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미국 랭킹 1위, 엘렌 테일러.
그녀는 훈련을 취소하고 골드 문 본사로 향했다.
길드 마스터인 윌리엄의 호출.
이유는 짐작이 갔다.
‘그자, 유진호라고 했지.’
엘렌은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건 튜토리얼 기록이 갱신되었을 때다.
바벨탑이 나타난 이후, 엘렌이 세운 기록은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그걸 압도적인 스코어로 경신한 플레이어가 유진호였다.
진호의 행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첫 도전에서 연달아 탑의 최고 기록들을 경신했고.
이틀 전에는 승급전에서 중국의 신예, 핑 레이를 압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12층의 기록을 경신했어.’
언랭크에서 막 올라온 플레이어가 아이언 등급 플레이어들을 학살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으면 농담이라고 취급했을 텐데.
바벨탑의 알림은 틀린 적이 없었다.
골드 문 본사에 도착하자, 빠르게 걸음을 떼는 엘렌.
그녀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활짝 열린 문.
윌리엄 록펠러는 서류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길드의 보물이 왔군.”
“낯간지러운 말은 그만하시라니까요, 마스터.”
“그러는 엘렌이야말로. 윌리엄이라고 편하게 부르랬잖아.”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큭큭, 하고 웃음을 짓는 윌리엄.
이내 미소를 지우고는 엘렌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 생각이 틀렸어.”
“무슨 말씀이시죠? 마스터가 주목하신 대로…….”
“아니야. 유진호의 잠재 능력이 이 정도인 줄 알았으면 바로 투자했겠지.”
“말씀하셨던 1억 달러요?”
1억 달러, 한화로 1천억 원이 넘는 금액이다.
“추이를 지켜본다는 게 좋은 시기를 놓쳐 버렸어.”
“아직 늦지 않았잖아요, 마스터.”
“구룡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태블릿 PC를 앞으로 내밀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엘렌의 눈.
“Unbelievable.”
엘렌은 감탄사인지 욕일지 모를 말투로 중얼거렸다.
-구룡방, 한국 정부와 접선 중.
-핑 레이를 유진호 팀에 포함.
-한국 정부는 긍정적인 반응.
단 세 줄뿐인 정보.
하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구룡방은 체면을 구기더라도 유진호를 섭외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장 우페이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요.”
엘렌은 장 우페이와 몇 번이고 손속을 겨루었다.
강대국들의 파워 게임은 탑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
두 사람은 미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랭커이기에, 그만큼 충돌도 잦았다.
지금까지는 엘렌이 앞서나가고 있지만, 언제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둘의 격차는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엘렌은 장 우페이의 성격을 잘 알았다.
“한발 늦었지만 우리도 행동에 나서야 할 때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세요.”
“카를라와 함께 서울로 가라.”
윌리엄이 말을 마칠 때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라고 하게.”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가 들어온다.
바닷물처럼 푸른 머리카락.
그 아래에 보이는 눈동자는 에메랄드를 녹여 낸 것처럼 찬란하게 빛이 났다.
언뜻 보기에는 가녀린 체구지만, 살짝 드러난 피부에서는 단련을 해 온 사람에게 보이는 근육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길드 마스터, 그리고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무뚝뚝한 어조로 고개를 숙이는 여인.
엘렌의 제자이자 골드 문의 유망주, 카를라 바스케스다.
“아이언으로 승급한 지 얼마나 지났지?”
“2주입니다.”
엘렌은 제자를 흘겨보고는, 다시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핑 레이 건도 있으니 자연스럽게 합류하라. 이 말씀인가요?”
“역시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건 엘렌밖에 없어.”
“이쪽이 한 수 뒤처지네요.”
“대신 유진호 섭외 관련한 사항은 전권을 위임하지.”
윌리엄은 검은 카드를 들었다.
미국 정·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록펠러 가문.
저 카드는 ‘록펠러’라는 성을 가진 이들 중에서도 극소수만 가진 VVIP 전용 카드다.
“이번 방문의 대외적인 목적은 카를라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명분을 충족시킬 정도는 행동할게요.”
