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줄지어 오는 인질들.
앞서 오던 핑 레이가 나를 보더니, 표정을 팍 구겼다.
“또 지다니.”
이야, 이번에 나를 이겨 먹어 볼 생각이었나?
아주 의욕이 충만하구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지영이가 알려 주었느니라.”
별걸 다 배우는군.
“스승님, 제가 닉스한테 그런 말을 알려 주지는…….”
“알아. 그냥 옆에서 들었겠지.”
이 정도면 양호한 거다.
지금의 닉스는 백지 같은 상태.
현대 문물에 익숙하지 않기에, 어떤 색으로든 물들 수 있다.
팀원 중 입이 걸걸한 사람이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카를라와 핑 레이가 인질들을 베이스캠프까지 인도하자, 반투명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인질을 구출했습니다.]
[21/150]
[클리포트에서 추격자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합니다.]
[클리포트가 베이스캠프를 노릴 확률이 늘어납니다.]
19층의 난이도를 한층 더 올리는 주범.
비정기적으로 들이닥치는 흑마법사의 습격이다.
“이래서 지영이를 배치한 것이로구나.”
“흑마법사들이 정해진 시간에 쳐들어오면 괜찮은데 말이야.”
무작위로 베이스캠프를 공격해 오는 흑마법사들.
한 가지 확실한 건.
“베이스캠프를 지키는 인원이 적을 때 공격한다는 거야.”
“참으로 비열한 작자들이로구나.“
“미션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더럽게 짜증 나지.”
각 팀원들의 전투력이 아이언 등급을 뛰어넘어서 그렇지.
본래는 키메라를 상대하는 것도 매우 까다롭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지 않으면 자가 회복력으로 금세 회복.
다시 전장에 투입되는 괴물이다.
“참. 지영아, 이거 받아.”
욕망의 주머니에 보관하고 있던 수호의 돌을 꺼냈다.
“안전지대요?”
“적의 공격을 감당 못 할 거 같으면 써.”
내 목표는 전원 구출.
흑마법사들의 공세가 심해지면 기껏 구출해 놓은 사람들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
지영이는 굳은 표정으로 수호의 돌을 받고는.
“일단 버텨 볼게요.”
라며 다시 한번 전의를 다졌다.
“네 판단을 믿는다.”
“맡겨 주세요.”
든든하군.
미래의 통곡의 벽이 저렇게까지 말하니까 신뢰가 갔다.
* * *
제단은 모두 12군데.
두 곳을 털자, 곧바로 다른 장소가 활성화되었다.
[5번 제단 - 03:42:25]
[7번 제단 - 04:59:10]
이번에도 두 군데군.
다만,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시간이 길어진 만큼 베이스캠프에서 멀어졌다.
“그래도 전과 같은 수준이라면 어렵지 않겠구나.”
“인질들을 구출할수록 제단의 방비가 올라가.”
난이도 조정의 일종이겠지.
더 많은 인질을 구할수록, 미션 난이도가 수직으로 상승한다.
“이왕이면 완벽을 기해야지.”
나는 전속상인 모르스를 소환했다.
“부르셨습니까. 호……오객님.”
“다시 호객이라고 하면 죽는 수가 있다.”
“히끅! 명심하겠습니다요.”
“그것보다 신호탄 하나 줘.”
“구출 인원 숫자가 1명 빠지는데 괜찮습니까?”
“당연히 cp로 구매하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센스 없는 녀석.
전원 구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뭣이 어째?!
모르스는 내 따가운 눈총을 받고는 커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19층은 보통 그렇게 통과하니까 그렇습죠.”
“미션 점수 깎으면서 구매하는 일은 어지간하면 없을 거다.”
“신호탄이면 개당 300cp군요.”
“더럽게 비싸네.”
바벨탑에서만 쓸 수 있는 화폐.
현시점에서는 1cp당 10달러, 원화로 1만 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수직상승한다.
그렇다고 지구 제 신호탄을 챙겨봐야 탑에서 쓸 수가 없으니.
“신호탄 세 개에 900cp를 태우다니.”
“감사합니다. 호…… 고객님.”
“너, 1차 경고다.”
“히끅.”
모르스는 신호탄을 팔고는 재빠르게 물러나려…….
“어딜 가려고?”
“볼일은 다 끝나신 거 아닙니까, 헤헤.”
