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나는 여태까지의 수사 기록을 확인했다.
수원과 화성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실종 사건.
이 시기면 놈의 아지트는…….
-그대여, 괜찮은가?
“아. 괜찮고 말고 할 건 없는데.”
-살의로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로 그리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그야말로 흉신악살이었다.
이러니까 닉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은 거였군.
“……미안.”
나는 짧게 사과했다.
-여가 그대를 지켜본 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나 화가 난 건 처음 보느니라.
“이 녀석, 아주 씹어 먹을 놈이거든.”
-붉은 파편에서 성좌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다만. 그와 관련된 일이더냐?
“응. 이 돌조각은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흔적이야.”
C급 성좌.
바토리 에르제베트.
피로 목욕을 한 마녀답게, 악(惡) 계열에 속한 악랄한 성좌다.
바토리를 수호성으로 둔 플레이어는 주기적으로 피를 공양하거나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체 능력에 페널티가 오는 건 기본이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정신이 붕괴되기까지 한다.
-성좌라는 존재가 어찌 그런 천박한 짓을 시키는 것이더냐!
닉스가 분개했다.
“그야 악 계열 성좌니까.”
규칙을 비틀고 혼란과 공포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
악 계열로 분류된 성좌들의 특징이다.
바알, 로키, 그리고 세트.
악 계열 성좌를 대표하는 신들의 면면을 보면 감이 오잖아?
-그렇다 한들, 제물 공양은 너무 질이 낮지 않느냐.
“그 녀석의 급이 낮아.”
바토리는 전 세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엽기적인 행각 덕분에 성좌가 되었다.
하지만 성좌 본연의 힘은 약한 편.
그 때문에 수호성 계약을 맺은 플레이어에게 줄 수 있는 힘도 크지 않다.
“피 공양을 하면 플레이어의 마력을 늘려주든 할 거야.”
회귀 전.
정신호가 범죄를 저지른 이유였다.
-참으로 끔찍하고 저열하구나.
혐오감을 드러내는 닉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제물을 바치는 식으로 부여하는 바토리의 가호.
그 방식은 역으로 바토리라는 성좌를 찌르는 칼이 된다.
피 공양으로 힘과 ‘격’을 모은 정신호.
그는 제물 공양으로 이어진 수호성, 바토리를 집어삼키고는 지구에 현현한 성좌가 되어 버린다.
‘피의 금요일’이라고 명명된 사건.
성좌를 집어삼킨 정신호는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 수많은 플레이어들과 민간인을 살해한다.
그렇다면, 놈이 폭주하기 전에 싹을 잘라 내야지.
회귀의 여파로 생겨난 여러 가지 변화.
탑의 동기화를 앞당기는 부정적인 일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긍정적인 변화가 될 것이다.
* * *
수원과 의왕을 오가는 널찍한 도로.
그 옆으로 빠져서 5분 정도 걸으니 허름한 민가가 보였다.
-여는 저 건물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구나.
“기척을 감추는 데 능한 성좌라서 그럴 거야.”
플레이어 협회에서 조사에 난항을 겪을 만했다.
나처럼 답안지를 알고 찾아오는 경우는 생각도 못 했겠지.
“이왕이면 확실한 게 좋으니까.”
나는 초음파를 사용했다.
폐가를 훑는 고주파.
직접 보지 않아도 내부 구조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두 눈을 감은 채, 초음파에 집중하던 중.
“정답이군.”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대의 눈동자에서 거센 분노가 일렁이는구나.
“안에 애들이 있어.”
닉스의 얼굴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천인공노할 것!
“여신님, 지금은 분노를 가라앉혀 줘.”
짧게 심호흡을 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식혀 주니, 이글거리는 분노가 사그라진다.
마침 해가 산자락 너머로 넘어가더니, 짙은 땅거미가 지면 위로 깔렸다.
[밤의 걸음을 사용합니다.]
[희미한 빛이 남아 있습니다. 밤의 걸음의 효율이 28% 감소합니다.]
내 몸뚱이가 어둠에 동화된다.
