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후-.
짧은 한숨을 뱉었다.
폐부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공기.
숨을 들이마시자, 달궈진 폐가 빠르게 식었다.
“끝났군.”
두 눈을 부릅뜬 채 숨통이 끊어진 녀석.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모르겠군.
이제는 ‘피의 금요일’이라는 사건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거다.
-계약자여, 괜찮으냐?
“멀쩡해.”
-여는 그대의 승리를 전혀,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느니라!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안절부절못하던데.”
-아, 안절부절못하다니. 여, 여가 경망된 행동을 할 리 없지 않느냐?
얼굴이 빨개진 채로 소리를 지르는 닉스.
“예예. 그러시겠죠.”
-그대가 오해한 것이니라.
[버서크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60초 동안 감소합니다.]
“윽.”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정신호와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 만신창이가 된 몸.
버서크의 페널티가 신체를 짓누르자 무기력감에 고통이 더해졌다.
-그대여! 괜찮으냐!
방금까지는 걱정 안 했다며 소리를 지르더니만.
“괜찮아. 조금 쉬면 나아져.”
-휴, 다행……. 아니지. 여의 계약자라면 이 정도 시련 따위 아무것도 아니니라.
솔직하지 못한 여신님 같으니라고.
나는 웃음을 삼키고는 뛰어왔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무기력감이 전신을 누른다고 해서 못 걷는 건 아니었다.
-저 극악무도한 자는 이미 쓰러졌잖느냐.
“붙잡힌 애들 구해 줘야지.”
-아, 그렇지.
폐가 지하로 향하는 계단.
초음파를 다시 사용해 봤지만 위험 요소는 없어 보인다.
저벅- 저벅-.
계단을 밟고 지하로 내려가자, 10대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최근 수원이나 화성에서 행방불명된 이들.
사지를 결박당한 채, 팔뚝에서 피를 뽑히고 있었다.
대부분은 의식을 잃은 상태.
-감히 하늘 아래에서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닉스가 분노를 터트렸다.
“다 살아 있어.”
나는 여신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진정시켰다.
규칙적인 숨소리.
납치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다들 초췌해 보이긴 해도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드드드드!
쭉 늘어난 손톱.
나는 손톱을 강화한 후, 침착하게 족쇄를 잘라 냈다.
“으, 으음.”
“정신이 드나?”
“다, 당신은 누구세요.”
“구하러 왔다.”
여학생이 실눈을 뜬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심코 학생의 명찰을 보는 순간.
“……!”
내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무슨, 일이세요?”
“아무것도.”
짧게 대꾸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납치당한 이들을 모두 수습한 후, 한수창 팀장에게 전화했다.
현 상황을 최대한 짧게 압축해서 설명하니.
-예? 일을 벌써 해결하셨다고요?!
경악 어린 목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납치된 애들 있으니까 구급차나 보내 주십쇼.”
-아, 알겠습니다.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얼마쯤 기다렸을까.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먼 곳에서 울렸다.
동시에 진입하는 협회 요원들.
모두 플레이어다.
“유진호 특무대원,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아요. 저쪽으로 쭉 가면 범인의 시체 있으니까 그거나 수습해 줘요.”
“알겠습니다.”
긴장한 기색으로 현장에 진입하는 요원들.
정신호의 공범이 있는 건 아닐까 경계하는 모습이다.
하긴, 내 말만 믿고 긴장을 풀어 버리면 직무유기지.
“아오. 삭신이 쑤신다.”
전투를 벌이면서 몸에 축적된 충격.
대지모신의 가호에 [재생] 스킬이 있다지만, 만전의 상태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아저씨, 괜찮아요?”
구출한 애들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처음으로 구한 학생.
[홍예슬]이라는 명찰이 눈에 들어온다.
“멀쩡해. 이래 봬도 꽤 튼튼하거든.”
“고맙습니다.”
“응?”
생각지도 못했던 감사표현.
“아까는 정신없어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
“어…… 그래.”
나는 떨떠름한 투로 대꾸했다.
인사를 마치고는 구급차로 돌아가는 홍예슬.