“팀원들도 있잖아. 거기 있어.”
“아이고, 불쌍한 노움을 너무 부려 먹으시는 거 아닙니까?”
“내가 뭘 부려 먹는다고 그래. 거기 있으라고 했지.”
“일 시키려고 그러시는 거 맞잖아요?”
“그거야 맞는 말이지.”
900cp 날린 것도 아까운데.
이왕 불러냈으니 최대한 써먹어 주겠다.
* * *
인질 구출 및 제단 공략 작전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방어가 더욱 견고해지는 제단.
나 혼자서도 돌파할 순 있지만, 카를라와 핑 레이한테는 공략이 버거웠다.
본래는 다섯 명이 공략에 나서도 힘든 난이도.
시간이야 충분했으니, 팀을 하나로 합쳐서 제단을 공략했다.
“제길.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핑 레이가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아서라. 객기 부리다가 죽으면 내가 귀찮아진다.
“핑 레이, 한 발자국만 앞으로 더 디뎌 봐.”
“카를라. 너무 과감하게 낫을 휘두르려고 하지 마.”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는 건 좋지만, 그러면서도 시야를 넓게 봐라.”
“핑 레이, 뒤로 물러나.”
나는 최전선에서 싸우는 와중에도 두 사람에게 오더를 내렸다.
“그대는 전장을 보는 눈이 참으로 넓구나.”
닉스가 감탄사를 날렸다.
이 정도로 놀라기는.
회귀 전에는 이보다 더한 난전을 수도 없이 겪어 봤다.
만 단위로 부딪치는 대회전도 지겹도록 치렀다.
둘의 신체 능력.
강·약점을 모두 알고 있으니 제대로 써먹어야지.
팀 플레이로 제단을 공략하다 보니, 내가 지시하지 않아도 손발이 조금씩 맞아 들어갔다.
“여자! 그쪽!”
핑 레이가 소리를 지르자.
서걱!
카를라가 뒤도 안 돌아보고 휘두른 낫에 키메라의 몸이 잘려 나갔다.
순간 화력이 뛰어난 카를라.
반면에 여러 방면에서 대응이 가능하고, 지구력이 더 높은 핑 레이.
둘은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호흡을 맞춰 갔다.
“그대가 여태 설계한 그림이 이것이더냐?”
“뭐, 조금은.”
난 입술 한쪽을 위로 올리고는.
“그이이이!”
달려들던 키메라의 목을 낚아채서 ‘괴력’으로 꺾어 버렸다.
심장, 혹은 목을 부러트리면 그 잘난 재생 능력도 쓰지 못하고 죽는다.
오른손에 들린 키메라의 정수를 그대로 포식.
[키메라의 정수를 흡수했습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일반]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변이가 추가됩니다.]
[변이]
등급: ★
분류: 액티브
육체를 자극해서 변이를 일으킨다.
어떤 식으로 변이가 일어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소량의 마나를 소모한다.
회귀 전과 동일한 스킬.
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변이 자체만 놓고 보면 완벽한 도박성 스킬이다.
운 좋으면 트롤에 버금가는 속도로 상처를 회복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벌어진 상흔에서 팔이나 다리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
다만, 여기에 ‘그 정수’를 더하면…….
“또 무엇을 생각하느냐?”
“아무것도 아닌데.”
“그 요상한 미소를 거두고나 말하지 그러느냐.”
다른 사람은 내 표정을 보고도 생각을 못 읽던데.
닉스와 오래 붙어 다녀서 그런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흑마법사의 정수에서는 [아이스 스피어] 스킬을 추출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흑마법사들은 빙계에 암흑 마나를 섞었었지?
회귀 전에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아이스 스피어를 사용합니다.]
[탐욕의 권능을 사용합니다.]
먼저 구현한 얼음 창 위로 탐욕의 권능을 덧씌운다.
검붉은 마력이 투명한 얼음 표면 위를 핏줄처럼 뒤덮더니.
우웅!
아이스 스피어를 제 색으로 물들였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당신의 행위를 보며 기뻐합니다.』
이런 거였군.
“알면서 안 알려 준 거였나.”
성좌라는 작자들은 역시 얕볼 수 없다.
호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시험하니.
만일 가호의 사용처를 더 늦게 깨달았다면, 바알의 관심도 사그라졌겠지.
