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밤이 되었습니다.]
[하수인이 출몰하지 않습니다.]
[괴물 군락에 병력이 충원됩니다.]
[협곡의 샛길이 열립니다.]
승급전은 6시간 주기로 낮과 밤이 뒤바뀐다.
낮에는 협곡 위주의 라인전.
밤은 서로의 괴물 군락을 노리는 게릴라성 전투가 간간이 벌어진다.
-샛길까지 열어 주니 제대로 싸워 보라는 말이로구나.
“그런 셈이지.”
-하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에 침입할 필요가 없던 것 아니더냐?
“난 위험했던 적이 없는데.”
-하긴. 그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거늘.
나지막이 한탄하는 닉스.
“이번에도 중국 쪽을 노리실 건가요?”
“아니. 라오스를 노린다.”
고대의 협곡은 한번 승급전을 통과하면 다시 진입할 수 없다.
20층 승급전도 같은 전장이긴 한데, 군락에서 출몰하는 괴물 종류가 다르거든.
이왕이면 정수를 미리 다 수집해 놔야 하지 않겠어?
-탈락을 하는 방법도 있거늘.
“첫 도전에서 최고 기록을 경신해야 보상이 가장 좋다.”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승급전에서 꼴지를 해도 공헌도를 비교해서 33%가 아이언으로 올라간다.
내가 승급전 초반에 썰어 버린 중국 플레이어만 몇 명인데.
공헌도는 1위 확정이라서 언랭크 승급전을 두 번 치르는 건 불가능했다.
“넌 여기서 중국 플레이어들을 막아 줘.”
“알겠어요.”
중국 팀은 지금쯤 이를 갈고 있을 거다.
하수인 버프를 둘이나 뺏겼고, 무수한 플레이어들이 사망했으니까.
지영이가 있는 쪽은 확실하게 막을 수 있을 테니.
최악의 상황이 찾아와도 버프를 모두 뺏기지는 않겠지.
“참, 다른 분께 전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나 하나쯤이야.”
“스승님, 의외로 열외 의식이 있으시군요.”
야.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좀 봐주라.
나는 닉스만을 대동하고는 동쪽으로 향했다.
라오스 팀으로 이어지는 협곡.
푹 파인 땅 위로 하수인들의 옷가지나 무기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의외군.”
-무엇이 말이더냐?
“라오스 측 플레이어들의 전투력이 제법이라서.”
나는 지면을 훑어보았다.
협곡에 남아 있는 전투의 흔적.
어느 한쪽이 유리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팽팽한 접전이 벌어진 듯했다.
한국의 플레이어들은 수준이 꽤 높은 편이거든.
반면 라오스는 인구가 적기도 하고, 승급전에 올라오는 플레이어의 질도 두 나라에 비해 떨어졌다.
용케도 버텼군.
여태까지는 중국만 신경 썼는데, 라오스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전력을 갖춘 모양이다.
-긴장이라도 하는 것이더냐?
“설마.”
-여의 계약자라면 그 정도로 곤란해서는 안 되느니라.
이 여신님이 또 허세 부리고 있네.
애들이 몰려오면 걱정할 게 눈에 훤한데 말이야.
-한데 조금 이상하구나. 당당하게 대로로 왔는데 적이 보이지 않다니.
“그러게?”
1차 요새 근처까지 도달했지만.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샛길이 열렸다지만, 인원 다수가 오갈 수 있는 협곡을 열어 두는 건 위험한데.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채애앵- 희미하게 들리는 병장기 충돌 소리.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나 봐.”
-라오스 진형에 있는 괴물들을 사냥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아닐걸.”
라오스 진형에 출몰하는 괴물은 임프.
암흑 마법을 주력으로 사용하기에, 날카로운 충돌 소리가 발생할 리는 없다.
거기에 협곡을 비워 두기까지 했다면…….
“다른 쪽이란 거겠지.”
중국 팀.
우리를 노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전력 차이를 인정하고 더 약한 쪽부터 공략할 줄이야.
늘 대국의 자존심 운운하던 게 중국 측 플레이어들인데, 이번 움직임은 의외였다.
-한가하게 감탄하고 있을 때더냐!
