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울창한 숲.
푸른 나무들 가운데에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참으로 불쾌하구나.”
“여신님이 숲을 싫어했던가?”
“흐응, 그대는 느끼지 못하나 보구나.”
닉스는 극야 일부를 방출, 허공에 분포된 공기를 가두었다.
뭘 하는 거지?
스스스슷!
극야에 휩싸인 공기가 두 층으로 분리되었다.
맑은 공기 사이로 추출되는 어두운 기운.
“암흑 마나군.”
“오호라, 바로 알아보는구나.”
“나도 비슷한 힘을 쓰잖아.”
[탐욕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바알한테서 받은 힘이 내 마나를 바탕으로 펼쳐졌다.
공기를 물들이는 검붉은 기류.
“이 불쾌한 냄새는 악마와 관련된 것이더냐?”
“그렇지. 상대가 악마 추종자들이잖아.”
암흑 마나란, 세상을 이루는 마나의 대칭점을 이루는 힘이다.
부정적인 에너지.
생물의 죽음이나 파괴된 자연, 혹은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파생되는 강력한 마나다.
악마들의 주식이자 힘의 원천이기도 하고.
“여가 잠들기 전에는 이런 불결한 기운이 없었거늘.”
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대기 중에 섞여 있는 암흑 마나를 감지하다니, 격 대부분을 잃었어도 여신은 여신이고만.
“이제 슬슬 준비하자.”
난 짧게 말하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전신을 뒤덮는 회색 갑피.
그 위로, 삐죽거리는 가시가 돌출되었다.
닉스도 극야를 전신에 두르면서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막을 여는 것은 맡기겠노라.”
“황공하옵니다.”
과장되게 허리를 젖힌 후, 오른손을 펼쳤다.
빠르게 재배열되는 마나.
“어스 스파이크.”
날카로운 돌기둥들이 지면을 파헤치면서 나아갔다.
빼곡히 들어선 숲을 향해 나아가던 마법은.
콰앙- 투명한 막에 가로막히면서 전진을 멈추었다.
거울에 균열이 가듯, 수십 갈래로 깨어지는 풍경 사이로 우중충한 벽으로 된 제단이 나타났다.
“이 불쾌한 냄새는 못 맡았는데, 용케 알아챘구나.”
“내가 여신님만큼 감은 안 좋아도, 눈이 제법 괜찮아서.”
지도에서 표기된 위치는 대략적이다.
숲을 조사하면서 마법으로 숨겨진 제단들을 찾는 게 정석적인 공략법이지만.
나한테는 마력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읽어 내는 천안(千眼)이 있었다.
“환영 마법이라. 참으로 같잖은 수작이로다.”
닉스는 한숨을 쉬었다.
암흑 마나를 접하면서 생긴 불쾌감이 생각보다 큰 모양이다.
드러난 제단 위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제단을 파괴하려고 해?”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어둠의 진리를 보여 줘라.”
“키키키. 죽어라!”
바벨탑에 암약 중인 비밀 집단, ‘클리포트’에 소속된 흑마법사들이다.
[블랙 아이시클 애로우]
[메기도]
[아이스 버스터]
닉스는 손을 위로 올렸다.
허공으로 솟구치는 진한 어둠.
넓게 펼쳐진 극야 위로, 흑마법사들이 전개한 마법이 쏟아진다.
“불결한 자들치고는 제법이로구나.”
“굳이 다 받아 낼 필요까지야.”
“저치들의 수준을 알아보려고 했느니라.”
소모된 극야는 17.
단순하게 힘 대 힘으로 받아 냈더니, 닉스의 전신을 감싼 극야가 조금 얇아졌다.
전처럼 나신이 드러날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만…….
[맹렬한 돌진을 사용합니다.]
흑마법사들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무언가가 불쑥 나타났다.
“그이이이!”
괴이한 소리를 내지르는 괴물.
흑마법으로 빚어낸 생물체, 키메라다.
말아 쥔 주먹으로 키메라의 가슴팍을 가격하자, 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리고는.
“꾸으으으.”
한 줄기 신음과 함께 수 미터 뒤로 튕겨 나갔다.
일격에 곤죽이 되어 버린 키메라.
경직 상태를 유도할 필요도 없었다.
“그이이이이!”
개구리와 리자드맨을 반죽해 놓은 것 같은 외형.