그 모습을 복잡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그대의 세계에서는 10살 차이가 나면 범죄 아니더냐?
“이 여신님은 갑자기 뭐래.”
-눈빛이 아주 애잔해서 하는 말이니라.
“그런 거 아니야.”
난 여신님의 허튼소리를 일축했다.
홍예슬에게 신경을 쓰는 건 사실이지만, 닉스의 짐작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유다.
홍윤수의 동생 이름이 홍예슬이었지?
하이 랭커 홍윤수.
‘폭풍의 지배자’라는 이명으로 불렸던 한국의 플레이어다.
그는 동생이 플레이어 범죄자에게 살해당한 이후, 악인 척결에 목숨을 걸었었다.
동명이인일까, 아니면 원래는 죽었어야 할 홍윤수의 동생을 구한 걸까.
이왕 이렇게 된 거, 후자였으면 좋겠다.
홍윤수의 최후는 비참했다.
악인이라면 앞뒤 안 보고 달려드는 그의 성격을 이용, 플레이어 범죄자 무리는 홍윤수를 겨냥해서 함정을 파고 끔찍하게 살해했다.
만약 여기서 구한 사람이 홍윤수의 동생이라면…….
물불 안 가리던 성격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할 일은 다 했다.
행방불명된 사람들도 모두 구했고, 범인도 쓰러트렸으니.
뒤처리는 협회에 맡겨야겠다.
“먼저 들어갑니다. 현장 감식이랑 정리는 알아서 해 주십쇼.”
“유진호 플레이어님! 병원에 안 가셔도…….”
“됐습니다. 외상도 없는데 병원은 무슨.”
골병이 들긴 했지만 잠자고 일어나면 멍 하나 안 지고 다 나을 거다.
포션이나 챙겨 주면 모르겠는데,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면 줄 리도 없고 말이야.
입원해 봐야 귀찮은 일만 가득하니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 * *
다음 날.
부우웅- 아침부터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려 댔다.
발신자는 한수창 팀장이다.
-진호 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멀쩡하다니까요.”
진짜다.
늪 도마뱀한테서 얻은 능력, [재생]으로 내·외상을 모두 치료했고.
대지모신의 가호 덕에 피로나 몸에 쌓인 충격도 씻어 냈다.
-정말 다행입니다.
“목소리가 꽤 피곤해 보이는데, 밤 새셨습니까?”
-현장 조사를 다녀왔거든요. 이제 막 정리를 마친 참입니다.
한수창은 납치된 사람들의 증언과 정신호의 시체, 그리고 폐가에 남은 흔적들을 조사한 결과를 짧게 이야기했다.
회귀 전에 본 자료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내용.
붙잡힌 이들은 구했지만, 이미 희생자가 몇 명 있었다고 한다.
폐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발견된 유골들.
-……진호 님이 아니었으면 피해 규모가 더 커졌을 겁니다.
한수창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 그리고 자책감.
위로한다고 해서 풀릴 감정은 아닌 것 같군.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군요.
“아닙니다.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면 다행이죠.”
-참, 협회장님께서 조만간 한번 뵙자고 하셨습니다.
“어제 뵈었는데요?”
-특무대의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나왔다.
김우성 협회장.
내 활약상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향후 특무대의 활동 방향성을 생각하면 좋은 반응이다.
“그러면 특무대 창설 건은 통과된 모양이군요.”
-예. 안 그래도 특무대 근무 조건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1. 특무대 소속 플레이어는 협회의 의뢰를 3달에 1번, 의무적으로 진행해야 함.
2. 임무 진행 시 협회 인력 및 물적 지원 요청 가능.
3. 협회의 인준이 있을 경우에는 초법적인 영역에서도 힘 행사 가능.
회귀 전의 기억과 별 차이가 없는 항목이다.
-자세한 부분은 서류로 전달하겠습니다.
“고생하셨네요.”
-아, 그리고 협회장님께서 한 가지 더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협회장님의 전언요?”
-진호 님께는 협회 소속이 되셨을 때 제안했던 혜택을 그대로 적용시켜 주시겠다고요.
