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대련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다.
“하악, 학.”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는 카를라.
푸른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었고, 낫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대단하군.”
나는 작게 읊조렸다.
공간에 간섭하는 능력.
엄청 희귀하고, 또 다루기 어려운 걸로 알고 있는데.
카를라는 이제 막 아이언 등급에 진입했는데도 공간 조작을 자유롭게 다루었다.
핑 레이와 동급 혹은 반 수 위.
능력은 비슷하지만 카를라를 높이 치는 건 강력한 ‘의지’ 때문이다.
-저 아이, 이미 한계를 넘어섰느니라.
“한계는 진즉에 왔어. 초월적인 정신력으로 몸을 움직이는 거지.”
-한데 마음에 안 드는 듯하구나.
“본인의 마음이 아니라서.”
카를라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명령’이다.
엘렌, 혹은 윌리엄의 지시.
손속을 겨루는 중인데도 미세한 살기 하나 내지 않는 게 말이나 되나?
“아무래도 여신님이 말한 결락이 원인이겠지.”
차라리 카를라가 인공지능이라고 하면 이해라도 하겠네.
받은 명령을 수행하려고 한계 이상으로 몸을 혹사시킨다…….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다.
-하면 팀원으로 안 받아들일 생각이더냐?
“받을 거다.”
마음의 결락.
그 원인을 알면 후일 엘렌과 척지게 되는 사건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도 하이 랭커까지 올랐다고 했으니, 미래를 바꾸면 강력한 전력을 하나 더 얻는 셈이다.
그리고.
곧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날 건데 쓸 만한 팀원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잖아?
“슬슬 끝을 내자.”
카를라는 숨을 고르기만 했다.
대꾸할 기력도 없나 보군.
공간 조작은 활용 범위가 넓은 능력이다.
왜곡, 전이, 삭제.
카를라가 사용한 건 왜곡과 전이뿐.
공간에 있는 것을 통째로 지워 버리는 건 엄청난 마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니까 다룰 수 없는 것 같고.
카를라는 주로 왜곡을 공·방 일체로 다루었다.
전이를 쓸 때는 위기 탈출용으로.
근데 마력을 대부분 소모해서 전이로 튀는 건 불가능하단 말이지.
그녀에게 남은 수는 하나.
왜곡과 스킬의 연동으로 한 방을 노리는 것.
원거리에서 마법 공격 위주로 퍼부으면 금방 항복을 받아 내겠지만.
“그럼 재미가 없잖아.”
난 카를라의 간격 안으로 들어갔다.
쇄애애액!
간격에 발을 딛자마자 쏟아지는 칼날.
몸은 이미 한계에 달했는데도, 놀라우리만큼 빠른 반응 속도다.
[백수제왕무 - 5초식]
[광서지를 사용합니다.]
내공을 응축시킨 손끝으로 카를라의 낫을 쳐 낸다.
오른팔이 반탄력에 파르르 떨리지만.
이쪽은 왼팔도 있으니까.
“아…….”
카를라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목 언저리에 파고든 손.
낫을 쳐 낸 직후, 왼팔로 혈조공 4초식을 펼쳤다.
짝짝짝!
“소문대로 대단하시네요.”
엘렌이 박수를 치자, 곧바로 사두조를 거두었다.
마찬가지로 낫을 옆으로 치우는 카를라.
“제 패배입니다.”
“이 정도면 합격입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다.
-호오.
감탄사를 터트리는 닉스.
이 여신님은 갑자기 왜 이래?
어찌 되었든 한 팀도 되었겠다,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카를라.
지켜보던 엘렌이 이마를 탁 치고는.
“악수하자는 거야.”
“아……”
그 말을 들은 카를라가 뒤늦게 내 손을 잡았다.
어디서부터 뭘 알려 줘야 할지 모르겠네.
* * *
팀 역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최소한의 인원 구성은 갖추었다.
“스승님, 그럼 이제부터 탑을 같이 공략하나요?”
“아니, 팀워크부터 맞춰야지.”
“팀워크라니…… 이제 정말 제대로 된 팀이 된 거네요!”
지영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의외로 적극적이란 말이야.
핑 레이나 카를라를 경계할 줄 알았는데.
“으음, 사실 그 중국인은 마음에 안 들지만요. 그래도 강하잖아요.”
