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승급전 첫날이 끝났습니다.]
[각 진형 및 플레이어들의 활약상을 집계합니다.]
[한국 – 공격력 40%, 방어력 30%, 속도 30% 증가(총 10스택)]
[파괴된 건물: 없음]
[중국 – 공격력 10%, 방어력 20%, 속도 10% 증가(총 5스택)]
[파괴된 건물: 없음]
[라오스 – 공격력 10%, 방어력 10%, 속도 10% 증가(총 3스택)]
[파괴된 건물: 없음]
[킬 카운트]
1위: 유진호 – 132
2위: 이지영 - 37
3위: 핑 레이 – 24
…….
1시간이 지나면 다시 전장으로 투입되는 플레이어들.
다른 참가자들도 재투입되는 적을 쓰러트리면서 킬 카운트를 제법 쌓았지만.
진호처럼 압도적이진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거다.”
핑 레이는 모든 무장을 벗어 놓은 채, 맨몸으로 라오스 진형을 찾아갔다.
목적은 하나뿐.
한국 팀.
정확히는 진호를 사냥하는 것이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우리는 적어도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되잖나.”
냉소적인 웃음을 짓는 핑 레이.
라오스 대표가 그 미소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자, 정말 언랭크 등급이 맞기는 한 건지.”
진호는 압도적으로 강했다.
중국, 그리고 라오스 플레이어들을 동시에 상대하고 무사히 돌아갈 정도의 실력.
핑 레이가 허리를 살짝 숙이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대로 있으면 라오스가 3위인 건 확정일 텐데?”
“유감스럽지만 그 말을 부정하진 못하겠군요.”
라오스 측 플레이어들은 세 국가 중 가장 수준이 떨어졌다.
중국에서 2위라도 차지하자는 전략을 수립하고 전력을 쏟아부으면 처음으로 탈락하는 건 라오스일 것이다.
“나는 유진호를 꺾고 싶다. 그래서 제안하는 거지.”
핑 레이는 이를 갈았다.
승급전 초기의 굴욕적인 패배!
그를 굽어살피던 성좌들의 반응이 냉소적으로 변했다.
그뿐이랴.
이번 승급전은 그가 구룡방의 대형인 장 우페이에게 직접 건의한 것이다.
만약에 진호를 꺾지 못하면.
여태 투자받은 것들을 모두 토해내야 할뿐더러.
영약이나 스킬처럼 회수 불가능한 물건들의 값은 구룡방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평생 동안 갚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런 미래. 난 인정할 수 없어!’
핑 레이는 이를 갈았다.
[분신]이라는 최상급 고유 능력을 부여받은 후, 로열로드를 걸어왔던 인생이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군요.”
쓴웃음을 짓는 라오스 대표.
그는 이내, 핑 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 * *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태양.
병영에서 생산된 하수인들이 길을 따라 협곡으로 전진한다.
우리는 중국과 이어진 협곡으로 향했다.
“이제 군락은 안 터나요?”
“정수를 다 취했거든. 주 전선으로 가야 킬을 올리지.”
승급전 공헌도를 올리는 방법은 상대 플레이어를 죽이는 것뿐이다.
첫날에 과감한 방법으로 킬 카운트를 올려놨지만.
놈들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같은 수법이 두 번이나 통하진 않을 거다.
“이럴 때일수록 정석으로 가는 게 좋아.”
-정석이라. 그대가 그 말을 하니 참으로 이상하게 들리는구나.
“내가 어째서?”
-가끔은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하여라.
핀잔하는 닉스를 슬쩍 째려보고는 하수인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오늘은 라인전에 참여하시는 겁니까?”
한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한테 말을 건넸다.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누구시더라?
“바랑 길드요. 이번 승급전에서 대표로 뽑혔고요.”
지영이가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회귀를 겪고 나니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 빼곤 잘 기억해 두지 않아서 말이야.
지영이에게 고개를 까딱이는 걸로 감사를 표하고는.
“승급전 대표님이었죠?”
