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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55화 (55/300)

55화

“이, 이건 대체 뭐다냐.”

노움 상인 모르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전투.

아니.

“오크가 학살당하고 있어.”

모르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쭉 튀어나온 손톱이 허공을 가를 때면.

서걱- 여지없이 오크의 목숨이 하나 사그라진다.

바닥에 나뒹구는 오크들의 사체.

길게 새겨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지면을 녹색으로 물들였다.

“쿠르륵!”

오크들도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전사의 종족.

바벨탑에게 멸망당한 후, 이성을 거세당한 노예가 되었어도 용맹함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은 괴물!

오크의 용맹함은 노움 사이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다.

[풀스윙]

[본 크러셔]

온갖 기술들을 사용해서 진호를 노리는 오크 무리.

멀리서 지켜보는 모르스가 보기에도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

“위, 위험…….”

모르스는 뒷말을 삼켰다.

한 치 차이로 오크들의 공격을 흘려 내는 진호.

쾅! 묵직한 워 해머가 헛되이 땅을 쳤다.

다른 공격들도 마찬가지였다.

허공을 가르거나, 피로 젖은 지면을 후려쳤다.

간혹 오크의 단창이 진호의 빈틈을 파고들기도 했지만.

카가각!

피부를 뒤덮은 갑피를 긁는 데 그쳤다.

‘우연일까?’

그럴 리가.

모르스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막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탑의 상인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플레이어들을 봐 왔다.

적어도 보는 눈 하나만큼은 일류 전사에 비견된다고 자부했다.

그렇기에.

‘저 고객님은 오크들의 움직임을 다 읽어 내는 거야.’

진호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음을 이해했다.

스펙 차이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다.

진호와 오크의 능력치 차가 크긴 해도, 20 대 1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좋잖아?

문득 진호가 던진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훅 올라왔다.

‘고객님한테 외상을 운운했으니. 얼마나 웃겼을까?’

한편으로는 기뻤다.

탑의 기록만 보고 덜컥 전속 계약을 맺었는데, 아무래도 그 판단이 옳았다.

“쿠르륵…….”

마지막 오크가 피거품을 물면서 바닥에 고꾸라졌다.

전장에서 두 발을 땅에 딛고 선 사람은 진호뿐.

그는 등을 돌려서 모르스를 올려다보았다.

“어때. 이 정도면 신뢰가 가나?”

“고객님의 능력을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의심은 무슨. 내 가능성이 어떤지 한 번은 보여 줘야지.”

크크, 웃음을 터트리는 진호.

모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 오크들의 시체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손을 비비는 모르스.

오크 가죽은 무두질을 잘 하면 쓸 만한 경갑으로 만들 수 있다.

“쓸 데가 있어.”

“그러지 마시고 저한테 맡겨 주시면…….”

“못 맡겨.”

진호는 바닥에 널브러진 오크의 시체에 손을 얹었다.

드드드드!

부풀어 오른 오크의 근육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진다.

근육 다음으로는 피부의 윤기가 사라지고, 이내 앙상하게 마르더니 가루로 변해 버렸다.

표현은 길었지만, [포식] 과정은 불과 1초 만에 이루어졌다.

동그랗게 뜨인 모르스의 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고객님!!”

“포식. 내 능력의 근간이다.”

“서, 설마. 다른 오크들의 사체도 모두 먹어 치우실 생각은…….”

“당연하지.”

모르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괴물의 사체는 탑 안에서도 꽤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된다.

각종 촉매.

아티팩트의 재료 등.

상회 소속 상인들은 미션 수행 중인 플레이어들에게 부산물을 구매, 가공해서 판매했다.

그런데.

“오크 사체를 가루로 만들면 전 뭘 먹고 삽니까!!!”

“그거는 네가 고민해야지.”

진호는 나머지 오크들의 사체도 모두 포식했다.

* * *

가루로 변한 오크들의 사체.

50% 조금 넘게 찼다.

웨이브의 횟수는 모두 5번, 정수 수집에 문제는 없을 터.

나는 미션 현황을 살펴보았다.

[좌 1문 - 872/1000]

[우 1문 - 1000/1000]

-여가 보기에는 좌측이 위험한 듯하구나.

“그러게. 의외군.”

왼쪽 길목에는 5명, 오른쪽에 4명을 배치해 두었다.