키메라 수십 마리가 흑마법사들 앞으로 나서면서 길을 차단했다.
그뿐이랴.
내가 쳐 낸 키메라의 몸 위로 푸른 기포가 부글거렸다.
“악마의 피를 희석시켜서 만든 키메라다. 저따위 상처쯤은 금방 복구…….”
퍼어엉!
미끌미끌한 피부 위로 솟구치던 기포가 그대로 폭발.
키메라는 그대로 다진 고기가 되어 버렸다.
“이럴 수가!”
“키메라가 일격에 파괴될 정도의 충격이라고?”
“저 인간, 얕볼 수 없다.”
늦게도 알아챈다.
흑마법사들이 당황하고 있는 동안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팔뚝을 타고 회전하는 내공.
정면으로 곧게 뻗자, 3미터 거리까지 솟구쳤다.
백수제왕무 1초식, 응룡황권이다.
투쾅! 키메라 셋의 몸뚱이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권기상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무공의 특성 덕에 기를 발출하는 것과 비슷한 흉내를 낼 수 있었다.
내공 소모가 극심한 데 비해 제 위력이 나진 않지만.
난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백수제왕무 - 2초식]
[산군파랑조를 사용합니다.]
사선으로 그어지는 손톱.
키메라 셋이 그 궤적에 휘말려서 산산조각 났다.
클리포트의 키메라들은 맷집이 약하지만, 재생력 하나는 기가 막혔다.
그러니.
일격으로 하나씩 죽이는 게 최선이다.
흑마법사들이 당황해하는 사이.
키메라 무리 중 절반 가까이가 파괴되었다.
“마, 막아라.”
“키메라야 다시 만들면 그만!”
“저자만 막으면 된다!”
흑마법사들은 온갖 정신계열 저주를 사용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온갖 환각이 시야에 아른거린다.
헛구역질까지 나려고 하지만.
[사용자의 감정이 크게 요동칩니다.]
[냉혈 스킬이 발동됩니다. 냉정한 마음이 유지됩니다.]
정신을 어지럽히는 스킬은 냉혈 하나로 저항이 가능했다.
“목불인견이로구나.”
한발 늦게 전장으로 진입한 닉스.
우아하게 손짓하자, 실체화된 극야가 흑마법사들의 목을 베어 냈다.
철퍼덕.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흑마법사들.
나한테 시선이 끌린 걸 잘도 이용했어.
“계약자여, 이 불결한 것들을 빨리 정리하자꾸나.”
“나도 같은 마음이다.”
우리를 사이로 두고 반으로 나뉘어 버린 진형.
살아남은 흑마법사 소수는 키메라를 통제하는 것조차 잊고, 방어 마법에 매달렸다.
뭐, 그래 봐야 제 수명을 5초 정도 연장시키는 정도이지만.
“끄르륵…….”
클리포트 일당을 전멸시킨 후.
제단 위로 올라갔다.
계단식으로 층층이 쌓인 돌탑.
제단 맨 위층은 의외로 널찍했는데, 제물로 납치된 사람들이 손발에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호, 혹시 구하러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극야를 일으켰다.
칼날로 변한 극야가 밧줄을 잘라 냈다.
“그새 또 솜씨가 늘었구나.”
“여신님 따라잡으려면 멀었지.”
“여가 목표라면 좀 더 정진하여라.”
제길. 부정을 못 하겠군.
인질 숫자는 12명.
“여신님이 뒤를 봐 줘.”
“알겠느니라.”
우리는 앞뒤에 선 대형으로 인질들을 호위하면서 베이스캠프로 귀환했다.
* * *
진호가 클리포트의 제단을 공략할 무렵.
카를라와 핑 레이도 비슷한 시각에 흑마법의 흔적을 발견했다.
“보아라. 이게 바로 나의 능력이다!”
핑 레이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위화감 감지]
어느 직업군이나 익힐 수 있는 탐지 스킬이다.
일반적인 탐지 스킬은 [탐험가]나 [모험가] 같은 직업군이 습득 가능하기에, 공용 스킬은 꽤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골드 문의 신예쯤이야.’
핑 레이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그가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건 유진호뿐.
거듭되는 진호와의 대련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가며 강해졌다.
처음 카를라의 솜씨를 봤을 땐 긴장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번에 미션을 주도하는 건 나다!’
