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정신호의 근원은 피.
내가 ‘극야’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듯, 저 녀석도 피를 움직여서 여러 형태로 만들 수 있다.
[블러드 메일]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정신호의 전신을 감싼다.
중갑을 입은 기사의 모습.
“크크크크. 내가 피를 흘릴수록, 네 목숨이 위험해질 거다.”
“그 전에 빈혈로 쓰러질 것 같은데?”
“건방진 놈.”
팔뚝을 휘감던 피 일부가 채찍처럼 길게 늘어났다.
궤적을 그리면서 내 정수리를 노리는 피 채찍.
[백스텝을 사용합니다.]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동시에, 재배열을 끝낸 마력으로 지면을 물들였다.
질척이는 땅.
머드 트랩을 전개하니 정신호를 중심으로 반경 10미터가 늪으로 변했다.
“그 갑옷을 쓸 때를 기다렸다.”
나는 회귀 전에 본 자료로 정신호의 전투 방식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피 자체를 다루는 능력.
그렇다면.
피로 방어구를 만들어서 전신을 감싸지 않을까?
[약화의 문장을 사용합니다.]
[문장을 새긴 부위는 방어력이 20% 감소합니다.]
피로 만든 갑주에 새겨진 기묘한 문장.
현재 놈의 피가 ‘갑주’ 판정이라서 새길 수 있었다.
-저 피로 구현하는 모든 공격이 문장의 영향을 받겠구나!
감탄하는 닉스.
나는 다시 한번 마력을 재배열했다.
[어스 스파이크를 사용합니다.]
정신호가 채찍을 회수하는 동안 마법을 완성, 정면으로 쏘아 보냈다.
구구구궁!
대지가 좌우로 갈라지면서 크고 작은 바위가 솟구쳤다.
놈은 피 갑옷을 강화하고는 어스 스파이크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푸우욱!
날선 바위가 피 갑옷 일부를 뚫고 본체에 타격을 입힌다.
정신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죽어 버려!”
[블러드 네일]
갈고리 손톱을 처음보다 2배 이상 길게 만들고는 냅다 휘둘렀다.
맹호혈조로 핏빛 손톱을 받아치는 순간, 엄청난 무게감이 팔을 눌렀다.
한순간 중심을 잃을 정도의 충격.
나는 손톱에 실린 힘을 흘려 내면서 밸런스를 유지했다.
피가 많을수록 강해지는 바토리의 가호.
정신호는 내가 낸 상처마저도 전투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소모했다.
[독수리의 눈을 사용합니다.]
[상대가 당신보다 월등하게 강합니다.]
정신호의 몸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한층 더 진해졌다.
자신의 피를 연료로 삼아서 강해진다, 라.
회귀 전에 본 자료와 동일하다.
“키키키. 힘이 넘쳐나는구나!”
긴 머리를 산발한 채로 날뛰니 미친놈 같군.
아니지.
바토리의 가호에 심취할수록 광인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미친놈 맞구나.
“힘에 자신이 있나 봐?”
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괴력을 사용합니다]
펑!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정신호의 육신이 쭉 밀려났다.
산산조각 난 갈고리 손톱.
놈의 오른팔이 반대로 꺾였다.
괴력에 실린 힘을 흘려 내지 못했는지, 뒤틀린 팔 사이로 부러진 뼈가 튀어나왔다.
“키히힛!”
고통에 겨운 목소리.
정신호는 광기 어린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키키. 안 죽어, 이런 걸로.”
부러진 팔을 장난감처럼 휘두르니, 상처에서 피가 솟구치면서 튀어나온 뼈를 원래 위치로 되돌렸다.
-징그럽구나.
“그러게.”
나는 여신님의 말에 대충 대꾸했다.
멸망의 시대에는 이보다 더한 광경도 많이 보았다.
가루 단위로 분해해 버린 괴물이 재생하는 것도 봤는걸.
정신호가 팔을 재생하는 동안, 다시 한번 거리를 벌렸다가 맹렬한 돌진을 펼쳤다.
“키키. 예상했다.”
[블러드 캐슬]
몸에 둘렀던 피 갑주를 해제한 정신호.
‘약화의 문장’이 새겨진 핏덩어리가 성벽 형태로 앞을 막아섰다.
