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상하이.
중국의 경제 수도이자, 수많은 외국계 기업들이 교두보로 삼는 자본의 통로다.
구룡방은 중국에서 제일가는 길드답게 땅값 비싼 상하이 중심부에 위치한 건물을 통째로 사용했다.
“그 한국인이 도전을 받아들였다고?”
말끔한 정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입술을 씰룩였다.
허리까지 닿는 꽁지머리.
언뜻 말라 보이지만 옷이 가리지 않은 곳에는 근육이 오밀조밀하게 잡혀 있다.
장 우페이.
구룡방의 대표이자 중국 내 랭킹 1위 플레이어다.
“그러하옵니다. 대형(大兄).”
비서는 사장이나 대표라는 호칭이 아닌, 대형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길드원들은 모두 형제라는 의미로 쓰이는 호칭이다.
“들었느냐?”
손을 까딱이는 장 우페이.
헝클어진 머리가 인상적인 근육질의 사내가 다가온다.
중국의 유망주.
구룡방에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양성한 인재, 핑 레이다.
“들었사옵니다, 대형.”
“네 계략대로 되었구나.”
“불초 모자란 제자에게 크나큰 기회를 주심에 감읍하옵니다.”
핑 레이는 웃음기 하나 없이 묵묵히 대답했다.
진호를 이번 무대에 끌어들이는 건 모두 핑 레이의 아이디어였다.
-구룡방이 조국을 넘어서 동아시아의 그 어떤 길드보다 우뚝 설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핑 레이는 승급전을 구룡방의 외국 진출 교두보로 삼자고 건의했다.
그의 이야기는 윗선에서도 긍정적으로 판단되었고, 결국 대표인 장 우페이한테까지 닿았다.
꿀꺽.
핑 레이는 침을 삼켰다.
구룡방의 대표인 장이 대형(大兄)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냉혈한이라는 사실이 익히 알려져 있어서다.
“이번 무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라 믿는다.”
“대형의 신뢰에 저버리지 않도록 일신우일신하겠습니다.”
*일신우일신 - 매일 새로워짐.
“널 믿는다.”
툭툭, 장 우페이는 핑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친밀감이 느껴지는 행동과는 달리 싸늘하게 식은 그의 눈동자.
핑 레이는 긴장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침을 삼켰다.
“사범의 말을 잘 들으면 한국의 유망주쯤은 가볍게 누를 수 있을 것이다.”
“정진하겠나이다.”
“그래. 준비 잘하고.”
“존명!”
뒷걸음질로 등을 보이지 않은 채, 천천히 물러나는 핑 레이.
장 우페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문이 닫히자, 비서가 입을 뗐다.
“핑 레이를 믿으십니까?”
“설마. 난 투자한 자본을 믿는 거다.”
3성 스킬 북만 10개 이상 구매.
아루가의 눈물이나 천년자라의 간 등 평범한 플레이어는 구경조차 못 하는 영약들도 먹였다.
“핑 레이에 얼마를 투자했지?”
“이번 달 지출까지 8,430만 달러입니다. 대형.”
“1억까지 채우도록.”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유진호라고 했던가. 그자는 몸값으로 1억 달러를 요구했다 하지 않은가.”
비서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장 우페이의 성격상 한번 투자하기로 한 건 절대로 무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존명.”
그대로 명령에 순응했다.
장은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중국의 풍부한 인적자원 중 손에 꼽히는 재능.
거기다가 엄청난 자금을 투자했다.
사람은 누군가를 배신할 수 있지만, 투자는 넣은 만큼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렇게나 완벽한 상황이다. 투자가 실패할 리는 없지.’
온기 하나 없는 웃음이 장 우페이의 입가를 차게 물들였다.
* * *
『핑 레이는 언랭크 등급에서 독보적인 활약상을 보인 플레이어다.』
『그는 저번에도 유진호를 언급하였으며, 이번 승급전에서 그를 꺾겠다고 공식으로 선언했다.』
『핑 레이가 소속된 길드, 구룡방에서는 유진호가 이번 승급전에 참여할 것을 한국 플레이어 협회에 정식으로 건의하였으며…….』
-낯이 익은 이름이로구나.