카를라는 물론이거니와.
진호도 꺾고 구룡방에서 자신의 가치를 다시 증명하리라!
핑 레이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카를라를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하는 카를라.
이내.
[공간 압축]
[더블 대시]
묵묵히 지면을 찼다.
발을 떼는 순간, 압축시킨 공간에서 반탄력이 나오면서 그녀의 몸을 밀었다.
순풍을 맞은 배처럼 나아가는 카를라.
“적 위치, 알려 줘서 고마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낫을 휘둘렀다.
서걱!
공간에 간섭하는 낫.
클리포트의 결계는 한순간도 못 버티고 반으로 갈라졌다.
뒤에 있던 키메라 하나도 낫의 궤적에 걸려서 가슴팍이 반으로 잘려나갔으니.
“그이이이!”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면서도 카를라에게 달려들었다.
방금 전, 결계를 베느라 힘이 모자란 것이다.
징그러운 외형.
핑 레이는 키메라를 보더니 본능적인 혐오감에 흠칫거렸다.
반면 호흡 하나 안 흐트러진 카를라.
그녀는 덜렁거리는 몸으로 달려드는 키메라를 확실하게 잘라 냈다.
“웩. 더러워.”
“어차피 죽이면 고깃덩이.”
핑 레이는 질린다는 눈빛으로 카를라를 흘겨보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마음을 다잡으면서 발을 내디뎠다.
[비류보(飛流步)]
키메라의 외형이 흉측하다 한들.
물러날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펼치는 팀 플레이인데, 카를라한테 밀릴 수는 없었다.
핑 레이는 제단에 올라타는 순간, 곧바로 고유 능력을 사용했다.
분신.
셋으로 쪼개진 핑 레이가 키메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본체보다 능력치가 모자란 분신.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기에는 탁월한 수다.
“너희의 상대는 나다!”
핑 레이는 쌍검을 휘둘렀다.
쌍수호박(雙手互搏).
양팔로 다른 동작을 펼치는 보조 무공을 기반 삼아, 두 무공을 펼쳤다.
오른손에 들린 검은 극양(極陽)의 기운을 실어 냈으며.
왼손으로 펼치는 좌수검(左手劍)은 은밀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초열검&당랑검]
승급전에서 진호를 상대로 펼쳤을 때보다 한층 더 깊어진 무예.
키메라의 몸뚱이에 긴 자상이 여럿 새겨졌다.
“그럼 안 돼.”
“크크크, 질투하는 거냐?”
“걔, 재생해.”
부글부글, 핑 레이의 검이 만들어낸 상처 위로 거품이 솟구쳤다.
검격에 실린 힘은 전보다 더 강해졌지만.
상성에서 안 좋았다.
“그이이이!”
재생 중인 키메라가 달려들자, 핑 레이가 고함을 질렀다.
“갈!”
분노하며 검을 내지르자, 키메라의 머리가 허공 위로 솟구쳤다.
『핏빛 하늘의 주인이 당신을 눈여겨봅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은 시선을 거둡니다.』
『어둠의 현인이 당신을 응원합니다.』
핏빛 하늘의 주인.
강대한 존재감을 보이던 성좌, ‘오아시스의 주인’이 떠나갔지만.
그에 버금가는 성좌가 핑 레이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진호가 살아온 세계와는 달라진 흐름.
핑 레이도, 이 상황을 유도한 진호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이라는 이름의 수레바퀴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카를라도 손을 바삐 움직였다.
낫이 궤적을 그릴 때마다 마법이 지워지고, 키메라의 숨통이 끊어졌다.
‘역시. 배운 대로 하니까 호흡이 모자라지 않아.’
카를라의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
그녀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변화였다.
미국 랭킹 1위인 엘렌.
그녀한테서 가르침을 받을 때만 해도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움직임이, 진호를 만나면서 바뀌었다.
숨을 쉬는 방법.
상대와의 간격을 유지하는 방법.
그 외에도 대련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상무님께는 죄송하지만…… 팀장님한테 더 배우고 싶어.’
더 효율적으로.
더 강하게.
카를라는 진호와의 대련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빠르게 깨는 중이었다.
카를라는 진호의 가르침을 체화하기 위해.
핑 레이는 그런 카를라를 보며 뒤처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을 지닌 채, 제단을 지키는 이들을 도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