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서울로 돌아가는 길.
나는 [이매망량의 구덩이]에서 얻은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본래의 역사에서는 조승철이라는 플레이어가 ‘유부의 열쇠’를 얻는다.
탑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는 아이템.
조승철은 그곳에서 미스틸테인을 획득했다고 했었지.
신의 피를 뒤집어쓴 나뭇가지로 벼려 낸 목검.
이전까지는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플레이어였지만, 검을 쥔 후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더 유명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인류의 반역자.
미스틸테인은 종말의 시대를 알리는 마검.
탑 지하의 고신족들은 마검에 멸망의 의지를 심어 두었다.
검을 쥐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용자의 마음을 잠식하는 마검.
조승철은 마검에게 완전히 세뇌당한 채로 고신족들의 앞잡이가 되었다.
유부의 열쇠가 내 손에 들어오면서 그럴 가능성이 사라졌지만.
닉스가 돌연 내 옆으로 슬며시 몸을 밀착시켰다.
“그 열쇠에 비밀이라도 있느냐?”
“비밀은 무슨.”
사람 당황스럽게 하는군.
미래의 일을 말해 줄 수도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아이템의 정보를 봐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나와 있으니.
닉스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그렇구나.”
하곤 묘한 웃음을 지었다.
말하는 투가 1그램도 믿는 눈치가 아니군.
난 유부의 열쇠를 욕망의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다.
현재의 수준으로는 무리.
최소 골드 등급은 되어야 탑 지하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다.
뭐,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탑의 지하에는 미스틸테인 외에도 여러 고신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곳이라면, 신화의 영역에 다다른 정수들을 포식할 수 있으리라.
“스승님!”
“깜짝이야. 왜?”
“이거 보세요. 대박 사건이에요!”
협회에서 제공한 차량은 대형 리무진.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지영이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미국 유력 길드, 골드 문에서 다이아몬드 승급전을 준비하다.』
『미국 랭킹 1위 플레이어인 엘렌을 필두로 한 5명으로 구성!』
『중국의 랭커 장 우페이, 구룡방의 정예로 승급전을…….』
그래.
승급전을 잊고 있었군.
탑과 세계의 동기화가 20%에 도달하면서 생긴 또 하나의 변화.
60층 이상으로 도전할 수 있는 권리다.
인류가 다이아몬드 등급으로 올라가는 날이 원래의 역사보다 2달 정도 빨라졌네.
“60층 너머는 미지의 공간이잖아요. 뭐가 있을지 기대돼요.”
“글쎄…….”
난 쓴웃음을 지었다.
60층, 그러니까 다이아몬드 등급부터는 경쟁자가 달라진다.
이웃 나라가 아닌 차원 너머의 존재들.
인류처럼 지성을 지닌 생물체들과 경쟁을 벌이게 된다.
과연 두 번째 삶에서도 과거와 동일한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군.
“그거 아세요?”
“60층부터는 중계가 된다, 를 말하는 건가.”
“와, 독심술 익히신 건 아니죠?”
세계와 탑의 동기화가 20%를 넘어서는 순간 나타난 또 하나의 변화.
그건 미션을 중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방송처럼 양방향 상호작용이 있는 건 아니고, 단순히 ‘중계’에 불과하지만.
여태까지는 미션 결과를 자정마다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실시간으로 보는 게 가능해졌다.
즉, 이번 승급전은 관전할 수 있다.
미래와 바뀐 시간선.
승급전의 결과도 바뀌는 건 아닐까, 내심 기대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일은 쉬어야겠네.”
“진짜요?”
“그리니치 시간 기준으로 00시. 아침이면 승급전이 시작될 거야.”
“카를라, 너희 스승님의 활약상을 볼 수 있겠어.”
지영이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를라에게 말을 걸었다.
“…….”
“우리 같이 응원하자!”
“응.”
호오. 지영이 녀석, 의외로 친화력이 대단하단 말이지.
닉스하고 말을 편하게 하는 것도 그렇고.
회귀 전에는 통곡의 벽이라는 이명과 함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이번에는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아니. 저게 원래의 성격이었겠지.