붉은 벽을 들이받자, 강한 반탄력에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내 돌진을 막아 낸 대가로 정신호의 피 대부분이 증발해 버렸다.
[블러드 드레인]
솨아아아!
지면에 튄 피 일부가 정신호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모두 자기 몸에서 나온 혈액.
난 [가시 갑피]로 전신을 보호한 덕에 부상 하나 입지 않았다.
“피를 다 버려서 약화의 문장을 지워냈군.”
머리를 좀 썼네.
내구력이 떨어진 피로 맹렬한 돌진을 상쇄.
거기에 내가 걸어 놓은 약화의 문장도 떨쳐 냈다.
피를 지속적으로 보충하면 저주의 효과가 이어졌을 텐데.
“키키키. 2라운드 시작이다.”
정신호의 입에서 음침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챙! 채챙!
허공에서 불똥이 튄다.
반복적으로 울리는 육감의 경고.
팔과 다리가 후들거린다.
충격이 쌓일수록, 몸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키키. 왜? 아까처럼 떠들어 보시지.”
광소를 터트리는 정신호.
놈의 전투력은 100대 중반의 플레이어가 완전무장을 갖춘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피의 효과로 증폭된 정신호와 내 스텟 차는 어림잡아 3배!
탑 바깥에서는 [초심자의 행운]도 적용되지 않으니,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졌다.
“키이. 그 돌진기. 못 쓴다.”
[맹렬한 돌진]을 의식하는지.
놈은 거리를 내주지 않으려고 근접전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쏟아지는 공격을 묵묵히 받아치던 중.
-여가 돕겠노라!
닉스의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렸다.
아직은 버틸 만해.
말할 틈이 나지 않아서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밤의 축복]의 지속 시간은 5분.
그 후에는 15분을 기다려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비장의 수단인 만큼 아껴 둬야지.
“하아아압!”
포효를 내뱉으니 정신호의 몸이 움찔거렸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틈.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백스텝으로 재차 간격을 벌린 후, 다시 [맹렬한 돌진]으로 정신호에게 경직을 걸었다.
“쥐새끼가!”
“너희 집 쥐는 좀 큰가 보다?”
백스텝과 맹렬한 돌진의 조합.
정신호가 내 백스텝을 경계했기에 자주 연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번 틈을 주면 확정적으로 경직을 유발해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백스텝을 사용하기만 해도 반사적으로 피를 방어용으로 돌리고 있으니.
“카학!”
정신호는 경직이 풀리자마자 팔을 휘둘렀다.
부웅-.
내 머리 위를 스친 갈고리 손톱.
머리카락 일부가 붉은 기류에 걸려서 툭, 끊어졌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지만.
“키키. 죽어라.”
연이어 펼치는 찌르기까진 흘려보낼 수 없었다.
놈의 속도가 훨씬 빠른 탓이다.
난 X 자로 양팔을 교차, 정면으로 날아든 손톱 찌르기를 막았다.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0이 되었습니다.]
회색 갑피가 깨지고도 모두 해소하지 못한 충격이 양팔을 흔들었다.
시야가 하얘질 정도의 충격.
[냉혈]이 발동하면서 고통을 줄여주었다.
“키키. 잘난 척 더 해 보지?”
몰아붙이는 정신호.
극야의 힘을 촉수 형태로 구현, 놈의 팔을 감았다.
스텟 차이가 커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끊어지는 극야.
하지만 그 작은 틈 덕에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채챙! 챙! 정신호의 피가 여러 형태로 변환하면서 급소를 노렸다.
[탐욕의 가호]로 강화된 날카로운 손톱.
단전에서 솟구치는 내공으로 혈조공을 펼치면서 가까스로 버텨 냈다.
“왜 안 쓰러지고 버티는 건데!”
분통을 터트리는 정신호.
언뜻 보기에는 전투의 주도권이 녀석에게 있는 것 같지만, 내막을 뜯어보면 내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었다.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적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아.
지금껏 쌓아올린 여러 생물들의 정수.
그 능력을 100% 발휘하면 나보다 훨씬 강한 적과도 대등하게 싸우는 게 가능했다.
서걱!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다해 상처를 입는 경우도 발생했다.
“크키키키. 터져 죽어 버려라! 블러드 밤!”
손을 쥐는 정신호.
놈의 지배력은 상대의 혈액에도 적용되었다.