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하핫, 유진호 플레이어님이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오늘은 중국 라인을 공략하려고 합니다만.”
“그렇다면 중국 쪽 라인에 투입하는 플레이어 숫자를 줄이고 라오스를 집중 공략 해도 될까요?”
“저를 너무 신뢰하시는 것 같은데.”
“유진호 님이 아니면 누가 중국 진형을 휘저어 놓고 유유히 귀환할 수 있겠습니까.”
승급전 한국 팀 대표는 구김 없는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저희 입장에서는 이번 승급전이 너무 편안한걸요.”
“뭐, 뜻대로 하시죠.”
“저희 의견에 따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 팀 대표는 중국 쪽 협곡으로 가던 플레이어 대부분을 빼서 라오스 쪽으로 향했다.
이쪽에 남은 건 10명 정도인가.
“용케 나를 믿고 과감한 수를 쓰는군.”
“스승님,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잖아. 아무리 내가 활약 좀 했다고 해도 인원 대부분을 라오스로 빼고.”
내 말을 듣고는 허, 하고 한탄을 내뱉는 지영.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가끔 본인의 입지를 잘 인지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요.”
“뭐가?”
“언랭크에서 최고 기록을 경신하시고 이번 전장까지 마음대로 휘저으시잖아요.”
“그거야 내가 대단하니까.”
“저 사람들이라고 스승님의 위대함을 몰라볼까요?”
내 기준은 늘 회귀 전으로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현시점의 성취가 대단하다고는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갈 길이 멀다고 여겼는데.
“지영아, 그 위대하다는 것은 빼고 말해 주라.”
“그야 사실인걸요!”
흥분한 기색으로 외치는 지영.
끙. 회귀 전의 이지영은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매사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으며 어느 때에도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철벽!
괜히 통곡의 벽으로 불린 게 아니라니까.
회귀한 후, 지영의 활기찬 모습에 몇 번이나 낯설음을 느꼈는지 원.
-공경심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원래 예의가 바른 걸 수도 있잖아.”
-여에게 대하는 것을 보면 그런 건 아니니라.
뒤에 걷던 지영이 걸음 속도를 올리더니.
“거기에 있는 소환수님, 내 험담하는 거 아니지?”
……라면서 가자미눈으로 닉스를 노려보았다.
-저 발칙한 것을 보아라. 그대와 여를 보는 눈이 다르지 아니하느냐!
“여신님이 넓은 마음으로 조금 봐줘.”
-흥, 여와 동등한 필멸자는 그대뿐임을 자각하여라.
닉스는 짐짓 토라진 척 고개를 홱 돌렸다.
에휴. 둘 다 애도 아니고 왜 저러니.
협곡으로 진입하니 중국 측 하수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군의 하수인보다 왜소해 보이는 체격.
지금까지 누적시킨 버프 개수 차이가 2배 이상 나니, 덩치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그런데 말이야.
“중국 쪽 수가 적은걸.”
-문제라도 있느냐?
“호된 맛을 보고 전력을 뺄 만큼 여유를 부리지는 않을 테니까.”
[천안을 사용합니다.]
독수리의 눈과 관찰안을 융합해서 빚어낸 마안.
마력 파장으로 중국 플레이어 개개인의 수준을 빠르게 훑었다.
평균에 닿을까 말까 하는 수준.
그러니까.
이 협곡에 투입된 플레이어들은 중요 전력이 아니었다.
첫째 날에 호되게 당해놓고 주 전력을 다른 곳으로 투입했다?
“라오스를 먼저 무너트려서 최소 2위는 확보하겠다는 거네.”
-전략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이로구나.
“그건 곤란하지.”
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번 승급전의 목표는 단순히 1위가 아니다.
중국의 거악으로 성장할 플레이어, 핑 레이의 싹을 짓밟아 놓는 것.
그 녀석이 주목받을 만한 상황을 안 줄 생각인데.
나를 피해서 이득을 보시겠다?
“지영아. 네가 라오스 쪽 전선으로 가 줘야겠다.”
“이 협곡을 비워도 괜찮을까요?”