어두운 곳에서만 전개가 가능한 은신 스킬.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얻은 반지, [밤의 장막]의 내장 스킬이다.
-호오, 이렇게 하면 은밀하게 기동할 수 있겠구나.
“제한이 많지만, 쓸 만해.”
3성급 스킬.
어둠에서만 쓸 수 있다는 제약이 걸린 만큼, 은신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대여. 어둠이라는 게, 빛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더냐?
“정확히는 내 몸이 빛에 노출되면 안 돼.”
-하면 극야로 몸을 휘감아도 효과가 있지 않겠느냐.
잠깐만.
“그 방법이 있었네.”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닉스의 조언에 감탄했다.
-후후훗, 여의 지혜가 어떠느냐!
“여신님은 정말 최고야.”
스스슷! 극야의 힘으로 전신을 감쌌다.
한층 더 진해진 어둠.
[사용자의 전신이 어둠에 뒤덮였습니다.]
[밤의 걸음이 완벽하게 발동됩니다.]
모습을 완전히 감춘 채, 폐가로 접근했다.
반쯤 부서진 채로 열려 있는 문.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먼지.
누가 봐도 방치된 지 오래된 집이다.
-이상하구나. 그대의 말대로라면 흔적이 남아 있을 터인데.
“그거야 바토리의 권능으로 가려 놨지.”
난 벽에 있는 창틀을 가리켰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박혀 있는 붉은 돌들.
바토리의 가호다.
닉스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하면 저 위에 있는 것이더냐?
“거기가 아니야.”
나는 폐가 바닥을 바라보았다.
환술로 눈을 현혹시키더라도, 공간의 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바닥으로 이어지는 길.
[초음파]는 작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폐가 아래에 숨겨진 지하실을 발견했다.
[독수리의 눈을 사용합니다.]
이 정도까지 접근했으면 마력을 읽어 내는 것쯤은 가능하겠지.
‘눈’은 속일지라도, 그 안에 깃든 마력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바닥에 아른거리는 붉은 아우라.
[상대가 당신보다 강합니다.]
놈은 아래에 있다.
“다행이군.”
-무엇이 말이더냐?
“외출했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거든.”
손님 된 입장으로 찾아왔으니 노크를 해야겠다.
[괴력을 사용합니다.]
말아 쥔 손으로 바닥을 후려쳤다.
콰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쌓여있던 먼지가 비산했다.
[피의 은신처가 해제됩니다.]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붉은 기류가 폐가를 훑고 지나간다.
바토리의 가호.
피의 은신처가 깨진 것이다.
-설마하니 여의 감각마저 속일 줄이야.
닉스는 경악과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환혹 결계가 깨어지자, 폐가 곳곳에 남은 사람의 흔적이 드러났다.
발자국 여러 개.
먹다 남은 커피가 말라 버린 자국.
그 외에도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이 여럿 드러났다.
“어떤 놈이 이딴 짓거리를 했어!!!”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고성.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뜨린 30대 남자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뱉으면서 위로 올라왔다.
정신호. 회귀 전에 자료 화면으로 봤던 것과 동일하게 생긴 사내다.
“나다, 이 새끼야.”
“넌 뭔데!”
“플레이어 협회 특무대 소속, 유진호.”
“협회라고?”
정신호의 눈가에 경계의 빛이 서렸다.
내가 죄목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한판 벌일 분위기다.
어린아이들을 납치했으니 찔렸겠지.
“나와서 한판 붙자.”
“킬킬. 올라오는 중에 덮칠 줄 누가 알고?”
“애들이 아래에 있잖아.”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궁금하면 네놈이 직접 힘으로 물어보시지.”
난 오른손을 까딱였다.
-과연 여의 계약자이니라. 아이들이 위험할 것을 고려하여 유리한 고지를 포기하는구나.
글쎄요.
내가 고지 선점이라는 이점을 포기한 건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서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이 있으면 힘을 쓰는 게 맞잖아?
멸망의 시대에서는 부릴 수 없는 여유.
나는 폐가 밖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올라와라.”
“킬킬. 재밌는 놈이네.”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올라오는 정신호.
