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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94화 (94/300)

94화

갑작스럽게 성사된 대결.

훈련장 한가운데에서 카를라와 단둘이 섰다.

지영이나 영수 형님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알아서 기선 제압 당하겠다는데 말릴 필요 없잖아요.”

“그야…… 팀장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따르겠습니다.”

“스승님, 저애 엄청 혼내 주세요.”

내가 보기에는 둘이 비슷한 연령대인 것 같은데.

반발을 가라앉히는 두 사람과 달리, 핑 레이는 흥미로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 자기가 처맞는 게 아니니까 즐겁겠지.

아무래도 승급전 때 덜 맞은 모양이니 팀원으로 받아 준 후에 두고두고 굴려야겠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대련.

닉스는 카를라를 빤히 바라보고는.

-저 아이는 특이하구나.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뭐가?”

-감정이 거의 읽히지가 않아.

“무표정이기는 하네.”

-여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하였구나.

닉스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 여신님이.

남의 면전에 대고 낙담하면 어떻게 하나?

-저 아이, 원인은 모르겠으나 감정의 결락을 겪고 있느니라.

“감정의 결락이라면…….”

-스스로의 의사보다는 타인의 명령을 따르는 존재. 굳이 말하면 인형 같은 삶.

먼 미래의 엘렌한테서도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다만.

닉스의 말을 듣고 보니 표정이나 말투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던 게 떠올랐다.

“그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은 눈앞의 상대에 집중해야 할 때.

카를라가 겪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는 나중 일이다.

“셋, 둘, 하나.”

심판을 맡은 엘렌이 숫자를 모두 세는 순간.

초승달처럼 휘어진 낫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잠깐.

첫 수를 펼치는 순간을 내가 놓쳤다고?

곧바로 마안을 활성화.

카를라의 근육과 마력의 파동을 읽어 보니…….

낫이 노리는 건 내 목덜미였다.

처음부터 급소를 노리네?

[가시 갑피를 사용합니다.]

[스톤 스킨을 사용합니다.]

두 스킬을 동시에 전개.

스톤 스킨은 전개 시 민첩이 떨어진다는 페널티가 있지만, 갑피와 겹치지 않아서 방어력을 늘릴 때 유용했다.

상체를 살짝 숙이면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자.

카가가각! 낫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격에 1/3이나 되는 내구도를 소모한 가시 갑피.

충격 모두를 흡수하지 못한 탓에 에너지 일부가 내부로 전달되었지만 스톤 스킨으로 막아 냈다.

“그 낫, 다시 한번 휘둘러 보시지?”

낫은 창과 비슷하면서도 쓰임새가 다른 무기다.

찌르기에 특화된 창.

반면 낫은 휘두르는 용도로 쓰인다.

공통점으로는 간격 안으로 파고들면 대처 방법이 부족하다는 약점이 있겠군.

엘렌이 키웠다는 유망주 씨.

무슨 수로 대응하는지 한번 볼까?

[백수제왕무 - 1초식]

[응룡황권(應龍皇拳)을 사용합니다.]

내공이 팔뚝을 뒤덮는다.

그 모습이 마치 용의 비늘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사용자의 기를 폭발적으로 회전시켜서 앞에 선 것을 분쇄시키는 주먹이다.

주먹 끝이 오른쪽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

카를라의 입술이 달싹였다.

“굴절.”

어그러지는 풍경.

응룡의 기세를 담아 내지른 주먹이 내 의지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파앙! 내공이 대기를 강타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윽.”

카를라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

응룡황권을 빗겨나가게 했지만, 소용돌이치는 내공에 휘말려서 어깨에 타격을 입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양팔을 잡아당겼다.

쭉 당겨지는 낫.

아까 낫의 궤도를 살짝 틀면서 카를라에게 접근했기에, 내 등 뒤로 날아드는 꼴이 되었다.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암영추혼검을 사용합니다.]

실체화시킨 극야의 힘으로 암영추혼검을 구현.

등 뒤를 노리는 시퍼런 날을 막아냈다.

