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지영이가 펼친 결계 위로, 형형색색의 마탄이 쏟아진다.
연이은 충격으로 흔들리는 방어막.
-여가 나서야겠구나.
“아니야. 조금 기다려.”
닉스의 기술.
내 극야와 일체화되는 건 2주에 한 번만 쓸 수 있다.
거기에, 여신님이 꽤 고통을 받기도 하고.
그 기술은 정말 위급한 때가 아니면 쓸 생각이 없다.
“지영이는 잘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하나, 상황이 급박해지면 여가 임의로 판단하겠느니라.
“알았어. 고마워.”
-감사라는 마음은 말만 가지고 표현할 수 없느니라.
“솜사탕은 안 돼.”
-누, 누가 솜사탕을 늘려 달라고 했…….
“집중 좀 하자.”
난 여신님의 말을 끊고는 마력을 재배열했다.
머드 트랩을 직선 경로에 깔아 둔 후, 탐욕의 가호로 늪의 점성을 강화했다.
“고작해야 늪지. 무시하고 달려든다.”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대열을 무너트리면 적이 급습해 올지도 몰라.”
중국 측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우리의 등 뒤를 의식했다.
이래서 정보가 중요하다는 거지.
정면으로 달려오던 근접 딜러들은 늪에 발을 담그는 순간.
“어억?”
“평범한 늪이 아니다.”
“9층보다 더하잖아!”
탐욕의 가호로 한층 더 깊어진 늪의 깊이에 휘청거렸다.
“딱 맞기 좋게 모여 있잖아.”
오른손을 내밀자, 맺혀 있던 화염이 쏘아졌다.
다시 한번 솟구치는 매캐한 연기.
중국 측 플레이어들은 [데모닉 파워]로 증폭된 파이어볼을 버텨 내지 못했다.
파이어볼, 어스 스파이크, 그리고 에너지 볼트.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건 1성에서 2성급 공격 마법이 전부였다.
하지만.
[데모닉 파워]로 모든 스텟을 마력에 투자하니, 등급을 뛰어넘는 위력을 발휘했다.
중국 측도 손 놓고 당하진 않았다.
간간히 마탄이 날아오기도 하고.
근접 딜러들은 내 마법 공세에도 어떻게든 접근하려 애썼다.
“스승님께는 다가올 수 없어.”
넓게 펼쳐진 진동 결계.
지영이는 이전처럼 공격 용도가 아닌, 중국 측의 진로를 철저하게 막았다.
결계가 파괴되면 그 자리에 새로운 방어막을 설치.
중국 측 플레이어들의 발목을 붙들었다.
닉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영이를 흘겨보았다.
-무리하지는 말아라.
“스승님이나 잘 지켜봐 줘. 난 괜찮으니까!”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는 지영.
진동 결계를 설치·유지하는 데는 많은 마력이 소모되지 않는다.
필요한 건 그녀의 정신력.
마력보다는 집중력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역시.
미래의 통곡의 벽은 달랐다.
“빌어먹을. 부숴!”
“결계가 다시 나타나잖아.”
“그럼 돌아가야지.”
“전선을 더 넓혔다가는 적이 추가로 나타났을 때 대응하기가 어렵다.”
중국 측 플레이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피해를 입었다.
반수에 가까운 숫자가 쓰러진 후에야.
“더 이상은 안 된다.”
“저기 있는 빵쯔부터 처치하자.”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대열을 넓게 펼쳤다.
“이렇게나 넓은 범위는 아직 커버할 수 없어요!”
“잘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나는 손을 말아 쥐었다.
원래대로 돌아온 근력 수치.
딱 [데모닉 파워]의 지속 시간인 1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죽어라. 빵쯔!”
경신법을 밟으면서 근접하는 중국 플레이어.
내 팔이 기괴한 각도로 움직이며 정면으로 달려오던 중국 플레이어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 그 움직임은 무공?!”
“삼류 무공이야.”
“거짓말!”
우득, 손에 힘을 주자 붙들렸던 플레이어의 고개가 축 처졌다.
“아까처럼 가자.”
“네!”
반이나 줄어든 중국 측 전력.
핑 레이처럼 걸출한 플레이어도 없는데, 너희 실력으로 버틸 수 있을까?
* * *
60명 사망.
승급전 시작 후 1시간 만에 중국 측이 입은 피해다.
그뿐이랴.
1차 요새의 내구도도 13%나 깎여 나갔다.