윌리엄의 카드가 엘렌의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하지만 카를라가 유진호를 꺾는 그림이 나와도 나쁘지 않겠지.”
“노력하겠습니다.”
“카를라, 그렇게 긴장할 건 없단다. 결국 이기는 건 골드 문이 될 거니까.”
“꼭 이기겠습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
윌리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네 제자는 너를 안 닮아서 안타까워.”
“마스터가 그렇게 말하면 누구라도 긴장할걸요?”
조소하는 엘렌.
하지만 그녀도 내심 윌리엄의 말에 동감했다.
‘마음씨는 착한 아이인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태도.
겉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배려 가 많고 사려 깊은 성격이지만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카를라의 진가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자, 이미 한국 정부에는 연통을 넣었으니, 준비들 하지.”
윌리엄은 박수와 함께 분위기를 전환했다.
미국 랭킹 1위 길드, 골드 문이 진호를 영입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 * *
“……그래서, 골드 문이 팀 합류를 제안했다고요?”
-예. 테일러 상무가 직접 온다고 합니다.
엘렌 테일러. 현 미국 랭킹 1위이자, 미래에는 군주의 위에 오를 플레이어.
그녀는 형식적이기는 하나, 소속 길드인 골드 문에서 상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
-설마 진호 님의 명성이 미국에까지 퍼질 줄은 몰랐습니다.
한수창은 복잡한 감정을 토로했다.
미국과 중국.
바벨탑이 나타난 뒤에도 세계의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두 나라다.
길드 규모도 다른 국가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수준.
그 두 나라에서 랭킹 1위를 고수 중인 구룡방과 골드 문이 비슷한 시기에 움직였다.
“제가 좀 유능해야죠.”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내 농담에도 허탈한 웃음을 짓는 한수창.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다.
“협회장님은 뭐라고 합니까?”
-진호 님을 단단히 붙들어 놓으라고 하시죠.
“세금 감면을 해 주셨잖아요.”
-그거라도 안 했으면 지금쯤 협회장님이 직접 진호 님을 찾아가셨을 겁니다.
음, 그건 좀 귀찮은데.
“팀장님이 잘 설득해서 제가 한국에 남아 있겠다 말했다고 해 주십쇼.”
-예? 제가 뭘 했다고…….
“그렇게라도 해야 협회장님이 가만히 있겠죠.”
협회장이 괜찮은 사람이긴 건 둘째 치고.
높으신 분을 만나는 건 귀찮다.
평소 같으면 구룡방과 골드 문의 움직임을 빌미 삼아 몸값이라도 팍팍 올리겠지만.
게이트 브레이크를 생각하면 이 정도가 딱 생색내기 좋았다.
한수창한테 빚도 지울 겸, 더 빠르게 승진할 건수도 쥐여 주면 움직임이 더 편해질 테니.
-그럼 협회에서는 진호 님을 믿겠습니다.
한수창과 통화를 종료한 직후.
나는 잠시 사색에 빠졌다.
옛 동료이자, 지금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플레이어인 엘렌.
그녀가 방문할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엘렌이 소속된 골드 문의 마스터인 윌리엄의 뜻이지만.
윌리엄 록펠러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이다.
멸망의 시대 이전에는 피 터지게 경쟁을 했으면서도, 고신족이라는 인류 공동의 적이 나오자 자신의 재산을 모두 쏟아부으면서 저항군에 지원을 했다.
그 모습만 놓고 보면 아군이겠거니 싶지만.
자신의 길드인 골드 문을 정점에 올리기 위해 수단 방법을 안 가리기도 하는 인물이다.
만약 내가 골드 문과 척지면 뭔 수를 쓸지 모르는 양반인데.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나.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느냐?
“내 팀에 들어오고 싶다는 애들이 생겨서.”
벌어지지 않은 일을 누구에게 설명할 수는 없으니.
대신 현 상황을 닉스에게 설명했다.
-후후훗, 과연 여의 계약자로다.
“내가 좀 잘나긴 했지.”
-그 분신을 다루는 아이는 그렇다 쳐도, 타국의 랭커가 어느 정도인지는 궁금하구나.
