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커흑!”
한 줄기 비명과 함께 제단 바깥으로 튕겨 난 핑 레이.
시커먼 로브로 전신을 감싼 마법사 하나가 지면에서 30센티 정도 떠오른 채,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감히. 잡것들 따위가 클리포트의 행사를 방해하는구나.』
요란하게 울리면서 공명을 일으키는 목소리.
검은 로브 위로, 붉은 글자가 아른거린다.
[가아그셰블라의 가지]
11개 제단의 인질들을 해방했을 때만 나오는 보스 몬스터다.
음차원의 마나가 소용돌이친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의 근원이 바로 저 괴물이다.
“이…… 王八蛋!”
바닥에 나자빠진 핑 레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흔들거리는 검은 로브.
『그 공격을 버텨 낼 만큼 강인해 보이지 않았건만.』
검은 번개가 핑 레이의 정수리에 꽂히기 직전.
지영이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 진동 결계를 펼쳤다.
결계 한 장 가지고는 모두 상쇄시키는 게 불가능한 위력!
그 순간 핑 레이는 본능적으로 내공을 전개, 뇌기에서 육체를 보호했다.
무공이 고강했다면 호신강기라는 형태로 구현되면서 번개를 막아 냈을지도 모르지만.
핑 레이의 수준이 모자라서 즉사를 면하는 정도로 그쳤다.
“힐.”
은은한 빛이 손에서 흘러나온다.
16층에서 나오는 괴물, 코볼트 성직자의 정수에서 얻은 스킬이다.
“쿨럭. 팀장은 치유 마법도 쓸 줄 아……십니까?”
“잔재주가 좀 많아서.”
핑 레이가 나를 괴물 보듯 바라봤다.
마음에 드는 눈빛이군.
옆에 두고 시간이 될 때마다 대련을 빙자한 폭력을 가한 보람이 있다.
『내 마법을 목도하고도 두려움에 떨지 않다니.』
“그깟 번개가 뭐 어쨌다고.”
『아무래도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녀석들인 것 같군.』
가아그셰블, 아니지. 너무 길다.
검은 천 쪼가리를 뒤집어쓴 녀석은 요란하게 양팔을 벌렸다.
『어린 종들이여, 그대들의 목숨을 바쳐라.』
“아, 안…… 끄으으으!”
“꺼윽! 으어어.”
남은 흑마법사들이 스스로의 목을 조르거나 게거품을 물면서 쓰러졌다.
생명력을 흡수하여 암흑 마나로 치환하는 스킬.
검은 로브 녀석은 그 기운을 키메라들에게 불어넣었다.
『죽음마저도 나를 섬기리니. 레이즈 데드!』
널브러진 키메라들의 사체가 마구 들썩거리더니.
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키메라 구울.
안 그래도 흉측한 놈들이었는데, 언데드로 제작하니 더 끔찍한 몰골로 변했다.
『이곳은 너희의 무덤이 될 것이다.』
“팀장님, 아까처럼 마법 공격으로 요격은 못 합니까?”
핑 레이가 한결 고분고분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거 1분이면 끝이야.”
“빌어먹을. 그럼 이 구울들을 다 쓰러트려야 한다는 말이군요.”
“왜, 어렵나?”
핑 레이는 나를 빤히 보더니.
“크흥. 위대한 중화의 전사에게는 위기도 아닙니다!”
하고는 키메라 구울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대는 참 짓궂구나.”
“동감이에요.”
닉스와 지영이가 나를 힐난했다.
아니.
핑 레이한테 동기부여 좀 해 준 걸 가지고 그렇게 매도하냐?
“지영아.”
“네. 방어는 맡겨 주세요.”
“그렇다면 여가 지영이를 지켜 주겠노라.”
아주 호흡이 척척 맞는구먼.
“그러면 맡긴다.”
이 싸움.
장기전으로 갈수록, 저 천 쪼가리 녀석한테 유리하다.
수복 능력을 지닌 키메라로 만든 구울.
머리나 심장을 파괴해도 암흑 마나만 부여하면 재생될뿐더러, 복원 속도도 일반적인 구울보다 빨랐다.
저 키메라들은 제작 단계부터 언데드 병기로 활용될 것까지 감안해 두었으니.
“둘은 내 근처로 와.”
카를라와 핑 레이가 키메라 구울들을 쓰러트리면서 곁으로 다가왔다.