한국 팀 방향으로 이어지는 협곡의 플레이어가 전멸한 탓이다.
단 두 사람이 난입한 결과라고는 믿기지 않는 성과!
-한데, 요새를 더 공략해서 완전히 무너트리지 않고 왜 물러난 것이더냐?
“말했잖아. 요새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건 하수인뿐이야.”
승급전 초기의 하수인들은 약하다.
괴물 군락을 반복적으로 털면서 버프가 누적되어야, 저 요새를 뚫을 수 있다.
플레이어끼리의 기량 차이로 초반부터 승부가 나지 않게끔 나름대로 밸런스 조절을 한 셈.
우리는 협곡 안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국 측 플레이어 무리의 뒤를 공격.
전멸시키고는 유유히 한국 팀 본진으로 돌아왔다.
[한국 팀 소속 하수인들의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한국 팀 소속 하수인들의 방어력이 10% 증가합니다.]
중국에 배치된 괴물 군락들의 결정을 투입하자, 버프 효과가 즉각적으로 발휘되었다.
“해냈어요, 스승님!”
“이제 시작이야.”
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고대의 협곡에는 토착 생물이 셋이나 있다.
뭐, 그랜드 몰을 빼고 보면 생물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진 않지만.
어쨌든 포식해야 할 정수가 둘이나 남았으니, 쉬고 있을 틈이 없다.
“지금 아군의 총 책임자가 누구신지?”
“예. 접니다.”
플레이어 하나가 긴장한 기색으로 나섰다.
어딘지 모를 길드의 엠블럼을 가슴팍에 붙여 놨군.
“저거, 바랑 길드 마크예요.”
“안 물어봤는데.”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어쭈, 눈치가 제법이야.
한 발자국을 내딛자, 바랑 길드 소속 플레이어가 움찔거렸다.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네.
“특별한 건 아니고. 부탁 하나만 하려고.”
“말씀하시죠, 유진호 플레이어님. 다른 분들과 의견 조율은 제가 맡겠습니다.”
“아니, 거창하게 그럴 건 없고.”
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데도 한국 측 플레이어들은 긴장을 전혀 늦추지 않았다.
저쪽으로 넘어가서 사고를 너무 크게 쳤나.
명색이 아군인데 이런 눈빛을 쏘아 보낼 줄이야.
“이럼 상처받는데.”
-퍽이나 그러겠구나.
이 여신님까지 태클이라니.
내가 인생을 헛살았어.
휴, 짧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입을 떼었다.
“한국 쪽에 있는 괴물 군락도 내가 공략한다고요.”
“아, 아. 저희 쪽은 아직 공략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가시죠!”
한시름 놨다는 표정.
내가 사고 칠까 봐 너무 조마조마해하는 거 아니냐?
“스승님, 저도 함께할게요.”
“아냐. 넌 협곡으로 가.”
지영이의 능력은 언랭크를 넘어섰다.
온갖 영약과 스킬 북, 그리고 장비 지원을 받은 핑 레이가 아니면 그녀에게 압도당할 터.
내 빈자리를 충분히 커버해 줄 만한 실력을 갖추었다.
“지영아, 너만 믿는다.”
“네, 네! 반드시 스승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기합이 팍 들어간 지영.
이 정도면 당분간은 별일 없겠어.
나는 한국 측 영역에 있는 괴물 군락들을 소탕했다.
7시 방향에 머무는 괴물은 스켈레톤.
탑에서 처음으로 조우하는 언데드 괴물이다.
“그겔. 살아 있는 자다.”
“그게겔. 너도 우리와 함께하자.”
백 단위로 몰려드는 스켈레톤.
그랜드 몰처럼 땅에 숨거나 하지는 않지만, 숫자가 몇 배나 많았다.
“오히려 좋아.”
진한 어둠이 발밑에서 솟구친다.
극야의 힘.
밤을 지배하는 여신, 닉스의 힘이 스켈레톤을 부서트렸다.
산산조각 난 뼈다귀들.
나는 흩어진 뼈 위에 손을 얹었다.
[스켈레톤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2.7% → 5.3% → 7.1%…….]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일반]
[근력 + 1]
[민첩 + 3]
[마력 + 1]
[스킬 - 스컬 핸드가 추가됩니다.]
[스컬 핸드]
등급: ★
분류: 액티브
지면에서 뼈로 된 손을 일으킨다.
소량의 마나를 소모한다.
