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핑 레이와 카를라를 팀으로 받고 난 후, 일상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훈련 시간이 전보다 대폭 늘어났다.
“헉, 허억.”
“이제 끝이냐?”
“더 할 수 있습……니다.”
온몸에 멍을 주렁주렁 달아 놓은 사내.
핑 레이가 독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훈련하자고 하면 처음에는 발을 빼더니, 중간부터는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변해서 나를 집요하게 붙들었다.
-꼭 한 방 먹여 주고 싶다는 것 같구나.
“동감이야.”
미안하지만 네 실력으로는 10년을 노력해도 힘들 거다.
그래도 두들겨 맞다 보니 핑 레이의 무공 실력도 빠르게 상승했다.
-한데 저자는 악 성향의 성좌와 계약하였다고 하지 않았느냐?
“꼭 그렇지도 않나 봐.”
오아시스의 주인.
본래 핑 레이와 계약했던 성좌인 세트는 승급전 이후로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어떻게 아냐고?
탑을 들어갈 때마다 나한테 추파를 던지거든.
“사람을 고쳐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어.”
핑 레이를 받아들인 건 일종의 실험이다.
회귀 전에는 중국을 넘어 전 세계의 암흑가를 좌지우지했던 거악.
옆에서 두고 굴리면 갱생도 가능하지 않을까?
만약 안 될 것 같으면.
-어이하여 살기를 드러내는 것이더냐?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
후, 짧은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만약 핑 레이가 개심의 여지를 보이지 않으면 내 손으로 없애 버릴 생각이다.
방법이야 여럿이 있으니까.
멸망의 시대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무슨 수든 썼었다.
‘친구는 가까이, 나의 적은 더 가까이.’라고 하잖아.
핑 레이가 내 시야 안에 있어야 여차할 때 손을 쓰지.
한편 카를라는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업무 외의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지만.
나와 겨룰 때에는 늘 최선을 다했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느니라.
“뭔데?”
-여가 보기에는 그 아이가 힘에 집착하는 듯하구나.
“난 잘 모르겠던데.”
-어디까지나 감이니 신용 여부는 그대가 판단하여라.
“여신님이 그렇게 말하면 맞겠지.”
강함을 추구, 아니 집착한다?
카를라에 대한 정보는 많지가 않다.
멸망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해당 성좌의 부름을 받아서 인류를 버렸다는 것뿐.
엘렌 녀석도 말을 아꼈으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물어볼 걸 그랬네.
지영이도 대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서거걱!
낫이 진동 결계를 베면서 그 뒤에 선 지영이의 목덜미로 날아든다.
한 치 앞에서 멈춰선 날.
“으으, 졌어요.”
지영이는 분한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항복 선언을 듣자 낫을 거두는 카를라.
핑 레이와 카를라는 지영이보다 한 수, 아니 두 수 앞섰다.
플레이어로 각성한 기간부터 다르다 보니 당연한 현상이지만.
“제가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라오지 못해서 진 거예요!”
지영이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분기를 터트렸다.
의욕이 넘치는 건 좋지만 이건 좀 진정을 시켜 줘야 하나.
서포터로 분류해 놓은 김영수의 경우에는…….
“전 사양하겠습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지도 않고 연거푸 대련을 사양했다.
“영수 형님은 새 인형이 올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팀장님만 믿겠습니다.”
훈련을 하고 남은 시간에는 탑 12층을 재도전했다.
다음 층부터는 지영이와 같이 공략할 계획.
그런데, 아직 11층을 도전하기에는 결계 응용 능력이 모자랐다.
11층 최초 보상이 뭔지를 알았으니 욕심을 내 봐야지.
훈련과 탑 미션을 반복하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수련용 목각 인형을 작동시키고 파괴하기를 반복하던 중, 의문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수련용 목각 인형의 이해도가 100이 되었습니다.]
[목각 인형이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해도라는 항목이 있었지?