일정한 범위 안이라면 터트리는 것도 가능했지만.
[바토리의 가호가 산성 피에 간섭합니다.]
[피의 성질이 다르므로 가호의 영향력에서 벗어납니다.]
딥 슬라임한테서 얻은 능력으로 피를 변화시켜서 폭발을 무효화시켰다.
“왜, 뭐가 잘 안 돼?”
“키이이.”
정신호는 기묘한 신음을 흘리고는 다시 팔을 움직였다.
5분.
10분.
그리고 20분.
전투 개시 후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정신호의 얼굴에서 초조한 기색이 감돌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
지속적으로 피를 뽑아낸 탓에 빈혈 증세가 보이기 시작했다.
“빌, 어, 먹을.”
말은 툭툭 끊어졌고.
폭발적이었던 기세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저 극악무도한 자의 움직임이 둔해졌느니라!
응.
여기까지는 내 생각대로다.
바토리의 가호 덕에 공양으로 바친 피를 역으로 불러내서 수혈해 왔지만, 그것도 한계에 봉착한 모양이다.
“키키. 여기서는 안 죽어.”
눈을 희번덕거리는 정신호.
동시에, 줄어들던 마력이 다시 한번 증폭되었다.
[커럽티 블러드]
사용자의 피를 바토리의 가호와 동기화시켜서 능력치를 증대시키는 행위.
C급이라고는 하나, 성좌의 힘으로 육신을 개변시키는 만큼 부작용도 많은 스킬이다.
정신호가 지닌 비장의 수단.
회귀 전에는 커럽티 블러드를 사용해서 폭주 상태로 돌입.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 피를 빨아들였다.
“여긴 피를 빨 사람이 없네?”
난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폐건물.
놈이 피를 빨 생물체가 없는 전장이다.
“키키키. 너, 나중에, 죽여 주마.”
몸을 돌리는 정신호.
저 상태로 이성을 유지하다니.
바토리를 역으로 잡아먹고 성좌가 될 만큼의 재능이다.
놈은 지면을 차더니 전장을 빠르게 이탈했다.
피를 빨아서 힘을 회복하거나 몸을 숨기려고 하겠지.
정신호가 전자를 선택하면 무고한 인명 피해로 벌어질 거다.
내 능력으로는 커럽티 블러드로 능력치가 증대된 정신호를 따라잡을 수 없다.
“닉스.”
-알겠노라.
[밤의 축복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모든 능력치가 40% 상승합니다.]
[버서크를 사용합니다.]
[근력과 민첩이 30% 증가합니다.]
닉스의 축복이 스며드는 타이밍에 맞춰 버서크를 발동했다.
근육 한 올 한 올에 스며드는 막대한 힘.
운류보와 전력 질주를 동시에 펼치면서 정신호의 뒤를 쫓았다.
놈과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진다.
“어, 어떻게?”
“도망도 못 치는 머저리였군.”
“누가 머저리라는 거냐!”
도주하던 정신호는 내 도발에 이성을 놓았는지, 달리던 중에 몸을 홱 돌렸다.
효과 확실하네.
[블러드 버스트]
전신을 휘감았던 피가 일점으로 집중된다.
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
육감이 경고음을 울리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퍼엉!
한 치 차이로 스쳐 지나가는 핏빛 구체.
정신호가 준비한 비장의 수단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키키?”
안 그래도 핏기가 사라진 놈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뒤이어 손에 피를 집중시킬 때.
나는 정신호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달려들면서 낮게 도약.
혈조공 3초식, 폭풍맹호조를 펼쳤다.
회전하면서 생긴 힘으로 정신호의 가슴팍을 후려치자.
쩌어억- 몸통의 살과 근육이 찢어지면서 하얀 갈비뼈가 드러났다.
“내 장밋빛 미래가…….”
“장밋빛이랑 핏빛은 명도 차이야, 새끼야.”
힘껏 말아 쥔 왼손을 뒤로 젖혔다가.
[괴력을 사용합니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서 뼈가 드러난 가슴팍을 후려쳤다.
힘껏 뛰던 심장이 괴력으로 강화된 주먹에 터져 버리고, 녀석의 몸에 있던 피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끄…….”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바닥에 쓰러진 정신호.
“너는 억울해할 가치도 없다.”
난 싸늘한 눈빛으로 놈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