“예전에도 나랑 붙어 보자고 한 녀석이야.”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로다.
혀를 차는 닉스.
반대로 지영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연신 콧김을 내뿜었다.
“핑 레이인지 뭔지. 제가 혼쭐을 내 줄게요!”
“너는 승급전 조건도 못 채웠잖아.”
“스승님도 마찬가지잖아요.”
“난 조만간 레벨 50 찍어.”
윽- 하면서 지영이 앓는 소리를 냈다.
“저도 노력하면…….”
“먼저는 9층부터 클리어하고 이야기합시다.”
“우우, 두고 봐요, 스승님. 내가 금방 9층까지 돌파하고 올 테니까!”
참 의욕적이라서 좋군.
그나저나.
“협회에서도 난리가 났겠어.”
“핑 레이란 사람, 그렇게 유명해요?”
“중국 인구가 많잖아. 거기서 손꼽히는 유망주라고 생각해 봐.”
“그래도 스승님보다는 모자랄 것 같은데.”
플레이어 선출 방식이 꼭 사람 숫자에 비례하지는 않다.
각국마다 [서버] 개념으로 솟아난 바벨탑.
인구가 적은 곳은 그만큼 플레이어 초대장을 보내는 비율이 올라가지만.
반대로 많은 국민이 속한 나라는 초대장 발급 비율이 적었다.
중국이야, 자국 인구가 원체 많다 보니 비율을 조정해도 플레이어 수가 많은 게 함정이지만.
나는 한수창 팀장에게 연락했다.
-기사를 보셨나 보군요?
“먼저 연락 주시지 그랬어요.”
후, 하고는 한수창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걱정하지 마십쇼. 이번 일은 협회에서 잘 무마시키겠습니다.
“뭘 무마시킨다는 건지…….”
-중국의 도전장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연락하신 것 아닙니까?
한수창은 핑 레이의 이력을 줄줄이 읊었다.
중국 내 길드 중 No.3 안에 들어가는 대형 단체인 구룡방.
구룡방에서 온갖 영약과 스킬 북, 그리고 스승들을 붙여서 키운 플레이어가 핑 레이란다.
-향후 진호 님의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이번은…….
“정면으로 꺾어 줘야죠.”
이 아저씨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만약 놈이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이쪽에서 도발했을 거다.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 줬는데 왜 무마를 시켜?!
한수창 팀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핑 레이는 구룡방이 작정하고 밀어준 플레이어입니다!
“승급전에서 꺾어 주면 홍보 효과가 극대화되겠네요.”
핑 레이.
놈이 성좌들에게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전, 그 날개를 부숴 버려야 한다.
승급전은 핑 레이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좋은 무대였다.
“다음 승급전에서 붙자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다른 분이라면 몰라도 진호 님의 말씀이라면.
한수창의 목소리에서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암요. 날 믿은 거,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승급전은 매달 10일에만 활성화된다.
지금이 월말이니…… 다음 승급전까지 보름 정도 남았군.
-촉박하지 않겠느냐?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아.”
나는 씩 웃었다.
* * *
중국의 유망주, 핑 레이의 도전장을 받고 며칠이 지났다.
내 생활에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스승님! 오늘 하루도 잘 부탁드립니다!”
“드디어 새 인형이 왔습니다.”
의욕적인 모습으로 훈련에 임하는 두 사람.
오전은 통째로 훈련에 할애.
나도 두 사람의 훈련에 참여하는 겸, 회귀 후에 새로 얻은 능력인 극야를 같이 수련했다.
출력이 4배로 늘어나면서 섬세하게 컨트롤하기가 힘들어졌거든.
-매일 정진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여신님의 힘은 다루기가 더럽게 까다로워.”
-후후훗, 잘하고 있느니라.
오후에는 바벨탑에 접속, 미션을 클리어했다.
-어느 미션이 경험치를 가장 많이 주느냐?