“팀장님, 다음 지시는?”
“대책 좀 말해 주십쇼. 이대로 가면 내공이 먼저 떨어지겠어.”
난 제단 위를 가리켰다.
“이제부터 저놈에게 향하는 길을 내는 척한다.”
“길을 내는 척이라니.”
“알겠습니다.”
상이하게 다른 반응.
하지만.
각자 품은 생각이 다를지라도, 두 사람의 움직임은 동일했다.
[초열검]
[엑셀레이트]
극양의 성질을 띤 내공이 칼에서 발출되었고.
낫이 파르르 떨리면서 키메라 구울의 몸뚱이를 붕괴시켰다.
『무익한 짓을.』
천 쪼가리가 암흑 마나를 흩뿌렸다.
본래라면 완전히 파괴되어서 재생도 불가능했을 구울이지만.
재생에 특화된 키메라를 베이스로 한 탓에 암흑 마나로 복원이 가능했다.
물론.
[구울에게 포식을 사용합니다.]
[포식한 정수: 3.1%]
[정수 등급: 일반]
암흑 마나로 복구할 시체가 남아있다면 말이야.
『이, 이게 무슨?!』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나는 히죽 웃었다.
본래는 저 천 쪼가리, 그러니까 가아그셰블라의 가지 공략법은 두 가지다.
보스가 나오기 전에 키메라 사체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혹은 키메라 구울들을 무시하고 보스 몬스터에게 화력을 때려 붓는 것.
그런데 말이야.
포식으로 구울을 제작할 ‘시체’ 자체를 갈아 버리면 어떻게 될까?
“정수 달달하네.”
구울의 정수도 얻었으니 일석이조야, 아주.
『놈. 무슨 술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끝이다.』
천 쪼가리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강렬한 마나의 파동.
마안은 그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다크 선더]
핑 레이 때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은 벼락.
번개가 정수리에 닿기까지는 순식간이어도.
마법 발현 타이밍만 읽어 내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실체화시킨 극야를 비스듬히 전개, 암흑 번개를 흘려보냈다.
번개에 실린 힘을 모두 비껴 내지는 못했지만.
남은 에너지는 전신에 둘러놓은 가시 갑피의 방어력만으로도 충분했다.
『내 마법 공격을 그렇게 간단히 막아 내다니!』
새빨간 안광이 로브 사이에서 번뜩였다.
놈의 시선은 나한테 고정된 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준비한 건 다 끝났나?”
『이, 고얀 놈!!』
펄럭거리는 검은 로브.
암흑 마나가 대량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그로는 제대로 끈 것 같군.
“이제 절반은 성공했네.”
난 웃음을 삼킨 채, 천 쪼가리의 공세를 받아쳤다.
* * *
‘가아그셰블라의 가지’는 정공법으로 상대하기 힘든 보스다.
흑마법사들을 제물로 바치면서 얻은 암흑 마나.
언데드로 되살릴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키메라 군대까지.
마법 기량도 높아서 아이언 등급 플레이어의 실력으로는 받아 내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2025년에는 정보조차 거의 없는 보스 몬스터.
하지만.
미래에서 아이언 학살자로 불리는 보스 몬스터는…….
『어째서냐!』
절망 섞인 비명을 토해 냈다.
“왜. 뭐가 잘 안 되니?”
『마력의 양은 내가 압도적일 텐데!』
빠르게 재배열되는 암흑 마나.
[블랙 불릿]
투다다다! 손가락 크기의 마탄이 총알처럼 쏟아졌다.
“얍!”
지영이의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지고.
육각형 결계가 천 쪼가리와 나 사이에 생성되었다.
그 위로 쏟아지는 마탄.
얼마 못 버티고 결계가 부서졌지만, 그 뒤로 제2·제3의 방벽이 펼쳐졌다.
“스승님을 건드는 건 제가 허락하지 않아요.”
『오냐. 그렇다면 너부터 없애 주마!』
먹구름 사이에서 번쩍이는 뇌전.
천 쪼가리 녀석의 주특기인 다크 선더의 전조다.
[아이스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쇄애애액!
탐욕의 가호로 위력을 끌어올린 얼음 창이 천 쪼가리한테로 날아든다.
곧장 마법을 취소하는 천쪼가리.
방어마법으로 창을 튕겨 냈다.
“그 수법은 뻔하잖아.”