“중국 측 주력은 그쪽으로 가 있을 거야.”
지영이의 실력이면 핑 레이를 제압하진 못해도 발목을 잡아둘 수 있다.
나를 뺀 대부분의 한국 측 전력도 라오스 방면으로 집중되었으니.
중국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스승님도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할 게 있나.”
쭉정이만 남은 중국의 전력.
나 혼자서도 충분했다.
지영이가 협곡을 이탈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앞으로 나섰다.
붉은 망토를 두른 하수인들은 내가 접근하자, 곧바로 전투태세에 들어섰다.
도끼와 방패를 든 근접형 하수인.
후위에서 수정 지팡이를 든 마법사 하수인.
모두 30기다.
“…….”
“…….”
하수인들은 그 흔한 외침 하나 내지 않고 묵묵히 공격했다.
성에서 빚어낸 움직이는 마법 병기.
말 그대로 생명이 없는 존재들이라서 지시받은 대로 라인을 따라 움직인다.
본래는 [포식]의 대상이 아니지만.
프레데터로 전직했으니, 시도해볼 만하지 않을까.
그 전에…….
[스컬 핸드를 사용합니다.]
[머드 트랩을 사용합니다.]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발동된 두 마법.
전개 장소는 등 뒤.
그러니까 아군의 하수인들이 진격하는 방향이었다.
“유진호 플레이어, 이게 무슨?”
“가만있어. 하수인들 체력 관리하게.”
푸른 로브를 입은 하수인들이 늪에 빠져서 허우적 댄다.
설상가상으로 늪 위로 솟구친 뼈다귀에 붙들려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
양측 하수인들이 전투를 벌이면 이쪽에도 피해가 발생하잖아.
“중국 애들 옆구리에 구멍 뚫어 주려면 체력 아껴 둬야지.”
1차 요새, 혹은 성곽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건 하수인뿐이다.
아군의 하수인들을 온존해야 중국 측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는 게 가능하다.
그러니까.
“저놈들은 내 선에서 정리한다.”
[인페르노를 사용합니다.]
[스킬을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마나를 소모해야 합니다.]
화르르륵!
오른손에서 피어난 화염이 부채꼴 형태로 퍼져 나간다.
반경 5미터를 주황색으로 물들이는 불꽃.
임프의 정수에서 추출한 스킬, 인페르노다.
[인페르노]
등급: ★
분류: 액티브
전방에 화염을 방사한다. 마력을 주입하면 스킬 지속 시간을 늘릴 수 있다.
소량의 마나를 소모한다.
어스 스파이크처럼 마력을 불어넣어서 유지하는 ‘채널링 스킬’.
나름대로 범위 마법이지만, 실상 불 속성 마법 사용자에게 외면을 받는 스킬이다.
마법 사용자를 시작점으로 5미터.
근접전에 약한 마법 사용자가 그 정도나 거리를 허용하면 100이면 100 위험했다.
난 예외지만.
붉은 로브를 입은 하수인들이 제 발로 인페르노의 범위에 들어오고는 지면에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반 가까운 숫자가 증발.
“저 빵즈가 사술을 부린다!”
“사술이 아니고서야 하수인들이 왜 쓰러져 있겠나.”
중국 측 플레이어들은 한발 늦게 움직였다.
“그놈의 사술 타령은 지겹지도 않나.”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중국 애들은 늘 한결같아서 불쾌하단 말이야.
인페르노에 들어가는 마력을 끊어내고 맞대응에 나섰다.
맹렬한 돌진으로 단걸음에 거리를 좁히고는.
[혈조공 - 1초식]
[맹호혈조를 사용합니다.]
탐욕의 가호로 강화시킨 날카로운 손톱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서걱!
금속으로 만든 검이 잘려 나가고.
단단한 갑주가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송골송골 피어나는 핏방울.
모두 중국 측 플레이어들의 몸에서 나온 것이다.
“빠르게 정리하고 털어 주마.”
핑 레이 녀석.
네가 무슨 꿍꿍이를 가져도 소용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