“그거야 사실이지.”
“팀원으로 같이 지내면서 훈련을 하다 보면 제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이야,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승급전에서 핑 레이와 겨룬 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라오스 쪽 협곡에서 싸울 때 핑 레이한테 한 번 죽었다고 했던가.
의욕 넘치는 게 알고 보니 복수전을 기대하는 거였군.
“카를라라고 했던가? 걔도 이기고 싶어요.”
“그런 건 팀 플레이가 아니잖아.”
“선의의 경쟁이죠!”
저기요. 선의라는 단어는 여기에 쓰는 게 아니에요.
뭐, 지영이가 의욕적이면 그것대로 상관없겠군.
“엘렌 그리고…… 뭐라고 했었죠?”
“주이션입니다.”
핑 레이의 사부로 따라온 중년 사내가 답했다.
“유망주들 훈련시켜 준다고 여기에 데려왔는데. 아무 대가도 없는 건 아니겠죠?”
“호호, 안 그래도 마스터께서 제게 이걸 주셨답니다.”
엘렌은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잠깐만요.
그 카드, 혹시…….
“블랙 카드!!”
중국인 사범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는군.
“카를라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투자할 용의가 있습니다.”
원래는 나를 섭외할 때 쓰라고 저 카드를 준 거겠지.
무제한에 가까운 한도.
저 카드만 있으면 크루즈 여행선도 바로 결제가 가능할 것이다.
하여간 말은 잘해요.
“구룡방에서는 준비한 거 없습니까?”
“대형께선 진호 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무엇이든 구해 주신다고…….”
“호호, 말뿐인 투자네요.”
엘렌이 말을 자르자, 주이션은 새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미국인이 대형의 큰 뜻을 알 리 없지!”
날 영입하겠다고 먼저 승부수를 꺼낸 건 구룡방인데.
골드 문에서 준비한 카드가 훨씬 더 커서 무게 추가 확 기울었다.
뭐, 나야 어느 쪽에도 속할 생각이 없지만.
“그러면 우리 팀에 투자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제 권한 안에서라면 뭐든지.”
“구룡방에서도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두 사람은 내 다음 말을 주목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화석.”
“……예?”
“화석 말입니까?”
한수창과 비슷한 반응이군.
뭐, 저렇게 말하는 게 당연한 거다.
그냥 투자를 받을 수는 없으니 이쪽의 정보도 넌지시 흘려야지.
“제 능력을 강화하는 데 쓸 겁니다.”
“소협에게 도움이 된다면 구룡방에서 나서야지요!”
힘을 팍 주어 말하는 주이션.
엘렌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금세 웃는 낯으로 바꾸었다.
“골드 문에서 보유하고 있는 화석이 있어요. 마스터께 건의 드릴게요.”
“흥, 대국의 화석이 더 크고 아름다울 터. 기대하시오, 소협.”
서로가 하나라도 더 퍼 주겠다고 경쟁하는 모습.
이야, 너무나도 아름답구먼.
호구들이 알아서 판으로 걸어왔는데 최대한 뽑아 먹어야지.
“아, 그리고 장인 한 명도 알아봐 줄 수 있습니까?”
김영수가 다룰 인형.
영수 형님이 개인적으로 구매한 인형들도 있지만, 그 인형들은 솔직히 말하면 성능이 너무 안 좋았다.
인형사 관련 직업을 얻으면 조종하는 인형의 스펙 상승도 가능하지만.
김영수의 지휘 능력은 인형 전문 직군에 비해 조금 떨어졌다.
그의 진가는 대군(大軍)을 지휘하는 데 있으니까.
“아이언에서 브론즈 등급에 어울리는 정도로.”
“구룡방 길드에는 장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주문하지요.”
“저희 골드 문은 전 세계의 장인과 연이 닿아 있어요. 원하시는 조건대로 만들어 드릴게요.”
“이……!”
주이션의 이마 위로 힘줄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왔다.
이야, 저기서 욕을 참네.
두 길드의 대리인에게 투자(?)도 약속받았겠다.
나는 팀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팀으로 활동하기 전에 서로의 호흡을 맞출 거다.”
“흥. 난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광서지를 핑 레이의 면전에 펼쳤다.
