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호문쿨루스의 육신을 차지한 닉스.
그녀가 손짓하자, 밤하늘을 짜 놓은 것 같은 옷자락이 나신을 덮었다.
호수에서 봤을 때랑 똑같네.
“육체를 얻는다는 것이 이런 감각이었구나.”
닉스는 새로운 몸을 신기하다는 듯이 구석구석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건 여전하군.
전에는 이런 느낌이 안 들었는데 말이야.
호수에서 닉스를 봤을 땐 압도적인 신격에 ‘경이로움’을 느꼈다면.
지금 떠오르는 건 미(美)라는 표현을 사람으로 옮겨 놓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었다.
“아까부터 여에게서 눈을 떼질 못하는구나.”
“팔이나 다리 하나가 더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네.”
“그 육체가 변이라도 한다는 말이더냐?”
“아니, 혹시나 해서.”
“그대가 염려하는 일은 없는 것 같으니 안심하여라.”
요염하게 웃는 닉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나조차도 잠깐 동안 넋을 잃을 정도라.
외출할 때는 내가 꼭 동행해야겠다.
안 그러면 엄한 사람들 꼬이게 생겼어.
“잠깐, 그 옷 말이야.”
“이제야 알아챈 것이더냐.”
“극야……로 만든 건 아니지?”
“참으로 둔한 사내로다.”
그 말인즉슨.
“호문쿨루스의 육체로도 극야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군.”
“그러하다. 힘은 미약하나, 다룰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
예비용 호문쿨루스.
신의 권능까지 구현하다니.
정말이지.
“너무 대단하잖아.”
튜토리얼에 이런 보상이 있을 줄이야.
얻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가?
탐험가 로렌트조차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요소.
바벨탑의 대부분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홀로 뭘 그리 고민하느냐?”
“아, 아무것도.”
“여가 필멸의 육체를 빌려서 강림했거늘.”
닉스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홱 돌렸다.
“여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있나 보구나.”
영체로 있을 때는 마냥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호문쿨루스의 육체를 덧입은 뒤로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
“참, 혹시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어?”
“상태 창, 이라고 하던가.”
닉스는 내 말투를 따라 하더니, 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 되는구나.”
“나한테 공유 좀 해 줘.”
“알겠느니라.”
[닉스]
나이: 측정불가
레벨: 1
종족: 신(호문쿨루스)
등급: 아이언 / 직업: 밤의 여신
능력: 극야
*능력치
근력: 10
민첩: 12
체력: 9
맷집: 6
마력: 없음
극야: 100
내력: 50
*스킬
어둠 지배[★★★★★]
암영추혼검[★★★★]
*호문쿨루스의 한계로 대상의 힘을 모두 구현하지 못했습니다.
*본래 호문쿨루스가 지닌 신체 능력을 대부분 소모하여 대상의 영혼을 안착시켰습니다.
*대상의 등급은 사용자와 동일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종족이다.
혼재되어 있는 종족.
탑에서 준비한 예비용 육체로는 닉스의 격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겠지.
신체 능력이 일반인 수준인 것도 그 까닭이다.
다음으로 시선을 끄는 건…….
“여신님한테도 레벨이 생겼군.”
“여도 그대처럼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것이더냐?”
“시스템상으로는 말이야.”
“탑을 설계한 아이들이 이 사실을 알면 여의 권한을 빼앗을지도 모르거늘.”
“걱정하지 마. 고신족들이라고 해서 전능하진 않아.”
탑 시스템을 설계한 것은 고신족이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탑의 운영체계에 간섭하진 못한다.
여러 신화와 전설, 그리고 세계의 흔적들을 엮어 내어 만들어 낸 공간.
고신족들은 현 세대의 신들에게 밀려난 탓에 권능과 이름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렇기에.
여러 편법과 성좌들의 도움, 그리고 닉스처럼 잠든 옛 신들을 이용해서 탑을 만들지 않았던가.
고신족들은 바벨탑의 규칙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탑과 세계의 동기화가 100%에 도달하기 전까진.
“여신님이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건 호문쿨루스에 내장된 기능일 거야.”
사용자, 즉 나와 연동되는 탑 등급만 봐도 알 수 있다.
누군가의 영혼을 주입해서 동료를 삼으라는 말.
“하면 여가 그대의 동료가 되는 건가?”