“네 마음대로는 안 되지.”

다시 한번 거리를 좁히니, 가시 갑피에 달려 있는 가시들이 카를라의 몸에 생채기를 냈다.

지근거리라면 내가 훨씬 유리하지.

“……전이.”

번쩍! 환한 빛과 함께 카를라가 사라졌다.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위치는 50미터 떨어진 공간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야.”

-공간을 다루는 능력이라.

“바로 알아봤네.”

-여는 만물의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느니라.

난 닉스의 허풍을 한 귀로 흘렸다.

옛 동료의 제자.

카를라는 내 예상보다 대단했다.

멸망의 시대에는 이미 신들의 세계로 떠난 후라서 이야기만 들었지, 체감을 못했는데.

회귀하고 직접 부딪쳐 보니 꽤 성가신 상대인걸.

공간 조작.

내 고유 능력인 포식처럼 희귀하면서 다루기도 까다로운 힘이다.

“이쪽도 패를 아끼면서 싸울 건 아닌 것 같다.”

-여의 축복을 받는 건 어떠느냐?

“그거까지 쓰면 반칙이지.”

까다롭다고 했지.

진다고는 안 했다.

공간 조작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하고 겨뤄 본 적은 없지만.

고신족 중에 비슷한 격을 지닌 신족과 싸워 본 경험이 있다.

무엇보다도.

공간 조작이 어떤 공격이든 흘려보낼 수 있는 치트급 능력도 아니고.

공방을 주고받다 보면 능력 범위와 한계가 훤히 보일 거다.

“꽤 재미있겠어.”

나는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카를라의 투명한 눈을 노려보았다.

* * *

무표정한 카를라의 얼굴.

하지만 그녀는 내심 곤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남자, 강해.’

공간 조작.

카를라는 이 능력을 완벽에 가깝게 다루어 냈다.

힘의 방향을 왜곡시키거나 공간을 이격해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등.

이 능력의 쓰임새를 깨친 뒤로는 동일 티어 내에서 밀려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스승인 엘렌마저 인정한 능력!

‘진호 유는 내 공격 속도에 반응했어.’

둘 사이의 공간을 베어서 순식간에 가속.

기습적으로 낫을 휘둘렀지만 어깨를 스치는 데 그쳤다.

방어구도 착용하지 않은 상대.

그녀의 힘을 실은 낫이 상처 하나 내지 못한 것도 신기했는데.

낫을 휘두르는 동안 그 간격 안으로 파고들면서 반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간격을 주면 안 돼.’

카를라의 특기인 공간 조작도 완전무결하진 않다.

방금 전, 응룡황권을 완전히 흘려보내지 못한 것처럼.

허용 범위 이상의 힘은 공간을 일그러트려도 맞을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약점.

공간 조작의 축은 카를라 자신이기에, 스스로를 이동시키는 ‘전이’는 마력 소모가 심하다.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니면 자제해야 하는 기예.

카를라는 낫을 추켜세운 채 거리를 두었다.

그때, 기묘한 빛이 진호의 눈에 아른거렸다.

[약화의 문장]

바라보는 것을 트리거로 발동되는 저주.

약화의 문장은 진호의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의 손가락에 맺힌 화염.

파이어볼이 정면으로 날아든다.

거리가 충분해서 공간 전이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피할 수 있…….

[스컬 핸드]

지면에서 튀어나온 뼈다귀가 카를라의 발목을 낚아챘다.

‘이까짓 구속 쯤.’

발에 힘을 줘서 털어 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진호는 마법을 펼치면서 탐욕의 가호를 발동, 뼈를 강화시켜 두었다.

한순간이지만 카를라의 움직임이 봉쇄되었다.

폭발 유효 거리까지 다가온 파이어볼.

‘베어 낸다.’

[액셀러레이트]

낫의 칼날 주위가 일그러진다.

무수한 진동으로 닿는 것을 분해시키는 스킬.

초승달을 닮은 날이 파이어볼을 베는 순간, 왜곡으로 자신에게 향할 폭발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공간 왜곡을 사용해서 파이어볼 자체를 지우지 않는군.”

