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갑작스럽게 성사된 만남.
나는 걸음을 멈춘 채, 비어 있는 벤치에 앉았다.
-약속 장소로 가지 않는 것이더냐?
“그쪽에서 데리러 온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붉은 스포츠카 하나가 길가 쪽에 정차했다.
철커덕- 위쪽으로 젖혀지는 문 사이로, 10대로 보이는 소녀가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여기에요!”
폐가에서 구했던 학생, 홍예슬이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저씨 아니라니까.”
내용물은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해도 되겠지만.
생물학적인 나이는 20대 초반이거든요?
뒤따라서 운전자석으로 나온 사내.
운전자는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단정하게 자른 스포츠머리.
그 아래로 굳은 심지가 그대로 투영된 눈동자가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강렬한 눈매 하나만큼은 뇌리에 확 꽂혔다.
‘설마 했는데, 홍윤수가 맞았어.’
내 기억보다는 훨씬 젊은 모습이지만 말이야.
눈매만큼은 먼 미래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는 날 보자마자 오른손으로 홍예슬의 머리를 꾹 누르더니, 자신도 90도 각도로 인사를 했다.
“구해 주신 분을 뵀는데 인사부터 해야지.”
“오빠, 나 머리 뭉친다니까!”
“죄송합니다. 동생이 예의가 없어서요.”
“머리에 손대지 말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이미지군.
회귀 전.
난 홍윤수를 몇 번 본 적 있다.
언제나 분노를 내포하고 있던 눈동자.
하나뿐인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플레이어 범죄자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힌 복수귀였다.
그래서일까.
동생과 사이가 엄청나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평범한 남매 사이네.’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남매를 보고 있자니, 큭-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타인을 면전에 두고 비웃는 건 예의가 아니니라.
아 참.
뜻밖의 모습에 긴장이 풀어졌다.
“미안합니다.”
“은인을 두고 못난 모습을 보여서 제가 더 죄송하죠.”
홍윤수는 너털웃음을 짓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소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일행 주변으로 하나둘 모여드는 사람들.
홍윤수를 알아본 거다.
그는 이 시대에서도 유명한 랭커니까.
한국에서 탑 5 안에 반드시 들어가는 실력자이니, 못 알아보는 게 신기했다.
“제 차에 타시죠.”
“스포츠카 아닙니까?”
“뒷좌석 있는 녀석으로 가져왔거든요.”
스포츠카에 뒷좌석이라.
낯선 느낌이군.
“그러면 부탁드립니다.”
나는 홍윤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한가한 카페.
정확히는 홍윤수가 저녁 시간을 통째로 대여해 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빠, 난 먹던 걸로.”
“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 따뜻한 거 먹어.”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홍예슬은 그 말을 내뱉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둘만 남은 상황.
홍윤수의 눈빛에 감돌던 장난기가 사그라지고.
“다시 한번 인사드려야겠군요. 동생을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지해진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아까 받았습니다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마음을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홍윤수는 고개를 들고는 내 눈을 직시했다.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인상적이면서도 강렬한 눈빛이다.
“저한테 있어, 동생은 유일한 혈육입니다. 만약 예슬이가 그 범죄자한테 희생당했다면…….”
뒷말을 삼키는 홍윤수.
달그락.
한 줄기 바람이 카페 식기들을 스치고 지나간다.
내부 공기가 홍윤수의 감정에 공명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폭풍의 지배자.
홍윤수의 이명이다.
잔잔하게 떨리는 목소리 사이로 진한 살기가 느껴진다.
응.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내가 더 잘 알아.
플레이어 범죄자들을 척결한답시고 탑을 오르는 것도 등한시해서 랭크가 떨어지고.
과격한 진압으로 인권위나 수많은 시민단체에서 항의도 받았다.
‘법을 못 믿겠다고 즉결 처형까지 했으니까.’
플레이어 범죄자는 죄질을 따지지 않고 살해했다.
혹자는 홍윤수를 영웅이라 칭했고, 누군가는 살인마라며 비난했다.
그러다가 플레이어 범죄자 협회, 블랙마켓이 준비한 대규모 함정에 빠져서 사망했지.
이번 생에서는 그럴 일이 없으려나.
인기척이 느껴지자, 홍윤수가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오빠, 나 없을 때 이상한 이야기 했지?”
“이상한 이야기는.”
“딱 봐도 분위기가 이상하잖아.”
두 남매는 다시 한번 서로를 보면서 투덜거렸다.
-참으로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저게?”
-후후훗, 여도 가이아와 많이 다투었느니라.
여신들끼리 다투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궁금해지는군.
각자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문했던 음료가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나는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쓰디쓴 아메리카노의 향이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이제 본론을 이야기할 분위기가 되었네.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한 이유를 듣고 싶군요.”
“아, 보답을 하려고 말입니다.”
역시, 예상대로다.
동생의 목숨을 구해 줬는데 맨입으로 끝낼 위인이 아니지.
-솜사…….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오른손으로 닉스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그쪽은 소환수입니까?”
“계약 관계입니다.”
“영성이 높은 존재 같은데. 신기하군요.”
홍윤수는 닉스에게 흥미를 내비친 후, 시선을 내 쪽으로 다시 향했다.
“저번에 권성과 마주쳤다고 들었습니다.”
무공 사용자, 신준석의 이명이다.
“꽤 조사를 하셨네요.”
“진호 님께 필요한 선물을 고민하면서 말이죠.”
내 말을 가볍게 흘리는 홍윤수.