“왜. 마음에 안 들면…….”
“그럴 리가 있느냐! 여가 육체를 가지고 그대를 도울 수 있다니!”
닉스는 오른손으로 내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평소대로 하는 행동일진대.
어, 어어어.
이건 좀 많이 곤란하다.
난 속으로 반야심경을 외운 후에 닉스를 살짝 밀쳤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조금만 자제해 줘.”
“오늘따라 참으로 이상하구나.”
“갑자기 뭐가?”
“그대의 심박 수가 너무 빠른 것 같아서 말이니라.”
빌어먹을. 그게 다 너 때문이잖아요.
닉스가 어디로 튈지 예측이 안 돼서 더더욱 그랬다.
가만있으면 여신님의 페이스에 말리겠어.
“어딜 가느냐?”
“육체도 얻었겠다. 능력 좀 알아보려고.”
“호오, 다른 아이들처럼 여와 대련을 벌이겠다는 말이로구나.”
“쫄리면 뒈지시든지.”
“그대에게 여의 위대함을 알려 주겠노라.”
휴. 닉스가 대련에 흥미를 보여서 대화 방향을 돌리는 건 성공했다.
실제로도 그녀의 힘을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으니.
미처 말을 하지 못한 세 번째 놀라운 점은 닉스에게 ‘내력’ 스텟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뿐이랴. 하늘의 악한테서 받은 ‘암영추혼검’도 닉스에게 이어졌다.
나랑 계약을 한 사이라서 같이 넘어간 것 같은데.
여신님이 실전에서 내공을 쓸 수 있을지도 시험해 봐야겠다.
* * *
우리가 훈련장으로 내려오자, 그 안에 머무르던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여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느냐?”
이 여신님을 보는 거였다.
회귀하고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쪽이었는데.
다른 사람한테 그 역할을 빼앗겨 보니 미묘한 기분이다.
지영이가 훈련을 잠시 멈추고는 다가왔다.
“옆에 계신 분, 손님이신가요?”
“그러니까…….”
닉스의 정체를 설명하려던 찰나.
“아이야, 어이하여 여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잠깐. 이 말투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요?”
“늘 그래 왔듯 여를 소환수라고 불러 보아라.”
아주 신났어.
지영이한테 소환수라고 타박받은 걸 마음에 담아 놓았나 보다.
끔뻑끔뻑.
두 눈을 연신 감았다가 뜬 지영이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그, 그, 그그그!!!”
하고는 비명만 질러 댔다.
“말을 해, 말을.”
“스승님 따라다니던 소환수님?!”
닉스는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하다. 이게 바로 여이니라.”
“와, 갑자기 웬 연예인이 왔나 했는데. 대박!”
호들갑을 떠는 지영이.
다른 사람들도 말은 안 하지만 내심 닉스의 정체가 궁금한 듯 눈과 귀를 세웠다.
여기서 정보를 더 줄 필요는 없지.
정보는 힘.
멸망의 시대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고급 정보를 외부인에게 풀 필요는 없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현시점에서는 감추고 전략적으로 풀어야지.
“지영아, 닉스랑 대련할 거니까 조금 떨어져 주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핑 레이와 카를라, 그리고 김영수도 단련하는 것을 멈추었다.
이제는 대놓고 구경하려고 하는구먼.
“지켜보는 관객들이 많으니 흥이 절로 나는구나.”
닉스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새 육체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천천히 갈게.”
“배려는 여에게 필요 없느니라.”
“그러다가 망신당하는 수가 있는데?”
“두고 보면 알 터.”
자신만만하군.
어디, 그럼 필멸의 육체를 얻은 닉스가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알아볼까?
난 곧장 오른손을 내밀었다.
“역시 첫 시작은 원거리 공격이로구나.”
[어둠 지배]
여신님의 몸을 덮고 있던 드레스가 꿈틀거리더니, 갑주 형태로 바뀌었다.
동시에 지면을 차는 닉스.
파이어볼이 완성되었을 때는 거리가 절반이나 좁혀져 있었다.
닉스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 수준일 텐데?
말도 안 되는 돌격 속도군.
핑 레이나 카를라, 두 플레이어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반인을 아득히 넘어선 것은 확실했다.
“알아도 맞아야지.”