진호의 목소리가 카를라의 귀에 맴돈다.

‘나를 분석하고 있어?’

위험하다.

지금껏 길드 안에서 여러 상대와 스파링을 펼쳤지만, 이런 방식으로 고유 능력을 파헤치려고 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물리력이 있는 건 어떨까. 어스 스파이크!”

지면이 들썩이면서 날카로운 바위가 연달아 솟구쳤다.

카를라는 발에 힘을 모아 스컬 핸드를 걷어찼다.

콰직, 발이 자유로워지자 어스 스파이크가 방향 전환을 할 수 없는 곳까지 이동하고는 진호에게 달려들었다.

[맹렬한 돌진]

카를라의 동선에 맞춰서 달려드는 진호.

‘당했어.’

그가 왜 원거리에서 디버프와 마법을 사용했는지, 한발 늦게 알아챘다.

거리를 두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인식을 심어 주려는 의도!

카를라는 다시 한번 전이를 사용했다.

충돌 직전에 이동되는 몸.

이번에도 전이의 최대 거리인 50미터로 이동했다.

쿵! 카를라가 이동한 직후, 그대로 돌진한 진호는 훈련장 벽에 들이받았다.

파르르 떨리는 육신.

‘경직이라고?’

카를라는 아쉬움을 삼켰다.

[맹렬한 돌진]에 위험을 느끼고 간격을 벌렸는데, 그 때문에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 도망가는 스킬, 꽤 마력 소모가 심하네?”

흠칫.

카를라의 어깨가 들썩였다.

“어떻게 그걸.”

“내 눈이 조금 좋아서.”

[천안(千眼)]

근육과 마력의 움직임을 읽어 내는 눈동자.

마안이라는 카테고리에 턱걸이로 들어갈 만한 수준이지만, 사용자에 따라 본래의 이능 이상을 발휘하기도 한다.

‘아냐. 나도 저 사람에 대해 알아 가고 있어.’

카를라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무심(無心).

예상외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잠시 흐트러졌을 뿐.

그녀의 본질은 무(無)에 가까웠다.

채챙! 챙!

주먹과 낫이 부딪치는데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백수제왕무에 실린 힘은 카를라조차 정면으로 받아 내기 어려운 수준.

그녀는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진호의 힘 일부를 왜곡시켰다.

공간조작 능력까지 활용해야 겨우 동수를 이루는 정도.

아니. 공간에 간섭하는데도 진호한테서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하고 대련 내내 끌려다녔다.

‘무거워.’

낫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브론즈 등급 플레이어와 훈련을 했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숨 한 번 쉬는 것조차 뜻대로 할 수 없었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낫을 휘둘렀다.

엘렌한테서 훈련을 받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탈진해서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뭐야, 벌써 지친 거야?”

“아……직, 할 수 있습니다.”

카를라는 진호를 이기라는 길드 마스터의 명령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녀의 의지가 뚜렷했더라면.

이미 패색이 짙은 대련을 더 이어가지 않았으리라.

한편,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핑 레이는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유진호야 그렇다 쳐도. 저 여자애는 도대체 뭐야?!’

두 사람이 공방을 주고받는 것을 한 장면도 안 놓치고 봤지만.

카를라의 능력이 어떤 원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괴물 같은 유진호를 상대로 저렇게나 버틸 수 있다니.’

핑 레이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분했다.

[분신]이라는 최상급 고유 능력을 부여받은 후, 구룡방에서 여러 영약을 하사받았다.

뛰어난 사부 아래에서 훈련도 받았으며 여러 무공을 익혔다.

그런데도.

진호는커녕, 낫을 든 여인조차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늘 위의 하늘을 본 느낌.

좌절감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여기서 강해지는 비법을 배워 가야 한다!’

핑 레이는 두 눈을 부릅떴다.

두 사람의 대련을 보면서 생긴 감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했다.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운다고 했던가.

핑 레이의 마음이 그러했다.

그가 의욕을 불태우는 동안, 진호와 카를라의 대련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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