동생과 접점이 있는 만큼 위험한지를 미리 파악해 둔 건가.
그래. 이래야 장래의 하이 랭커지.
홍윤수는 작은 목함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뭡니까?”
“확인해 보시죠.”
선물받은 걸 눈앞에서 까는 건 좀 꺼려지지만, 본인이 허락했으니 사양 않고.
달칵- 함의 잠금장치를 젖히는 순간 청아한 향이 코에 아른거렸다.
설마.
홍윤수의 선물이라는 게…….
[천년설삼 1뿌리]
등급: 레전드[L]
분류: 소모품
천년을 묵었다는 설삼입니다.
자연지기를 담고 있어, 복용 시 마력이나 내공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미친.
난 입을 틀어막았다.
“만족하십니까?”
“이렇게 귀한 걸…….”
“이번 탑 공략에서 얻은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드셔도 됩니다.”
홍윤수는 지그시 웃었다.
내 반응에 꽤 만족하는 모양이다.
천년설삼은 마력보다 내공을 늘리는 데 탁월한 영약이다.
무공 사용자가 천대받는 현 시점에선 등급에 비해 한 수 뒤처지는 평가를 받는 편.
그래도 레전드 등급 영약이다.
생각지도 못한 보상이군.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난 목함을 닫았다.
바로 취하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았다.
천년설삼 안에 담긴 기운을 흡수하려면 몇 시간은 걸릴 테니.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요?”
“아니지. 제안이라고 해야 하나.”
홍윤수는 묘한 웃음과 함께 명함을 내밀었다.
[팀 옐로우 스톰]
“실버 등급이 되면 우리와 팀을 맺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팀’이란, 미션 때마다 무작위로 매칭되는 오합지졸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탑의 최고 기록을 공략하기 위해 꾸려진 전담 팀.
길드보다 작은 규모로 운용되는 매니지먼트다.
옐로우 스톰은 국내 여러 플레이어 팀 중에서 제일가는 명성과 성과를 내는 명문 팀이다.
“오빠, 저 아저씨를 스카우트하려고?”
“레벨이 모자란 거지, 실력은 안 모자라니까.”
“최근 떠오르는 신예라지만…… 나 때문에 그럴 것까지는 없어.”
“뭐, 그것도 부정은 못 하겠다만 영입하고 싶은 건 진심이야.”
어럽쇼?
두 남매는 날 앞에 두고 논쟁을 벌였다.
떡을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아니지.
먼저 판을 깔아 줬으니, 내 본론을 꺼내기 쉬워졌나.
“사양하죠.”
나는 홍윤수가 내민 명함을 반대로 돌렸다.
음- 짧게 신음을 흘리는 홍윤수.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진호 님에게 손해는 아닐 텐데요?”
“이쪽도 제안이 하나 있어서요.”
“들어 보죠.”
“홍윤수 랭커, 나중에 제가 길드를 만들면 들어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카페가 정적으로 물들었다.
홍윤수와 홍예슬.
두 사람의 눈가 위로 황당함이라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탑에 오른 지 반년도 안 된 초짜가 국내에서 손꼽히는 랭커에게 러브콜을 날렸으니, 황당할 만도 하지.
처음 입을 뗀 건 홍예슬이었다.
“아저씨, 미친 건 아니죠?”
“어허, 예슬아. 구해 주신 분께 무슨 말버릇이니.”
“그래도 말이야. 이건…….”
홍윤수가 두 눈을 부릅뜨자, 홍예슬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한층 가라앉은 분위기.
홍윤수는 후, 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으로 역제안을 받을 줄은 몰랐군요.”
“뭐, 지금으로서는 가당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하시겠죠.”
“솔직히 말하면 좋은 기분이 들진 않습니다.”
뭐, 동감한다.
내가 홍윤수의 입장이라면 이미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테니까.
동생의 은인.
또한, 예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고 걸어 본 제안이었는데.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야.
“물론 지금은 불가능하죠. 길드를 만들려면 실버 등급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뭐긴, 멸망의 시대를 막고 고신족에 대항할 힘을 기르려는 거지.
‘그 사실을 말해 줄 순 없으니.’
나는 쓴웃음을 삼키고는 입을 재차 열었다.
“이유가 타당하면 이쪽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설마.”
홍윤수는 가차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난 세계에서 제일가는 탑 공략 팀을 꾸리는 게 목표요. 길드에 들어가면 제약이 많거든.”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나는 천년설삼이 담긴 목함을 도로 내밀었다.
“이건 무슨…….”
“30층까지 모든 최고 기록을 경신하면, 내가 만들 길드에 들어오는 걸로요.”
“나한테 역제안을 하는 겁니까?”
“예. 그 보증으로 천년설삼을 드리죠.”
“실패하면?”
“그땐 제가 옐로우 스톰에 들어가죠.”
홍윤수는 목함과 나를 번갈아 가면서 보더니.
큭, 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흥미로운 제안이네요.”
“그렇습니까?”
“자신감인지 오만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실망은 안 할 겁니다.”
난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래도 제가 준비한 선물은 가져가시죠.”
홍윤수는 다시 한번 천년설삼이 든 목함을 쭉 밀었다.
“30층까지 최고 기록 경신을 하는 데 도움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홍윤수의 말이 바뀔세라, 목함을 재빠르게 챙겼다.
보증이랍시고 천년설삼을 걸었지만 안 아까운 건 아니거든.
안 그래도 삼류인 삼재기공이라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느린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대화는 화기애해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