뚝- 뚝- 핏방울이 쭉 뻗은 손가락 아래로 떨어진다.
-상처를 입은 것 같구나.
“아냐. 저건 놈의 전투 방식이다.”
바토리의 가호는 ‘피’를 다루는 능력이다.
[블러드 네일]
핏방울이 정신호의 손가락에 맺힌다.
갈고리 형태로 변하는 피.
맺힌 피로 만들어진 손톱 위로 섬뜩한 예기가 감돌았다.
-그대의 손톱과 비슷하구나.
“저런 거랑 비교하니 기분이 안 좋은데.”
난 손을 휘휘 저었다.
그걸 본 정신호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더니.
“여유가 넘치는군. 벌레 새끼가!”
성난 기세로 달려들었다.
자료대로군.
바토리를 수호성으로 섬기면 여러 후유증이 생긴다.
피 공양.
거기에 성격이 조급해지는 건 옵션이다.
“이건 뭐, 제대로 도발한 것도 아닌데 흥분해 버렸네.”
난 정신호를 마주한 채로 지면을 박찼다.
[맹렬한 돌진을 사용합니다.]
삽시간에 좁혀지는 거리.
놈이 달려와 준 덕에 맹렬한 돌진의 간격을 맞추기가 더 쉬워졌다.
나는 미식축구 선수처럼 어깨를 추켜세운 채로 돌진했다.
충돌하기 직전.
“갑자…….”
놈은 당황한 듯 말하면서도 착실하게 반격했다.
원위치를 벗어난 핏빛 갈고리.
정면으로 해방된 손톱이 내 몸을 두들긴다.
맹렬한 돌진의 페널티는 5초 경직.
피할 수는 없다.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42% 감소했습니다.]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37…….]
1/3 이상 깎여 버린 갑피 내구도.
역시나.
[독수리의 눈]이 붉은색을 띨 만한 상대다.
이 정도면 할 만해.
나는 갑피 너머로 전해지는 충격을 무시하고 정신호를 들이받았다.
콰아앙!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뒤로 쭉 밀려나는 정신호.
새하얗게 질린 게, 맹렬한 돌진을 받아 낸 충격이 꽤 큰 모양이다.
“커흑.”
“왜. 몸이 잘 안 움직여?”
2초 경직.
맹렬한 돌진에 붙은 옵션이다.
정신호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을 때, 나는 정신호와의 거리를 재차 좁혔다.
툭 튀어나온 손톱을 [탐욕의 가호]로 강화.
굳어 버린 정신호의 몸통을 할퀴었다.
서걱! 피부가 찢기고 근육이 파열되었다.
현생에서는 처음으로 펼치는 살수.
망설임 따위는 없다.
회귀 전에는 이보다 수백 배 지독한 곳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으니까.
“크아아!”
정신호는 경직이 풀리자마자 고통 섞인 비명을 토해 내더니 자신의 피를 마구 뿌렸다.
언뜻 보기에는 광인(狂人) 같은 행동.
난 뒷걸음치며 거리를 벌렸다.
[블러디 피어스]
송곳 형태로 변한 핏방울들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바토리의 마력으로 강해진 피.
근거리에서 저걸 다 맞았다가는 갑피가 너덜너덜해질 게 뻔했다.
스스스슷!
극야를 장벽 형태로 구현.
쏟아지는 핏방울들을 막아 냈다.
1초도 안 돼서 깨지는 어둠의 장벽.
나는 연달아 장벽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정신호의 공격을 막았다.
극야의 힘이 소진되는 건 상관없었다.
여태 레벨이 오를 때마다 얻은 능력치를 모조리 극야에 투자했다.
거기에, 지금은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드리웠다.
[하늘에서 태양의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밤의 축복이 활성화됩니다.]
빠르게 회복되는 극야.
[밤의 축복] 덕에 소모된 극야의 힘도 금세 회복되니, 지구전에서는 질 일이 없다.
“이번에는 네 뜻대로 안 될 거다.”
나는 작게 뇌까리면서 정신호를 밀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