이번에는 디버프 계열 스킬을 얻었다.
뭐, 회귀 전에 이미 겪어 봐서 알고 있었지만.
-뼈를 소환하다니. 여가 보기에는 무용해 보인다만.
“다 쓸 데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스컬 핸드는 [약화의 문장]처럼 즉시 발동하진 않지만, 물리력을 지녔기에 활용도가 높았다.
여차하면 머드 트랩과 병행해서 사용, 늪지에 스컬 핸드를 깔아 두면 근거리 계열 적을 더 효과적으로 붙들 수도 있을 거고.
그 외에도 써먹을 방법이 많았다.
-한데 많이도 남았구나.
“잘됐네.”
-이미 정수를 모두 취했는데도 말이더냐?
“나한테는 용의 심장이 있거든.”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용아병을 쓰러트리고 획득한 정수.
본래 페널티 때문에 약화된 녀석이지만, 정수의 등급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5성 스킬인 용의 심장은 내 고유 능력, 포식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으니.
포식을 사용할 때마다 마력 스텟도 덩달아 늘어난다.
마력 스텟에 능력치를 분배하지 않았는데도 가장 높은 이유!
“오래간만에 마력 좀 올리자.”
-설마 그 아이를 놓고 온 이유가 이것이더냐?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싫다니까.”
나는 짧게 웃었다.
* * *
전선으로 복귀한 핑 레이.
그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他妈的(시바)!!”
연거푸 땅을 걷어차자, 바닥이 푹 파였다.
동시다발적으로 부활한 플레이어들은 모두 핑 레이의 눈치를 살필 뿐.
그를 말리지는 못했다.
핑 레이가 땅바닥에 화풀이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중국 측 플레이어가 다가왔다.
“소협,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유진호 그자에게 당했다.”
“빵쯔 놈들. 초반부터 우리 영역에 전력을 투자했군요.”
“전력이라고?”
허, 하고 웃는 핑 레이.
잠시 후.
핑 레이의 눈동자 위로 분노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빵즈 놈들은 둘이었다. 단둘!!”
그랜드 몰 군락에서 벌어진 전투.
모든 상황을 전달받은 중국 측 플레이어는 이내 사색이 되었다.
핑 레이를 포함한 플레이어 20명 전멸.
한국 팀으로 이어지는 협곡에 보낸 인원들도 대부분 사망 판정을 받았다.
당연히 한국 측에서 전력을 퍼부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소협은 어찌하실 계획인지요?”
“그 빵즈를 쓰러트려야지.”
“10명으로도 이기지 못하였다 하지 않았습니까.”
“놈의 능력이 기묘해서 그렇다. 이제는 파악했으니 맥없이 당하지 않아.”
차분해진 핑 레이.
그는 냉정하게 진호와 벌인 전투를 복기했다.
진호의 능력은 대단했다.
무공, 체술, 마법, 그리고 어둠을 다루는 사술까지.
동시에 여러 능력을 다루었는데 숙련도까지도 높았다.
“그렇다고 해서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소협이 보기에 승산이 있소?”
“30명. 그 숫자로 밀어붙이면 유진호를 확실하게 사냥할 수 있다.”
핑 레이는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알겠소. 다만 현재는 하수인들을 강화하는 것이 먼저요.”
“내가 라오스 전선으로 가겠다.”
“그쪽에 있는 괴물 군락을 공략할 생각이오?”
“우리 쪽 괴물 군락에서 버프를 다시 얻으려면 한나절을 기다려야 하잖나.”
핑 레이는 이를 갈았다.
진호가 빼앗아간 하수인 강화 버프.
그걸 충당할 수 있는 방법은 타 진형에서 약탈해 오는 것이다.
[트릭스터가 당신의 추태에 혀를 찹니다.]
[오아시스의 주인이 시선을 거두려 합니다.]
[하늘의 악이 떠나갑니다.]
[우르크의 작은 도둑이 당신을 응원합니다.]
…….
멀어지는 성좌의 관심.
강한 힘을 지닌 S급 성좌들이 냉소적으로 돌아섰고.
상대적으로 외면받던 몇몇 성좌가 러브 콜을 날렸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진호한테 압도당한 후에 벌어진 사태!
핑 레이는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소.”
“맡겨만 줘라.”
성좌들의 관심을 되돌리려면.
그리고 중국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진호를 반드시 꺾어야 한다.
‘수단이나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핑 레이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