『오염된 왕좌의 주인은 당신에게 실망할 일이 없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이 글라디우스를 겨눕니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이 유진호 플레이어에게 수호성을 제안합니다.』
애미야, 국이 짜다.
바알이나 하늘의 악은 영성까지 소모하면서 이것저것 퍼 주는데.
정작 이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 성좌 아레스는 보상 하나 주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수호성 제안을 받아들이겠냐고.
“애당초에 다른 성좌를 수호성으로 받아들일 뜻이 있더냐?”
“그건 생각해 봐야지.”
사실은 어떤 성좌도 후견인으로 둘 생각이 없지만.
바벨탑에서 그걸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후원이 뚝뚝 끊어질지도 모르잖아.
아니다.
바알같이 정신 나간 성좌는 그것도 재밌겠다면서 계속 지켜보겠군.
[인질을 구출했습니다.]
[53/150]
[78/150]
[101/150]
꾸준히 늘어나는 인질들.
허전했던 베이스캠프는 금세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그 덕에 바빠진 건 지영이었다.
휘잉- 펑!
새빨간 연기가 피어오른다.
모르스한테 구매한 신호탄이다.
“여긴 맡긴다.”
나머지 일행에게는 제단 공략을 지시하고 곧장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다.
운류보와 전력 질주를 동시에 운용하면 금방이지.
[진동 결계]
지영이는 베이스캠프 주변에 설치된 통나무 위로 결계를 쳐서 클리포트의 공세를 막아 냈다.
“너희는 하나도 못 지나가!”
독기 어린 목소리.
회귀 전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모습과 조금 닮은 것 같군.
지영이가 버티고 있는 동안 진형 뒤쪽에 있는 흑마법사들을 급습했다.
“감히. 어디서 나온 거냐!”
“이자도 제물로 삼자.”
“악신이여, 당신을 받듭나이다!”
흑마법사들은 온갖 저주를 펼쳤다.
내 발을 묶겠다는 것 같은데.
차라리 냉기 마법을 사용하지 그랬어?
[냉혈이 발동됩니다.]
수준 낮은 정신 공격은 모두 냉혈에 가로막혔다.
이 녀석들한테는 백수제왕무를 펼칠 필요도 없지.
혈조공과 극야의 힘으로 흑마법사들의 육신을 손쉽게 찢어발겼다.
“스승님!”
“너는 방어에 치중해.”
“알겠습니다!”
광범위하게 펼친 결계.
범위가 넓어지면 그만큼 마력과 정신력 소모가 심해질 텐데, 용케도 버텨 냈다.
앞에서는 지영이의 진동 결계가 흐트러짐 없이 제자리를 유지했고.
난 습격대의 후미를 공격하면서 압박했다.
아슬아슬한 적도 있었지만.
단 한 사람의 피해도 없이 11번째 제단까지 공략.
이제는 마지막 제단만을 앞두었다.
[인질을 구출했습니다.]
[135/150]
[클리포트에서 이변을 감지했습니다.]
[더 이상 베이스캠프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페이욘 숲 인근의 병력을 제단에 집중시킵니다.]
[19층의 숨겨진 요소가 충족되었으므로 미션 내용이 변경됩니다.]
[히든 미션 - 클리포트의 제단을 모두 분쇄하라.]
페이욘 숲에 집결한 흑마법사들은 계획이 틀렸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악마를 숭배하는 광신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악마를 강림시키고자 합니다.
제단을 무너트려서 악마 소환을 막으십시오.
악마가 소환되면 실패로 간주합니다.
▶목표: 마지막 제단 공략.
▶제한 시간 - 01:59:59
“히든 미션이라고?!”
핑 레이가 고함을 질렀다.
“어때. 이래도 19층 공략을 기다린 걸 후회하나?”
“설마요. 이런 기회가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팀장님.”
한껏 누그러진 기세로 대꾸하는 핑 레이.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준 효과가 있는 건지 모르겠군.
“이젠 방어를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러면 저도 공략에 참여할 수 있는 건가요?”
“어. 애썼다.”
“아싸.”
지영이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베이스캠프 방어를 전담하느라 스트레스가 제법 쌓인 듯했다.
“남은 시간은 2시간. 이제까지 했던 대로 간다.”
“했던 대로라면…….”
말끝을 흐리는 카를라.
“뭐긴, 정면이지.”
나는 일절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