목각 인형을 부술 때마다 미세하게 늘어나던 수치.
시간이 될 때마다 정수 수급용으로 사용했는데, 어느새 최대치에 도달해 있었다.
목각 인형을 감싸는 빛.
잠시 후, 변화를 마친 목각 인형의 상태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예비용 호문쿨루스?!”
휘둥그레진 눈.
나는 쩍 벌어진 입으로 목각 인형 설명을 반복적으로 훑었다.
* * *
[예비용 호문쿨루스]
등급: 유니크
분류: 잡화
내구력: 100/100
기초 수련장에 비치된 목각 인형입니다.
이해도를 최대로 채우면서 본연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육체를 잃고 떠도는 영혼을 호문쿨루스에 부여하면 생전의 모습과 능력 일부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용자와 같이 성장하는 파트너로 옆에 두는 것도 가능하나, 이 경우 경험치 일부를 자동적으로 습득합니다.
예비용 호문쿨루스라.
회귀 전에도 들어 본 적 없는 아이템이다.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
“내가 모르는 게 있을 줄은.”
-후후훗,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이 여신님이.
누구는 엄청 심각한데 분위기 깨고 있네.
“아, 난 진짜 심각하다고.”
-그대가 만물을 빚어낸 창조주도 아닌데 무슨 수로 삼라만상을 알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하니 반박할 수가 없군.
-설령 회귀한 자라도 만물의 이치를 알지는 못할 것이거늘.
……예?
나는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네.
두근- 두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 여신님도 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네.”
-갑자기 동공이 커지고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구나.
그야 님이 갑자기 훅 들어오니까 그렇죠!
닉스는 돌연 가까이 날아오더니 내 이마에 손을 얹고는.
-열은 없는데. 혹 아픈 것은 아니더냐?
라며 걱정했다.
으으으. 진정하자. 닉스가 그냥 던진 말을 가지고 제 발에 찔릴 필요 없어.
마음속으로 크게 심호흡한 뒤, 다시 아이템 설명을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더 이상 정수를 못 얻는구나.”
[티라노사우루스 - 49.3%]
절반 가까이 찬 원시종의 정수.
아쉽구먼.
지금껏 정수 수급용으로 꾸준히 써먹었는데.
-묻고 싶은 게 있도다.
“……뭔데?”
닉스가 회귀를 언급한 것이 떠올라서 곧장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호문쿨루스라는 게 무엇이더냐?
“연금술로 만들어 낸 인공적인 생명체, 라고 해야겠지.”
현자의 돌.
그리고 호문쿨루스 제작.
연금술의 궁극에 달한 자만이 만들 수 있다고 알려진 비기다.
그중에서도 호문쿨루스는 탑의 미션을 진행하는 중에 여기저기서 나오기도 한다.
승급전에서 라인전을 담당한 하수인들도 호문쿨루스의 열화 버전이거든.
“문제는 이 녀석이 자아, 다른 말로 영혼이 없다는 거야.”
호문쿨루스는 연금술로 빚어낸 완벽한 생물이다.
그 ‘완벽’이라는 용어의 정의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인간으로 치면 영혼을 지닌 ‘인공’이면서도 엄연한 생물체야말로 온전한 호문쿨루스라고 칭한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이건 불완전한 것이로구나.
“으음, 근데 설명을 보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 같아.”
누군가의 영혼을 부여해야 완성되는 호문쿨루스.
언데드처럼 순리를 거스르거나, 아니면 치유 계열 성좌의 가호로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나쁘지는 않은데.”
-전혀 만족하지 못하는 얼굴이거늘.
“영혼이 있어야 쓸 수 있…….”
잠깐. 그러고 보니, 내 눈앞에도 영혼이 하나 있네.
“방금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그대여. 수상한 눈빛으로 여를 훑어보지 말거라.
“호문쿨루스에 영혼이 들어가면 생전의 모습으로 된다고 하잖아.”