“9층.”
-끙, 여는 질척거리는 땅이 싫다 하였거늘.
“갔다 오면 솜사탕 줄게.”
-그대를 챙길 것은 여뿐이니 어쩔 수 없구나.
9층 미션은 늪지대에 있는 리자드맨을 전멸시켜도 끝나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 동안 몇 번이고 재생성되는 괴물들.
경험치를 올리기에 딱이지.
-다른 플레이어들도 있지 않느냐?
“있었는데요. 없어질 거야.”
30명이 상대해야 할 리자드맨들을 홀로 쓰러트리면 경험치도 더 많이 쌓이겠지?
최초 클리어 보상.
그리고 최고 기록도 세웠겠다, 보상에 운운할 필요가 적어졌다.
cp 손해를 좀 보겠지만.
승급전까지 50레벨을 맞추려면 빠듯하니 감수해야지.
“쉬이잇!”
“귀 간지러우니까 조용히 해라.”
발밑에서 솟구친 흑색 칼날이 누리자드맨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푸아악!
상흔에서 솟구치는 피.
팔을 허우적대던 리자드맨이 늪지대에 고꾸라졌다.
-늘어난 극야의 출력에 제법 적응했구나.
“아직 멀었어.”
내 기준은 극야의 원주인인 닉스다.
그녀가 내 그림자와 일체화했을 때의 감각은 잊히지가 않는다.
밤의 여신이라는 위명에 걸맞은 전지전능한 힘!
그 자락이라도 흉내를 낼 수 있다면, 고신족과 전쟁을 벌일 때 유용하게 쓰일 거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50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언랭크 등급에서는 더 이상 경험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1 - 9층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1/10으로 감소됩니다.]
[초심자의 행운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승급전을 사흘 앞두었을 때, 겨우 조건을 충족시켰다.
평범한 이들은 최소 4개월 이상 걸리는 과정.
그걸 보름으로 줄였다.
하루에 두 번만 도전 가능하다는 제약만 없었어도 진즉에 50레벨을 달성했겠지만.
-이제 지겨운 늪지대는 안 봐도 되겠구나.
“그거는 모르지.”
-또 9층에 도전할 셈이더냐?
“아니. 나도 늪에 발 딛는 거 안 좋아하거든.”
늪지가 9층에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탑을 오르다 보면 늪지보다 더한 환경도 많이 나온다.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하려고 벌써부터 질색하는 건지 원.
남은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는 않았다.
레벨을 올릴 수는 없어도, CP는 얼마든지 챙기는 게 가능했다.
언랭크에서 가장 많은 CP를 얻을 수 있는 건 2층.
서바이벌이다.
나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2층 미션을 수행했다.
“아, 왜 여기서 유진호가 나오는 건데!”
“승급전 준비 안 하세요?”
2층 위주로 도는 플레이어들은 나를 보자 체념하거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무턱대고 덤벼들었다.
당연하게도.
콰득-!
도망치거나 발악하거나.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승급전을 하루 남긴 날.
“저, 스승님!!!”
“무슨 일로 호들갑이야?”
“달성했어요. 레벨 50요!!”
지영이가 내 앞에 서더니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나 빨리?”
“왜요. 스승님도 하셨잖아요.”
그거야, 회귀자니까 가능한 거고.
넌 1회차잖니.
역시 통곡의 벽은 다른 걸까.
그녀의 재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났다.
“수고했다.”
나는 오른손으로 지영이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천부적인 재능에 노력이 더해진 성과.
지영이 나를 따라잡으려고 얼마나 이를 악물었을지, 짐작이 갔다.
“헤헤, 이러다가 제가 스승님보다 앞서갈지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통곡의 벽이 현역일 때도 나보다 한 수 아래였다.
날 따라잡으려면 부족해.
“두고 봐요.”
지영은 흥, 하고 콧김을 불었다.
생각지도 못한 전력이 하나 추가되었군.
핑 레이.
회귀 전, 중국의 암흑가를 좀먹었던 거악(巨惡)을 사냥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