“어차피 수정이야 뺏으면 그만이니까.”
-임프라는 괴물의 정수는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아, 그렇지.”
금속음이 나는 방향으로 가니, 전장은 이미 반쯤 정리가 된 상황이었다.
수세에 몰린 라오스 측 플레이어 무리.
반면 중국인들은 저번처럼 간격을 둔 채 전장을 감쌌다.
지면에 나뒹구는 임프들의 시체.
휴,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
중국 측 플레이어 중에는 구면도 끼어 있었다.
“여기서 또 보네?”
오른손을 흔들자, 중국 측 플레이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놈이 어째서.”
“핑 레이는 없나 봐?”
“레이 소협은 널 상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바쁘신 몸이구먼?”
나는 히죽대면서 파이어볼을 펼쳤다.
“그 수법은 이제 알고 있다.”
“리플렉트 실드!”
중국 측 플레이어 한 명이 방어막을 전개했다.
사각형으로 된 방어막에 충돌한 화염구.
이내 방향을 역으로 틀면서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대의 공격을 받아쳤느니라.
“반사 마법이니까.”
리플렉트 실드.
2성 이하만 튕겨 낼 수 있고 충돌 각도도 정확하게 계산해야 하는 등 사용하기 까다로운 스킬이지만, 상대의 공격을 역이용할 수 있기에 유용한 마법이다.
[탐식의 반지 - 내장 스킬: 마나 업소브를 사용합니다.]
검붉은 기운이 되돌아온 파이어볼을 흡수한다.
마나 업소브의 제약은 내 마력 이하.
당연하게도, 내 공격을 되돌려도 흡수가 가능하다는 거다.
그때.
『하늘의 악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하늘의 악은 한 가지 제안을 당신에게 건넵니다.』
『당신이 무공만으로 중국 플레이어들을 제압하면 하늘의 악이 합당한 보상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잠깐만.
이건 좀 구미가 당기는데?
핑 레이를 포함한 중국 측 플레이어 무리가 나를 의식하고 있을 때.
“놈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다.”
“밀어붙여!”
움츠려 있던 라오스 측 플레이어들이 반격에 나섰다.
잠깐만.
“당신들이 끼면 곤란하지.”
[어스 스파이크를 사용합니다.]
돌기둥이 양측 가운데로 솟아올랐다.
막 달려들던 라오스 측 플레이어 중 몇 명이 바위에 맞고 피를 흘렸다.
“한국 플레이어, 우리 편 들려고 온 거 아니었나?”
“국가 간 멸망전에서 팀이 어디 있나.”
따지고 보면 너희 버프를 털어먹으려고 온 건데.
거기다가 지금은 성좌의 제안까지 받은 입장이라고.
라오스 측 플레이어들이 끼어들어서 핑 레이의 전력이 소모된다면, 하늘의 악은 제안을 번복할 수도 있다.
그럼 곤란하잖아.
“내 먹잇감을 손대면 너희도 죽는다.”
적의 적은 아군이다?
삼파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약한 녀석들부터 치워 버려야지.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그 오만함.”
“일단 한국 플레이어부터 쓰러트리고 보자.”
라오스 플레이어들의 눈가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계약자여, 무공만 써서 저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겠느냐?
“라오스 쪽은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전력으로 라오스 측 팀원들을 쓰러트린 후.
나머지 녀석들은 무공으로 사냥하면 되잖아?
『하늘의 악이 당신의 말에 동의합니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이 이 싸움을 주목합니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은 당신에게 가호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종용합니다.』
『하늘의 악이 눈을 부릅뜹니다.』
성좌 나으리의 허락도 맡았겠다.
킬 카운트도 올릴 겸 떨거지부터 처리해 볼까?
* * *
『하늘의 악은 당신의 활약상을 인정합니다.』
『이번 활약상이 미션 보상에 반영됩니다.』
“모두 잡지는 못했군.”
쯧, 난 혀를 찼다.
하늘의 악이 내민 제안은 중국 측 플레이어들을 이기는 것.
이왕이면 전멸시키려고 했는데.
전투 중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플레이어 일부가 전장에서 이탈했다.
운류보를 전개해서 도망치는 놈들을 사냥했지만.