곧장 앞으로 달려오는 터라 파이어볼을 맞히기는 쉬웠다.
화르륵!
정면으로 쏘아진 화염구가 닉스와 부딪치는 순간.
닉스의 몸을 감싼 극야 일부가 입을 쩍 벌리더니 그대로 삼켜 버렸다.
콩- 아주 작은 폭발음이 들린다.
“마나가 못 퍼져 나가게 막아서 폭발력을 낮추다니.”
“역시 여의 계약자답게 바로 알아채는구나.”
닉스는 30미터 간격 안에 들어오자 본격적으로 극야를 펼쳤다.
촤라라락!
꼬챙이처럼 수십 번 꼬아놓은 암흑 창들이 쇄도한다.
나도 극야를 전개, 닉스의 흉내를 내 봤지만 모조리 튕겨 나갔다.
“동일한 파워인데 상대가 안 되네.”
“본래부터 여의 힘인 것을. 그대가 따라오려면 멀었느니라.”
“아, 그러셔.”
극야는 내가 가진 수많은 힘 중 하나.
난 아직 본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는 말씀!
“하아아아앗!”
울려 퍼지는 포효.
닉스가 미간을 찌푸릴 때, 바로 다음 수를 사용했다.
[약화의 문장을 사용합니다.]
[스컬 핸드를 사용합니다.]
[탐욕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디버프 스킬.
탐욕의 가호로 한층 강화된 뼈 손들이 닉스의 발목을 붙잡고.
방어구 역할까지 겸하는 극야 위에 문장이 새겨졌다.
“곤란하구나.”
닉스의 발이 묶인 순간.
바로 [맹렬한 돌진]을 사용, 직선코스로 돌진했다.
“이 스킬의 위력은 여신님도 잘 알잖아?”
“손을 놓고 당해 줄 순 없구나.”
닉스가 주먹을 쥔 채, 오른팔을 위로 쭉 펼쳤다.
스스스슷!
말아 쥔 손으로 뭉치는 극야.
극야로 만들어진 암흑검이 나타났다.
“이 검의 위력은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미친.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암영추혼검.
극야를 기반으로 사용하면 신공절학에 버금가는 무공이다.
현재 내 수준으로는 백수제왕무를 펼쳐도 저 검을 받아 낼 수 있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거기에, 더 큰 문제가 있다면.
난 지금 [맹렬한 돌진]을 사용 중이라는 거다.
백수제왕무도 아니고 돌진만으로는 닉스의 일검을 막을 수 없다.
[운류보를 사용합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돌진 궤도를 틀었다.
쇄애애액!
하늘에서 떨어지는 암흑검.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그리 빠른 것도 아닌데 엄청난 풍압이 일어났다.
한 치 차이로 스쳐 지나간 검.
가까스로 돌진 방향을 튼 후유증으로 5초나 경직되었지만.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기(氣)라는 에너지를 다루는 것도 꽤 신선한 경험이구나.”
참 태평하구먼.
누구는 목숨 걸고 방향을 틀었는데.
경직 상태이다 보니 입을 벌릴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수십으로 분산된 극야의 힘이 칼의 형태로 내 육신을 두들긴다.
태탱! 탱!
“생각보다 단단하구나.”
극야의 힘을 받아 내는 가시 갑피.
미리 사용하지 않았으면 꽤나 낭패를 봤겠어.
잠깐만.
근데 닉스의 갑주가 조금…… 짧아진 것 같다?
[경직이 해제됩니다.]
맹렬한 돌진의 페널티가 끝나자마자, 나는 양팔을 위로 올렸다.
“잠깐. 타임!”
“여의 위대함을 체험하니 항복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더냐?”
“아, 그런 게 아니라 여신님 옷 말이야, 옷.”
“극야로 빚어낸 것인 줄 알지 않느냐.”
“바꿔 말하면 극야를 소모할수록 옷도 짧아진다는 거잖아.”
대련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풀 플레이트에 가까웠던 극야 갑주.
방금 전 암영추혼검을 펼친 후에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뿐이랴.
팔과 다리 끝은 맨살이 드러나 있었으니.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아오, 이 여신님이!
“대련은 중지야.”
“어허, 이유를 알려 줘야…….”
“그러니까 일단 중지!”
닉스의 대답을 막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대련이고 뭐고.
일단 옷가지부터 입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