각 짧은 거 보소.
엘렌이 패배했을 때 구룡방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거라곤 예상을 못 했나 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홍윤수 팀을 포함, 플래티넘의 끝에 도달한 몇몇 팀들이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모두 패배했다.
역시 커다란 흐름을 바꾸기에는 아직 부족하구나.
내가 회귀함으로써 1차 대침식의 피해는 대폭 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 힘이 닿지 않는 부분까지는 여전히 기존 역사의 흐름대로 흘러갔다.
이거, 쉴 틈이 없겠어.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서 선두 그룹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멸망의 시대가 오는 것을 막고 나아가 복수까지 하지.
“후훗, 여의 계약자라면 저렇게 밀리지 않았을 터인데.”
“아서라. 심해 등급에 머무르는데 언제 저기까지 올라가겠어?”
“여가 보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거늘.”
난 희미하게 웃으면서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게이트 사태가 일어나면서 생긴 한 가지 장점.
바로 경험치다.
하루에 두 번만 도전 가능한 탑의 제약.
게이트는 플레이어의 체력만 허용되면 얼마든지 공략할 수 있다.
“앞으로 더 바빠지겠지.”
“이 정도로도 충분히 바쁜데요?!”
지영이가 비명을 질렀다.
* * *
승급전의 여파로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인 뒤에도.
내 생활 패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전에는 팀원 훈련.
오후는 미션을 반복적으로 돌거나 게이트 공략에 나섰다.
활동 반경은 수도권.
구례까지 내려간 건 [이매망량의 구덩이]라는 기연이 숨겨진 장소를 알아서였고.
어지간하면 멀리 이동하는 건 사양했다.
브론즈나 아이언, 혹은 언랭크에서 공략 가능한 게이트는 이미 탑에서 마주했던 괴물들을 내포했다.
새 정수를 얻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혼원룡의 심장] 효과로 마력 스텟을 쌓는 걸로 만족했다.
그러던 중.
-진호 님, 전에 경계하셨던 새로운 유형의 게이트가 나타났습니다.
“새 유형요?”
-1인 출입 가능 제한 게이트입니다.
한수창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게이트 이름과 난이도가 어떻게 됩니까?”
-용이 머무는 뜰이라는 이름입니다. 난이도는 실버 이하군요.
난 웃음을 삼켰다.
이매망량의 구덩이에 이은 두 번째 기연.
‘용이 머무는 뜰’은 회귀 후 반드시 공략해야 할 장소로 점찍어 둔 게이트다.
문제가 있다면 게이트의 출현 시간이나 장소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한수창한테 ‘변수'라는 명목으로 1인 제한 게이트가 나오면 알려달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한국에서 첫 번째 1인 제한 게이트가 ‘용이 머무는 뜰'이었다.
운이 좋군.
“그 게이트, 제가 공략해도 되겠습니까?”
-진호 특무대원님이 등급을 넘는 힘을 지닌 거야 알죠. 그래도 실버는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여차하면 빠지죠, 뭐.”
-후, 진호 님이니 별일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만. 알겠습니다.
역시, 플레이어 협회에 선을 대놓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1차 대침식 이후에 협회와 연을 만들려고 했으면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특무대 근황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게이트 공략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고 싶어 하는 플레이어들이 많이 가입하셨습니다.
“한수창 팀장님이 시대를 앞서셨군요.”
-너무 거창한 거 아닙니까? 애초에 진호 님 덕분에 떠올린 아이디어였습니다.
회귀 이전에도 있었던 조직.
난 그저 특무대가 창설될 시기를 앞당긴 것뿐이다.
-참, 팀원 분들은 어찌…….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둘은 외국인이라니까요.”
-에이, 그러지 마시고 진호 님께서 한번 힘써 주시면 어떻습니까?
“됐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한수창한테 얻은 정보.
[용이 머무는 뜰]은 전주의 지역, ‘용머리고개’의 정상 부근에서 생성된 게이트다.
전주라.
[이매망량의 구덩이]보단 안 멀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가야겠네.
“스승님, 그럼 공략 준비할까요?”
“이번에는 혼자 간다.”
“왜요?!”
“공략 제한 인원이 1명인데. 우르르 몰려가서 뭐 하려고?”
“아, 아니. 그래도요. 저희는 팀인데…….”
“팀이라고 해서 꼭 몰려다닐 필요도 없어. 탑 공략도 따로 하는데.”
“후훗, 열심히 훈련하여라. 계약자를 보조하는 건 여 하나로 충분하니.”
여신님, 그렇게 말하는데 왜 히죽거리십니까?
팀원들에게는 자율적으로 훈련할 것을 지시하곤 전주로 향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화석을 캐고 나서 두 번째군.
“진호 님, 여기입니다.”
협회에서 파견 나온 기사님이 시가지에서 유독 불룩 솟아오른 곳에 정차했다.
전주의 중심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옆으로는 오래된 집들이 쭉 늘어서 있다.
길가 옆에 자리를 잡은 푸른 웜홀.
반짝거리는 푸른 타원에 손을 얹자, 메시지가 아른거렸다.
[용이 머무는 뜰]
[제한 – 실버 이하 1명]
한수창 팀장이 언급했던 그 게이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여기만 공략하면 당분간은 꼭 얻어야 할 기연이 없다.
그만큼 [용이 머무는 뜰]이 중요하다는 것.
향후 계획을 위해서는 반드시 공략해야 할 게이트다.
제한이 실버에, 1명만 출입할 수 있다는 건 200레벨이 되어야 공략할 엄두가 난다는 표현인데…….
등 뒤에 선 닉스를 흘겨보았다.
“이번에도 잘 부탁할게.”
“후후훗, 여만 믿거라.”
둘이라면 충분하지.
나는 게이트 너머로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