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운기행공을 마치고 눈을 뜨니, 아침 해가 창문으로 드리운다.
눈을 슬며시 뜨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닉스의 얼굴이 망막에 비쳤다.
좀 민망한데.
-그대여, 깨어났구나.
“응. 계속 보고 있던 거야?”
-기를 운용하는 동안에 누가 건들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잠깐만, 여신님이 호법을 서 준 거야?”
-여에게는 잠이 필요 없으니. 그대를 지켜보았지.
말문이 막혔다.
설마 여신님이 밤새도록 지켜보고 있을 줄은.
조금이지만 감동받았다.
-그대여, 아무래도 잠이 모자란 듯하구나.
“응? 아닌데.”
-얼굴에 열이 많이 올랐느니라.
그건 부끄러워서 그래요.
사실을 말하면 닉스가 놀려 먹을 게 분명해서 다른 화제로 돌렸다.
“괜찮아. 운기행공을 하면 피로도 풀려.”
-필멸자들은 모두 잠을 꼭 자야 한다고 들었다만.
나는 픽 웃은 후, 내공을 확인했다.
좁쌀만큼 늘어난 내공.
그래도 처음 운공을 했을 때보다는 훨씬 낫다.
미처 다 흡수하지 못했던 천년설삼의 기운이 몸 곳곳에 남아 있거든.
삼재기공의 효능보다는 천년설삼의 덕이 큰 셈.
한데, 운기행공으로 흡수한 기 일부가 단전 말고 다른 곳에 머물렀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잠깐만.”
운기를 한 내공이 다른 곳에 축적된 건 처음 보는 현상이다.
자전대심공(紫電大心公)처럼 여러 혈도에 소규모 단전을 만들어서 운용하는 심법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삼재기공 같은 기초 무공에 그런 공능이 있을 리가.
내공이 뭉쳐 있는 곳을 관조하던 중.
아- 하고 탄성이 흘러나왔다.
범인은 네스의 정수에서 추출한 스킬, [여의주]였다.
“삼재기공으로 다 소화하지 못한 내공이 여기로 스며들었구나.”
내공의 양은 10 정도.
현재 스텟의 1/10이 조금 안 되는 수치다.
-왜 그리 놀랐느냐?
“여의주가 내공을 보관하고 있었어.”
혈조공의 첫 초식 자세를 취하면서 여의주를 자극하니, 담아 둔 내공이 방출되었다.
위화감 없이 단전의 내공과 섞이는 여의주의 기운.
잠깐, 이 정도면 내공 보조 배터리잖아?
-그대가 내공이 모자라서 곤란한 적은 없었던 것 같거늘.
“지금이야 그렇지. 더 강한 무공을 익히면 내공이 많이 모자랄 거야.”
11층에 잠들어 있는 기연.
야수백왕무를 습득하면 지금의 내공 가지고는 전투 지속력에서 확 떨어질 거다.
“양이 좀 아쉽긴 하다.”
축적된 내공의 양이 내 진신내력의 1/10 정도.
전투 중에 비장의 한 수 정도로만 쓸 수 있겠는걸.
-궁금한 것이 있구나.
“뭐가?”
-내공을 발출하는 게 자연스럽게 된다면 역으로 축적도 되지 않을까 하여.
일리 있는 지적인데.
닉스가 말한 대로 단전의 내공을 여의주로 흘려보냈다.
[여의주가 당신의 내공을 흡수합니다.]
[11.2/50]
[15.4/50]
…….
내공을 담을 수가 있다고?!
입이 쩍 벌어졌다.
“여신님.”
-갑자기 표정을 굳히는 게 심상치 않…….
“대박이야. 여신님 말이 맞았어!”
닉스의 팔을 붙들고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오직 운기행공으로만 늘릴 수 있는 내공.
지금이야 달맞이 돌이나 천년설삼 덕분에 부쩍 늘어나는 거지.
원래는 운기행공을 반복해도 쥐꼬리만큼 늘어난다.
과거 무공 사용자들이 탑에서 두각을 드러내기까지 오래 걸린 것도 그 문제였고.
여의주는 고질적인 내공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해 주었다.
닉스와 손을 마주 잡은 채로 마구 돌던 중.
부우웅-!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원룸에 울려 퍼졌다.
“이 시간에 누구지?”
손을 놓자, 닉스가 중심을 못 잡고 허우적거렸다.
-욱, 우욱. 너무 어지럽구나.
감정표현이 과했나.