* * *
1차 대침식 이후, 사람들이 플레이어를 바라보는 시선은 확 바뀌었다.
-게이트의 괴물들. 마나가 실리지 않은 공격에 저항력을 지녀.
-현대 총화기로는 몬스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움.
-이계화 현상이 일어난 곳은 마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서 일반인에게 독으로 작용.
아파트 밀집 구역에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난다면?
1차적으로 괴물에 의한 인명 피해.
현실과 융합한 게이트를 닫아도, 비정상적으로 올라간 마나 농도가 떨어지려면 시간이 걸린다.
즉, 한번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면 해당 지역을 수개월 이상 비워야 한다.
이전까지는 유명 스포츠 스타와 비슷한 인식이었다면.
상상 속 괴물들이 현실로 튀어나온 후에는 시민의 목숨을 지켜 주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더 많은 플레이어를 확보해야 한다.”
“숫자만 많아서는 안 돼. 수준도 중요하다.”
각국은 이전보다 더 플레이어 확보에 열을 올렸다.
플레이어의 수준은 해당 나라의 안정도.
나라의 영토를 보존하고 국민이 마음 놓고 살아가려면 강한 플레이어들이 있어야 했다.
플레이어들에게도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겼다.
게이트.
탑 외에 이계의 괴물들이 생성되는 미지의 공간이다.
“클리어 보상이 엄청나던데.”
“그 대신 위험하잖아. 죽을 수도 있다고.”
“출몰하는 괴물 종류에 따라서는 돈을 벌 수도 있어.”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탑에서 수입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다.
미션 보상 CP를 현금화하거나 아니면 특정 층계에서만 나오는 물품을 채집하거나.
한데 게이트는 다르다.
클리어 때 얻는 보상이 미션 최초 도전처럼 굉장히 후한 편이었다.
바벨탑과 다르게 진짜로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더 큰 보상을 얻기 위해 움직이는 플레이어들도 꽤 있었다.
그렇기에.
각국 정부에서 공인한 플레이어 협회, 혹은 관련 부처의 위상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드디어 승급전의 날이 밝았군.”
윌리엄 록펠러는 집무실에 선 남녀를 쭉 훑었다.
골드 문의 핵심 플레이어.
엘렌을 포함한 5인은 완전무장을 갖추었다.
“컨디션은 괜찮나?”
“예, 마스터.”
엘렌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게이트들을 폐쇄하느라 힘들 텐데. 미안하게 되었어.”
“아닙니다.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잖아요.”
“한편으로는 길드의 위상을 높이기도 하고.”
골드 문은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 초기 때만 해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
진호가 알린 정보는 역으로 유력 길드의 플레이어들 일부가 몸을 사리게 만든 부작용도 존재했다.
하지만.
엘렌 테일러가 미국으로 돌아온 후로부터 반대가 되었다.
[수호의 보주 - 유니크]
[나비의 단검 - 유니크]
[프로미넌스 - 3성급 마법 스킬 북]
…….
탑 저층에서는 구하기 힘든 상위 아이템들.
아이언에서 브론즈 등급 사이의 난이도인데도, 엄청난 보상이 주어졌다.
엘렌은 진호가 게이트에서 얻은 보상들을 윌리엄에게 알렸다.
“그 덕분에 우리도 태도를 확실히 할 수 있었지.”
각지에 열린 게이트를 적극적으로 공략.
여러 보상들과 국가의 신임, 두 가지를 모두 잡았다.
그 와중에 플레이어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위험한 순간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망자 한 명 없이 여러 게이트들을 공략했다.
그 중심에는 미국 랭킹 1위 랭커인 엘렌이 있었고.
“이미 알고 있겠지만 파이브 스타와 구룡방도 이번 승급전에 나선다.”
파이브 스타는 미국 내에서 골드 문과 경쟁하는 길드.
구룡방이야, 중국 제일의 길드로 호시탐탐 세계 제일이 되겠다고 골드 문을 견제하는 중이었다.
윌리엄 록펠러는 짝! 하고 손을 모았다.
“모두 해산. 1시간 남았으니 컨디션 관리 잘하자.”