모두 쓰러트리진 못했다.
-계약 조건은 다 이행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왕이면 흠이 없는 게 좋지.”
가루로 화한 중국 플레이어를 힐끗거렸다.
『하늘의 악은 흠잡을 데 없는 솜씨라고 감탄합니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이 갈채를 보냅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이 당신에게 흥미를 보냅니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이 오아시스의 주인을 경계합니다.』
어럽쇼?
-강한 존재감을 지닌 성좌가 하나 더 나타났구나.
“그러게.”
큭-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아시스의 주인.
회귀 전, 핑 레이를 수호성으로 거둔 성좌인 ‘세트’의 이명이다.
성좌로서의 등급은 S.
바알이나 하늘의 악에 비해서 한 끗 모자라지만, 그래도 여러 성좌 중에서 높은 위치다.
세트가 이 타이밍에 나를 관찰한다는 게 우연일 리 없지.
아무래도 저 성좌는 이미 핑 레이를 주목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계약자 후보로 둔 플레이어가 무참하게 박살 났으니.
그 흥미가 나한테 향하는 건 당연한 일.
『올림포스의 전쟁신은 오아시스의 주인에게 관심 두던 종자를 두고 왜 왔냐며 핀잔합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이 코웃음을 칩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은 흥이 깨졌으니 당신에게 책임을 지라며 한탄합니다.』
나이스 어시스트.
아레스의 메시지 덕에 확실해졌다.
핑 레이 대신 나를 주목하기 시작한 세트.
놈의 미래가 어둠으로 떨어지는 순간.
아니지.
아직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세트가 관심을 나한테 돌린다 한들, 내가 수호성 계약을 치르지 않으면 다시금 핑 레이에게 손을 내밀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뿌리 뽑으려면 핑 레이를 더 처참하게 굴려야지.
“근데 왜 이 녀석들이 여기에 있었을까.”
난 턱을 만지작거렸다.
중국 측에서 보복할 거라고 생각한 게 무색해진 상황.
그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중국 애들이 보복 대신 라오스를 털 줄이야.
-후훗, 아직도 모르겠느냐.
“왜. 짐작 가는 거라도 있나 봐?”
-여의 해답을 듣고 싶다면 마음을 표현해 보아라.
“어리석고 모자란 필멸자가 감히 바라건대, 여신님의 지혜를 빌려주시옵소서.”
-가식이 가득하지만 들어 줄 만은 하구나.
닉스는 내 어깨에 걸터앉았다.
-생각해 보아라. 이번에 그대와 제자, 둘만으로 중국을 농락하지 않았더냐?
“그랬었지.”
-하면 그대를 피하려 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진대.
“중국 애들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 몰라서 그래.”
-방금 경계하는 것을 보면 딱히 그래 보이지도 않다만?
그러고 보니.
못 이길 것 같으니까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놈들도 있었지.
어차피 60분 후면 부활하는 상황.
하수인들도 나오지 않아서 성이나 요새 공략도 불가능한데.
굳이 도망까지 칠 필요가…….
“있었군.”
닉스의 지적 덕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 측 플레이어들은 대국이라는 자존심 대신 합리성을 택했다.
그렇다는 건.
핑 레이도 라오스 진형 쪽으로 넘어와서 수정을 노릴 수도 있다.
아니. 저렇게 도망친 걸 보면 100%다.
“이건 내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인데.”
-어찌할 셈이더냐?
“중국 애들이 빼기 전에 잡으러 가야지.”
핑 레이의 주가를 떨어트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운류보와 전력 질주를 동시에 사용했는데도, 다음 군락에 도착했을 땐 이미 중국 플레이어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에 이어 한국이라고?”
“이놈들. 우리를 동네북이라고 생각하나.”
“설마. 혼자야?”
경계하는 라오스 플레이어들.
“응. 아직 싱글이야.”
중국 플레이어들을 놓친 건 아쉽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마침 임프의 사체들도 바닥에 널렸고, 저쪽에는 버프 수정도 있으니 모조리 챙겨 가야 수지가 맞지.
“빠르게 끝내자.”
형이 좀 바쁘거든.
그러니까 너희는 도망치거나 하지 말아 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