여신님 미안.
멀미하는 여신님을 둔 채, 휴대전화에 손을 뻗었다.
[한수창 팀장]
이 양반이 댓바람부터 웬일이람.
수신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대는 순간.
-유진호 특무대원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깜짝이야. 왜 전화하자마자 소리를 지르는 겁니까?”
-아, 모르고 계셨군요. 실시간 검색어 좀 보세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한수창.
회귀 전에는 늘 침착하고 대범한 모습만 봐서 그런지, 영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예. 지금 찾아보죠.”
한수창이 시킨 대로 인터넷을 켜는 순간.
오호,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 * *
[실시간 검색어]
1. 탑 7층 숨겨진 보스
2. 유진호, 최고 기록 또 경신
3. 흑호 팀.
…….
과연.
이래서 팀장이 아침부터 전화를 걸었구나.
“최고 기록 경신이 뭘 대수라고.”
-그냥 기록도 아니고, 백호 길드의 유망주인 흑호 팀이랑 붙어서 낸 결과이지 않습니까!
“기록은 팀 단위로 매겨지잖아요.”
-에이, 공헌도 보면 다 알죠.
자정이 넘었으니 탑 공략 기록도 갱신되었겠군.
그래도 좀…….
“이상하군요.”
-예?
“숨겨진 보스야 그렇다 쳐도, 이슈가 너무 빠르게 퍼져서요.”
-커흠. 과연 유진호 특무대원의 눈썰미는 대단합니다.
한수창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사실 협회에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목소리를 확 낮췄다.
“7층 공략 말이죠?”
-그렇습니다. 흑호 팀과 진호 님이 공동 공략한다는 정보였습죠.
“출처는 백호 길드였겠군요.”
-아, 그렇죠. 백…… 이에엑?!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거야 뻔하지.
백호 길드의 마스터와 서정민이 사이가 안 좋은 건 유명하니까.
아, 생각해 보니 LS그룹의 내부 사정이 알려지는 건 조금 먼 미래의 일이었구나.
“눈치 보니 알겠던걸요.”
-허허허, 정말 대단하십니다.
“플레이어 협회는 특무대의 인지도를 올릴 수 있으니, 그야말로 윈윈일 테니.”
-협회 차원에서 힘 좀 썼죠.
어쩐지.
히든 보스 출현이라든지 여태까지 소문만 무성했던 흑호 팀에 대한 이야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협회장님께서도 이번 이슈를 매우 기꺼워하셨습니다.
한수창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내 유명세가 올라갈수록, 특무대를 신설한 한수창의 입지도 빠르게 올라갈 거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면 긍정적인 변화군.
저 양반이야, 내가 없어도 자기 능력으로 알아서 승진 잘하겠지만.
등을 밀어주는 것 정도는.
-아, 이런. 다시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바쁘신가 보군요.”
-협회장님 직통 전화가 와서 말입죠.
“볼일 보시죠.”
전화를 끊자, 닉스가 내 어깨에 걸터앉았다.
-꽤 소란스럽구나.
“어제 탑을 공략한 게 이슈가 되었다더라.”
닉스한테 계약자의 유능함을 뽐낼 겸, 기사들을 보여 주었다.
[백호의 신예 팀과 유진호 플레이어, 7층 최고 기록 경신 확인.]
[백호에서 키운 신예 팀, 플레이어 한 명에게 농락?]
[7층 최고 기록 경신. 압도적인 공헌도 차이에 흑호 팀의 해명…….]
-이 나라에서는 그대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겠구나.
“아직 갈 길이 멀었지.”
-후후훗, 마음 놓지 말고 늘 정진하여라.
2025년으로 돌아온 지 두 달.
유명세를 타는 속도가 회귀 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이러면 계획을 조금 앞당겨도 괜찮겠어.”
-무슨 계획이 있느냐?
“나만의 팀을 짤 생각이야.”
-이상하구나. 여가 보기에, 그대는 홀로 다니는 것이 제일 이상적이다만…….
“모든 미션에서 같이 다닐 팀은 아니고.”
팀이라고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고신족과의 싸움에 대비해서 자질 있는 인재들을 미리 포섭하는 거다.
길드설립은 [브론즈] 등급부터 가능하지만, 팀을 꾸리는 건 마음만 맞아도 되거든.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만났던 아이도 팀원으로 부르겠구나.
“용케 기억하네?”
-후후훗, 여를 무시하지 말거라.
이지영.