“예!”
입을 모아 외치는 플레이어들.
윌리엄은 팀원 중 엘렌만 따로 불렀다.
“한국에 보내기를 잘했네.”
“모두 미스터 유가 정보를 공유해 준 덕분이죠.”
“이럴 땐 파견을 지시한 길드 마스터한테 공을 돌리지 않나?”
“이득을 볼 거라고 확신해서 움직이셨잖아요.”
“그야 그렇지. 난 록펠러 가문의 사내니까.”
록펠러 가문.
미국 정·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명망 있는 가문이다.
윌리엄이 록펠러 가문 사람 중에서는 성격이 가벼운 편이긴 해도, 투자에 대한 눈빛만큼은 남달랐다.
“카를라는 일부러 한국에 놓고 온 건가?”
“본인의 의사예요.”
“더 강해지고 싶어서 너한테 가르침을 구했던 거잖아.”
“저를 상무님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엘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에서 진호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스승님이라고 불렀었는데, 단기간에 호칭이 바뀌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강해지는 것뿐.
엘렌보다 진호가 더 스승에 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위험한걸. 그러다가 유망주 하나 뺏기는 건 아닌가 몰라.”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반쯤은.”
윌리엄은 너털웃음을 짓다가 돌연 표정을 싹 굳혔다.
“미스터 유 영입. 가능성은 얼마나 있나?”
“Zero……는 아니지만, 한없이 0에 수렴해요.”
“그렇군.”
“포기하시는 건가요?”
“설마.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나.”
윌리엄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손에 넣는 탐욕의 화신!
그게 윌리엄 록펠러의 삶의 방식이었다.
“하여간 수고했어. 여유가 없어서 이런 이야기도 못 나눴네.”
“승급전에서 좋은 결과 거둘 수 있게 노력할게요.”
“우리 길드의 자랑께서 힘써 주신다고 하니 좋은 결과 나오겠지.”
엘렌은 빙그레 웃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1시간 후.
[바벨탑 접속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합니다.]
[현재 사용자가 머무는 공간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접속됩니다.]
[현재 다이아몬드 승급전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60층에 도전하시겠습니까?]
[Y/N]
엘렌을 포함한 다섯 명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곤, Y 버튼을 눌렀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이동된 엘렌 일행.
“모두 마음 놓지 마. 어떤 식으로 승급전이 진행되는지 모르니까.”
팀 리더인 엘렌이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세계와 탑의 동기화가 20%를 넘어서면서 추가된 중계 기능.
골드 문은 이번 승급전을 전 세계에 중계한다는 과감한 수를 선택했다.
베일에 감싸인 승급전.
좋은 결과가 나오면 골드 문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차원 최초의 다이아몬드 승급전입니다.]
[다이아몬드 등급에 진출한 지 얼마 안 된 차원끼리 매칭됩니다.]
[지구 vs 크로크]
[5 대 5로 대결을 벌입니다. 최후의 승자가 속한 팀이 승리합니다.]
간단한 규칙.
여태까지의 승급전에 비하면 직관적이면서 쉬웠다.
“난 또 무슨 요새라도 공략하라는 줄 알았네.”
“5 대 5면 금방 끝나겠어.”
“다른 차원이라. 탑을 오르는 건 인류만이 아니었나?”
삼삼오오 떠드는 골드 문 길드원들.
대기시간이 끝나자, 환한 빛과 함께 누군가가 소환되었다.
초록색 피부에 근육질 몸매.
모발 하나 없이 벗겨진 머리 아래로 돼지를 닮은 코가 달린 괴물이 골드 문 길드원들을 노려보았다.
“쿠르륵, 이번 승급전은 너무 쉽겠구나.”
“잠깐, 설마 이 오크 새끼가 승급전 상대라고?”
“오크든 뭐가 되었든. 다섯을 먼저 쓰러트리면 된대잖아.”
골드 문 소속 플레이어 한 명이 자신만만하게 나갔다.
탑에서 자주 본 괴물.
오크 따위는 그들의 적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5분 후.
엘렌을 제외한 나머지 팀원들은 첫 번째 오크 하나한테 모조리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