혜택이라.
잠깐만.
“그 제안아리는 게, 설마 세금 공제를 말하는 건 아니죠?”
-맞습니다.
미친.
너무 놀라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플레이어한테는 꽤 많은 세금이 부과된다.
풍요의 상징, 바벨탑.
미션 수행을 할 때마다 나오는 재화와 마법 아이템의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금 공제가 된다?
장기적으로는 훨씬 이득이지.
금전적인 부분만 놓고 보면 1천억이 부럽지 않은 제안이다.
처음 한수창이 제시한 조건이기도 했고.
중요한 건 특무대 소속은 어디까지나 협회가 아닌, 프리랜서다.
협회 소속도 아닌데 이만한 혜택을 준다는 건…….
엄청난 특혜다.
-요원들의 조사에 따르면 정신호라는 자, 26층까지 올라간 플레이어더군요.
브론즈 등급.
100~150레벨 사이니, 내 예상이 얼추 들어맞았다.
“녀석이 강하긴 했죠.”
-언랭크 플레이어가 브론즈를 꺾었으니, 진호 님께서 그 등급으로 올라가시면 얼마나 더 강해지시겠습니까.
“투자의 일환이라는 겁니까?”
-예. 협회장님께서 그렇게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원래는 직접 말하고 싶었는데 일이 바빠서 한수창에게 맡긴 거라나?
협회장 양반, 회귀 전에도 꽤 과감한 구석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직접 겪어 보니 꽤 화끈했다.
-사원증은 며칠 후에 전해 드리겠습니다.
“참, 세금 공제는 바로 적용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사원증은 아직 특무대가 정식으로 발족한 게 아니라서 그러는 겁니다.
오호, 그렇단 말이지?
나는 입가가 씰룩이는 것을 참았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한수창은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일이 수월하게 흘러가는군.
기억보다 2년이나 앞당겨진 특무대 신설.
1차 대격변,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가 몇 개월 앞당겨진 걸 감안하면 긍정적인 변화다.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에는 협회의 권한이 훨씬 커질 테니.
한 가지 더.
세금 공제를 받아 낼 줄은 몰랐어.
크크.
입술이 씰룩거린다.
지난 이틀 동안 탑에서 얻은 부산물을 하나도 안 팔기를 잘했군.
케이딘 수정.
떡갈나무 지팡이.
고블린한테서 뜯어낸 독주머니도 한가득 있다.
수정만 해도 최소 거래가가 100억이 넘어가는데.
협회에서 뜯어가는 세금이 10%를 조금 넘어가던가?
부가세 미포함이니, 판매 금액의 20% 이상이 세금으로 날아가는 거다.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지.
최소 20억.
세금 공제로 얻을 이득이다.
-기쁜 일이라도 있는 것이더냐?
“응. 여신님한테도 좋은 소식이야.”
-여에게도 좋은 소식이라니. 무엇인지 궁금하구나.
“솜사탕 10개 살 돈으로 12개를 살 수 있다는 거야.”
닉스는 몸을 잘게 떨더니.
-오, 오오오오!!
하고는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어때?”
-경사로구나! 이렇게나 여를 기쁘게 하는 이야기는 없었느니라!
솜사탕 정도는 세금 공제가 없어도 많이 사 줄 수 있는데.
진심으로 솜사탕 기계를 구매하는 걸 고민해 봐야겠다.
나는 종합 상가에서 케이딘 수정을 포함한 아이템들을 모두 경매로 넘겼다.
독주머니는 저번에 부산물을 처분한 상인에게 넘겼고.
“손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아저씨는 수북이 쌓인 독주머니를 보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량이 많다 보니, 금액은 나중에 입금해 준단다.
“튀면 지구 끝까지 쫓아갑니다.”
“아무렴요. 저는 신용 장사입니다.”
하긴.
저 아저씨 입장에서는 내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이겠지.
거위의 배를 가르는 짓은 안 할 것처럼 보인다.
욕망의 주머니도 비웠겠다.
휴대전화 바탕 화면에 있는 바벨탑 앱을 켰다.
5층에 도전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