결계 능력자이자, 한국에서 몇 없는 그랜드 마스터급 플레이어다.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는 고유 능력 운용 방법을 알려 주고 짧게나마 팀으로 움직였지.
참, 2025년이면 아직 그 사람도 한국에 머무르겠구나.
빨리 움직이면 향후 길드를 꾸렸을 때 큰 이득을 볼 수 있겠다.
“한 명 더 있어.”
-그대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킬 만한 인재라.
“까다롭긴.”
핀잔을 줬지만, 막상 부정하지는 못했다.
내가 플레이어의 자질이나 능력을 보는 기준은 멸망의 시대에 맞춰져 있으니.
부우웅-! 타이밍 좋게 한수창한테 전화가 다시 왔다.
수신 버튼을 누르고는, 맞은편에서 말하기 전에 바로 입술을 떼었다.
“부탁 하나만 하죠.”
-예?
“사람 하나, 아니 둘 좀 알아봐 주십쇼.”
플레이어 협회의 권한.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써먹겠어?
* * *
플레이어 협회는 탑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모두 확보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플레이어 등록을 지원하는 것도 있지만.
명색이 각 나라마다 서버가 따로 운영되기 때문에 각성자 명단 확보가 용이했다.
첫 번째 행선지는 북대전.
결계 사용자인 이지영이 사는 곳이다.
약속 장소인 카페로 가자, 한 여인이 화들짝 놀라면서 일어났다.
“스승님! 여기에요!”
양팔을 움직이면서 나를 반기는 이지영.
그나저나.
“스승이라는 말은 안 떼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님이죠. 군사부일체잖아요!”
여기서 한자성어가 나올 줄이야.
나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간만, 이라고 하기에는 한 달도 안 지났군.”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특히나 스승님에게는 말이에요.”
이야기하는 걸 보니, 내 기사를 본 모양이다.
“결계 컨트롤은 많이 늘었나?”
이지영은 뺨을 씰룩이면서 오묘한 미소를 짓더니.
“3장까지 겹칠 수 있어요.”
하고는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벌써 3장이라.
그녀의 재능을 알고 있다지만, 요령을 알려 준 것만으로 수년이나 되는 시간을 앞당길 줄은 몰랐다.
-호오, 전에는 2장을 겹치는 것도 힘겨워하지 않았더냐.
“그만큼 노력한 거죠. 스승님의 소환수 씨.”
-여는 한낱 소환수가 아니니라!
“소환수 보고 소환수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요?”
묘한 대치를 이루는 두 사람.
아니지.
한 명은 신이구나.
“여신님, 사람 많은 데서는 조금 참아 줘.”
-알겠느니라.
닉스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여신님이라서 소환수 취급을 받을 때마다 싫어한단 말이지.
지영한테도 따로 주의를 줘야겠다.
“팀 하나를 꾸리려고 해.”
“스승님이요?”
“어. 이제부터 쭉 함께할 동료들을 모집하는 거지.”
“그럼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팀원으로 섭외하려고.”
“당연히 승낙이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과 전혀 다른 이지영의 모습.
저렇게나 활발한 사람이었나?
하긴, 제대로 친해진 건 멸망의 시대 때였으니 삭막할 수밖에.
“아니. 계약서 보고 결정해.”
-매일 서울의 팀 트레이닝 센터에 출퇴근.
-탑 미션 수행은 팀원들 입회하에 진행.
-팀장(나)과 훈련은 1주에 5번.
-삼시 세끼 제공.
…….
-탑 미션에서 나오는 소득 2%는 팀 운영비로 받음.
-월급은 1천만 원. 반년마다 조정 가능.
-계약 기간은 3년.
기타 사항들이 쭉 있지만, 핵심 내용은 앞에 나와 있다.
“팀 트레이닝 센터가 있어요?”
“아직은. 팀원 구해지면 바로 만들 거다.”
백호 길드에서 입금된 20억.
튜토리얼 및 탑에서 나온 재화를 처분해서 번 10억.
그 외에도 협회의 지원금이나 기타 등등 하면 40억이나 된다.
서울에서는 제대로 된 빌딩 하나 살 수 없는 돈이지만.
급한 대로 전·월세를 넣으면 규모가 있는 곳도 구할 수 있겠지.
돈이라는 건 이럴 때 써야 한다.
“고향을 떠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지영은 내 말이 끝나기도 않았는데 계약서에 서명했다.
“스승! 언제부터 올라가면 되나요?!”
야, 사람 말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