-그랬었지.
“마침 여신님도 영혼만 있는 상태고.”
닉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여를 보고 저 불완전한 피조물과 동화하라는 말이더냐?!
“지금처럼 영체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낫잖아.”
-여는 밤 그 자체이니라. 고작 필멸자가 만든 불완전한 육체에 머무를 수 없느니라!!
닉스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호문쿨루스가 여신이라는 강대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한지도 불확실한 상황.
그런데 시도조차 안 하겠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지?
목각 인형 대신 호문쿨루스가 생겼잖아.
어떻게든 써먹고 싶은데.
“뭐, 여신님이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그대가 여의 계약자라곤 해도 이런 부탁은 곤란하도다.
“저 호문쿨루스에 들어가면 굳이 날 따라다니지 않아도 이 세상을 돌아볼 수 있을 텐데.”
-방금 뭐라고 하였느냐?
“그렇잖아. 지금이야 내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독립적인 개체가 되면 달라지겠지.”
-흐으음.
그 뒤로도 현대 문명의 발전과 유흥거리에 대해 혼잣말하듯 읊었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 내 이야기를 모두 경청하는 닉스.
“아, 아니다. 여신님이 싫다고 했으니까. 탑에서 다른 영혼을 구할게.”
-잠시 기다려 보아라.
“아니야. 내가 여신님께 큰 결례를 저질렀어. 당장 치워야지.”
-어허! 무엄하도다. 여가 고심하고 있지 않느냐!
닉스가 소리를 크게 질렀다.
“뭘 고심하는 거야.”
-그대가 아까 말한 사항 아니겠느냐.
“에이, 됐어. 고귀한 여신님을 저 누추한 호문쿨루스에 모시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재고해 보니 그대를 위해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니라.
당당한 척 말하고 있지만, 닉스의 얼굴에서는 조바심을 그대로 드러났다.
더 약 올리면 설득(?)한 보람도 없이 정말로 호문쿨루스를 포기할 것 같으니 여기까지 할까.
“여신님이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준다니, 어쩔 수 없군.”
-후훗, 모두 계약자를 생각하여 하는 행동이니 오해하지 말거라.
닉스는 곧바로 호문쿨루스의 몸에 스며들었다.
[예비용 호문쿨루스가 영혼을 감지합니다.]
[혼 - 밤의 여신 닉스]
[혼에 새겨진 격이 너무나도 강대합니다.]
[호문쿨루스의 육체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육체 능력이 감소합니다.]
[육체 능력이 감소…….]
능력치 감소 메시지가 쉴 새 없이 떠오른다.
“여신님, 괜찮아?”
-조금 답답한 것 빼고는 괜찮으니라.
다행히 닉스는 무사한 듯했다.
근데 이러다가 호문쿨루스가 닉스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불량품으로 전락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닉스가 호문쿨루스에 스며든 지 얼마쯤 지났을까.
[혼의 성질을 육체에 부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부터 영혼의 형태에 맞춰서 호문쿨루스의 모습이 변합니다.]
우드득, 우득!
살과 근육, 그리고 뼈가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텅 비어 있던 모공에서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이 등허리까지 쏟아지고.
개성을 찾아볼 수 없던 눈·코·입이 살아 있는 인간처럼 제자리를 잡아 간다.
조금씩 변화하는 호문쿨루스의 형상.
어째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아, 그때!”
네스를 쓰러트린 후.
호수 지하에서 마주했던 닉스의 본모습이 이러했다.
변화를 마친 호문쿨루스.
아니, 닉스가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그러시면 안 되죠.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계약자여, 무슨 일 있느냐?”
“아, 아니, 그게.”
“설마 호문쿨루스의 모습이 흉하기라도 한 것이더냐!”
“부탁이니까 옷 좀 입어.”
갑작스러운 자극(?)에 열이 확 올라왔다.
팀원들이 저런 모습을 볼까 두려운 마음이 솟구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