대응조차 못 할 만큼 빠른 속도.
놈의 이마에 닿기 전에 멈추자, 한발 늦게 핑 레이가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뭐, 뭐냐, 빵…….”
“팀워크를 맞추기 전에 인성부터 교육해야겠네.”
“빵이 먹고 싶다는 거였다.”
“팀장한테 말할 때는 존댓말.”
“……거였습니다.”
핑 레이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물들었다.
“우리 팀은 솔직히 말해서 밸런스가 좋진 않아.”
-근거리 딜러
핑 레이 / 카를라
-보조 탱커 겸 원딜
이지영
-서포터
김영수
“탱커야 그렇다 쳐도. 근거리에 많이 치우쳐 있지.”
카를라가 빼꼼, 손을 들었다.
“저기 보면 팀장님의 포지션이 없습니다.”
“난 올라운더.”
엄밀히 말하면 근거리 딜러에 가까운 포지션이지만.
[데모닉 파워]를 사용하면 순간적인 파괴력은 아이언 등급에서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거다.
마법 관련 정수를 포식해야 새로운 스킬이 생길 건데.
언랭크에서는 더 화력이 강한 마법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아이언 등급에서는 좀 나아지겠지?
“영수 형님의 버프는 아직 빈약한 편이고. 아, 사과하지 마세요. 기죽이려고 하는 이야기 아니니.”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아무렴.
김영수의 지휘 능력은 빛을 발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다만, 이렇게라도 이야기를 해둬야 핑 레이나 카를라가 납득하니 밑밥 까는 거지.
“아, 이제부터 팀원이니까 말 편하게 한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카를라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두 사람, 탑은 몇 층까지 공략했지?”
“14층이……입니다.”
“16층이요.”
핑 레이는 승급전을 통과하자마자 바로 공략에 들어갔고.
그보다 먼저 아이언 등급에 진입한 카를라는 더 높은 층을 돌파한 상황이다.
“난 12층. 그리고 지영이는 아직 도전하지 않았다.”
“능력이 없어서 안 간 건 아니고……요?”
“너는 반말이나 존대 중 하나만 해라.”
“반말해도 괜찮나……요?”
“그럴 리가.”
핑 레이 녀석, 꼭 일부러 저러는 거 같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니, 놈이 파르르 떨었다.
조만간 교육, 아니지. 대련이라도 해야겠어.
“각자 층이 다르니. 당분간은 같이 탑을 공략하는 것보다 팀워크 훈련에 초점을 둘 거다.”
날 포함하면 근거리가 셋인데다, 유일한 서포터는 제 역할을 못 하는 상황.
팀이라고 보기에는 기형적인 포지션이다.
“둘은 18층까지만 올라가. 19층은 같이 공략할 거니까.”
19층은 팀 플레이를 연습하기 딱 좋거든.
최고 기록 경신도 해야 하는데.
나 혼자서는 조금 힘든 미션이기도 하니, 전력을 최대한 꾸려야지.
“지영아.”
“네, 스승님!”
“팀에서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역천’이라는 팀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두 포지션을 겸하는 지영이의 판단력이 매우 중요했다.
핑 레이나 카를라가 위험에 빠지면 커버해 줘야 하고.
한편 아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적을 타격하는 포지션도 겸한다.
“저, 엄청 노력할게요!”
지영이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의미에서. 핑 레이.”
“어?”
“어는 반말이고.”
난 미간을 찌푸린 채, 오른손을 까딱였다.
“팀워크를 맞추려면 우선 서로의 기량을 파악해야지.”
“그게 무슨 말씀인지.”
“대련하자고.”
“티, 팀장님은 이미 나랑 손속을 겨루어 보지 않았나, 요!”
“카를라는 네 전투 스타일을 모르잖아.”
옆에 있던 카를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내심 핑 레이의 실력이 궁금하기는 했나 보구나.
“팀장님, 저번처럼 허무하게 안 당합니다.”
핑 레이는 당황한 기색을 지우더니, 눈에 불을 켠 채로 나섰다.
“제발 부탁이니 힘 빠지게 쓰러지지 마라.”
“흥. 이번에는 다를 거요!”
그로부터 5분 뒤.
“항복. 항보오오오옥!!!!”
핑 레이의 비명이 훈련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