“얼마 후면 보게 될 거야.”
내 말은 틀리지 않았다.
* * *
이틀 후.
구룡방과 골드 문에서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날에 팀 건물을 찾아왔다.
“핑 레이다. 너희 팀에 들어오고 싶다.”
“탈락. 중국으로 돌아가라.”
“어, 어째서?! 비록 패배했지만 언랭크에서는 최고 수준인 몸인데!”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소리를 꽥 지르는 핑 레이.
“부탁하는 자세가 틀려먹었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중국의 유망주고 뭐고, 우리 팀에 가입하려고 하면 이쪽의 법을 따라야지.
반면 엘렌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미스터 유, 처음 뵙겠습니다. 엘렌 테일러에요.”
회귀 전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
기억보다는 훨씬 젊은 모습이지만, 그녀는 멸망의 시대에서도 우아함과 예의를 잃지 않은 인물이었다.
인류의 정점인 여섯 군주 중 한 명이기도 했고.
회귀 후 처음으로 확인한 것도 그녀의 생존 여부였다.
“저, 미스터 유?”
“미안합니다. 사진으로만 봤지 직접 뵈니까 긴장이 돼서요.”
“호호, 괜찮습니다. 저희가 부탁하는 입장인걸요.”
엘렌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나저나 현 랭킹 1위는 다르긴 하군.
초창기 플레이어이기도 한 엘렌.
대부분의 기운을 억누르고 있음에도, 강한 마력이 그녀의 몸에서 새어 나왔다.
보고 있자니 피곤하군.
난 마안의 감도를 살짝 낮추었다.
“그런데 테일러 상무님.”
“편하게 엘렌이라고 불러도 된답니다.”
“……그건 고려해 보죠. 문제는 상무님이 팀에 들어오기엔 등급 차이가 너무 큽니다만.”
팀은 구속력이 크지 않다.
길드에 속해 있어도, 상황에 따라 팀을 들어왔다가 나갈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미국 랭킹 1위는 선 넘는 거잖아.
“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미스터 유의 팀에 들어갈 건 제가 아니거든요.”
엘렌은 입가에 손을 대고는 휘익 하고 크게 휘파람을 불었다.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여인.
어럽쇼.
“카를라 바스케스입니다.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먼 훗날, 미국의 하이 랭커로 이름을 날리는 플레이어, 카를라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엘렌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었지?
-그 아이는 나를 평생 동안 원망했어.
-만약 그때 오해를 풀었다면 고신족과의 싸움에서 든든한 동료가 되었을 텐데…….
회귀 전.
엘렌이 술에 취했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했던 이야기다.
한 사건 때문에 사이가 틀어져서 원수 사이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전 이 아이의 후견인 자격으로 한국에 온 거랍니다.”
“과연.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윌리엄 록펠러.
머리깨나 썼군.
핑 레이와 나, 최근 유명세를 떨친 플레이어들이 있는 곳에 골드 문의 유망주를 보낸다라.
나를 섭외하지 못해도 이 유명세를 이용해 먹겠다는 계산이겠지.
“거절하실 건가요?”
“설마요. 골드 문에서 키워 낸 유망주라는데 큰 힘이 되겠네요.”
친구는 가까이에 그리고 적은 더 가까이에 두라는 격언이 있다.
핑 레이의 삶에 변화가 왔듯.
카를라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회귀 전과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긍정적이 될지,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엘렌 녀석이 후회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스승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가만 서 있던 카를라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응. 뭔데?”
“저보다 약한 사람을 팀장으로 모시고 싶지는 않아요.”
츠칵!
카를라의 손에서 기다란 낫이 튀어나왔다.
“스, 스승님!”
이 상황을 지켜보던 지영이가 급히 결계를 전개하려고 했지만.
“멈춰.”
난 손을 저었다.
살기가 있으면 낫을 쳐 냈겠지만, 카를라의 행동에서는 그 어떤 살의나 투쟁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호 유, 당신과 겨루어 보고 싶습니다.”
카를라는 여전히 감정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