천 쪼가리의 마법을 관찰하다 보니, 암흑 마나가 어떤 파장을 띠는지를 보고 준비하는 마법을 예측했다.
방출 계열은 지영이한테 전담.
다크 선더처럼 반응하기 어려운 마법은 아이스 스피어로 사전에 차단했다.
『건방진!』
“할 줄 아는 말이 그거밖에 없지?”
천 쪼가리 녀석의 마법은 번번이 막혔고.
키메라 구울들은 팀원들의 활약에 하나둘 쓰러져 갔다.
[구울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일반]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전투 본능이 추가됩니다.]
부상을 입었을 때 몸이 굳는 걸 완화해주는 패시브 스킬.
매번 [악귀의 분노]를 사용할 수도 없으니, 제법 유용한 정수다.
키메라 구울을 대부분 쓰러트리자, 팀원들과 본격적으로 보스 공략에 들어갔다.
“세 방향으로 공격한다.”
좌우로 흩어진 카를라와 핑 레이.
천 쪼가리의 로브가 펄럭인다.
『꺼져라, 우둔한 자여!』
[배니시의 대상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추방 주문의 효과로 사용자의 위치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무작위로 보내집니다.]
퍼어엉!
미처 저주에 대항할 틈도 없이 이동되었다.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군.
전력 질주와 운류보를 동시에 전개.
멀어진 거리를 다시 좁히고 있을 때, 좌우로 갈라진 두 팀원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공간 압축]
[천살(千殺)]
카를라의 낫이 천 쪼가리에 닿으려는 순간.
천 쪼가리가 붉은 안광을 빛내더니 마른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 응축된 암흑 마나.
아까 사용했던 마법, [블랙 불릿]이다.
『죽어라.』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마탄.
카를라는 공간 왜곡으로 마탄의 궤도를 수정.
심장을 노리던 공격이 어깨에 빗맞았다.
윽-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카를라는 낫을 휘둘렀다.
찢어지는 로브.
그 사이로, ‘가아그셰블라의 가지’의 앙상한 몸이 드러났다.
낫이 훑고 지나간 부위에서 솟구치는 검은 피.
『이노오오옴!』
놈은 한껏 끌어모은 암흑 마나를 그대로 방출했다.
막대한 암흑 마나의 파동에 밀려서 제단 밖으로 밀려나는 카를라.
부상까지 입어서 가아그셰블라의 가지가 방출한 마력을 버틸 수 없었나보다.
“나는 안중에도 없냐!”
어둠을 가르는 쌍검.
한발 늦게 도달한 핑 레이가 검 두 자루를 휘둘렀다.
『고작해야 육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공 따위로 날 해하려 하다니!』
검게 물드는 손가락.
가아그셰블라의 가지가 손을 펼치자, 커다래진 손이 핑 레이의 쌍검을 쳐냈다.
왈칵- 입가에서 피를 흘리는 핑 레이.
“누가 밀려날 줄 알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다크 핸드]를 받아 냈다.
『아까 그 상처가…….』
“둘 다 잘 버텼다.”
나는 가아그셰블라의 가지의 등을 점했다.
『이렇게나 빨리?!』
본의 아니게 막타를 치게 되었군.
뭐, 내가 아니었으면 이 녀석을 쓰러트리지도 못했을 테니까.
[배니시]의 대상으로 나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진즉에 죽었을 놈이다.
[백수제왕무 - 1초식]
[응룡황권을 사용합니다.]
말아 쥔 주먹이 보스의 가슴팍을 꿰뚫는다.
퍼어엉!
몸통 한가운데에 생긴 구멍.
그럼에도.
가아그셰블라의 가지의 눈에 맺힌 붉은 안광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너를 저주한다.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
“시끄럽고.”
이어서 [날카로운 손톱]을 사용, 강화된 손톱으로 산군파랑조를 펼쳤다.
촤아아악!
몸통에 이어 머리까지.
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가아그셰블라의 가지’는 클리포트의 가호를 받은 존재.
생물이기는 해도 반쯤은 죽음에 걸쳐 있다.
몸통과 머리를 동시에 없애야 완전히 소멸하는 괴물이니.
놈이 쓰러지자, 지면 위로 우뚝 솟아오른 제단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히든 미션 - 클리포트의 제단을 모두 분쇄하라, 를 통과했습니다.
현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100% 클리어.
우리는 그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