이론상으로는 좌측 요새의 방어가 더 튼튼해야 하는데…….

“삶이라는 것이 이론만으로는 안 되더라고.”

-꼭 오래 산 노인처럼 말을 하는구나.

글쎄요.

회귀 전까지 포함하면 노인까진 아니어도 인생을 논할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아무튼 잘됐어.”

-갈 것이더냐.

“그래야지.”

[운류보를 사용합니다.]

내공이 혈맥에 스며들자,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운류보의 걸음 방식에 맞춰서 내디디니 주변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한데 중앙 요새를 비워 두어도 괜찮으냐?

“웨이브는 세 방향의 오크 군대를 모두 쓰러트려야 끝나.”

휴식 시간은 5분.

오크들을 쓰러트리고 돌아오기까지 충분했다.

길목 사이에 난 샛길을 걷다 보니, 날카로운 금속음이 귀에 아른거렸다.

샛길을 벗어나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전투 장면.

“빌어먹을 오크들.”

“거기! 문 안 뚫리게 오크들 관심 좀 끌어 줘요!”

“오크의 힘이 너무 세……!”

좌측 문에 투입된 플레이어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쓰러진 오크의 숫자는 셋.

남은 일곱은 도끼나 글레이브를 꼬나 쥔 채로 신들린 듯이 휘둘렀다.

파이어볼은 안 되겠군.

오크 무리와 플레이어들이 한데 섞여 있어서 자칫하면 아군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그대에게는 아군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만.

“내가 중앙 길목의 오크들을 정리할 때까진 버텨 줘야 하잖아.”

-후후훗, 과연 여의 계약자다운 발언이니라.

미션 보상의 질을 올리려면 3방향에 있는 요새를 모두 지켜야 한다.

귀찮지만 별수 없지.

[맹렬한 돌진을 사용합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돌진 궤도에 있던 오크 한 마리가 산산조각 났다.

“유, 유진호 플레이어?”

“어떻게 여길?!”

“중앙 요새는 어떻게 하고요!”

그렇게 떠들 시간이 있으면 오크한테 칼이나 한 번 더 휘두르지.

초짜들은 이래서 안 된다.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발밑에서 솟구친 어둠 자락이 오크들을 튕겨 낸다.

그중에는 자세가 무너진 플레이어의 머리 위로 도끼를 휘두르던 오크도 있었다.

“죽는 줄 알았는데.”

하얗게 질린 플레이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미션을 함께 해야 할 소중한 전력들.

약해 빠지긴 했어도 시간 정도는 벌어 줄 친구들이니 최대한 오래 살려 둬야지.

“쿠르륵. 사술이다.”

“쿠륵, 전사답지 못하다.”

오크들은 길게 늘어뜨린 어둠 자락을 쳐 냈다.

극야 자체가 분쇄된 건 아니라 힘이 소진되지는 않았다.

“이틈에 태세를 정비해요.”

나는 뒤를 힐끗거렸다.

“감사합니다.”

“유진호 플레이어님 덕분에 살았어요!”

전장에서 물러나는 플레이어들.

가만히 있어 봐야 짐이 될 뿐이니, 차라리 빠지는 게 도움이 되었다.

한데.

닉스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가…… 감히!

“무슨 일이야?”

-저 치들이 여의 권능을 사술이라고 폄하하였느니라!

아, 오크가 한 말이 신경 쓰였구나.

뭐, 이성 없는 짐승의 눈으로는 권능의 영역에 맞닿은 극야를 알아볼 리 없잖아.

-계약자여, 불경한 자들에게 여의 권능, 극야의 위대함을 깨우쳐주어라!

“예예. 명대로 합죠.”

아무래도 극야로만 남은 오크들을 쓰러트려야 여신님의 분노가 사그라질 것 같다.

독주머니를 따면서 감도가 어느 정도로 올라갔는지 시험해 볼 기회군.

나는 극야를 조종.

기다란 칼날 형태로 구현했다.

“이건 튕겨 낼 수 있을까?”

정면으로 날아드는 암흑 칼날 다섯 자루.

오크가 호기롭게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쿠륵! 사술, 안 통한다.”

일반적인 전투에서는 극야의 힘을 보조로 사용한다.

견제나 빈틈을 유도, 혹은 파고드는 정도.

포식으로 흡수한 능력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만 해도 집중력을 많이 소모하기에, 상대적으로 극야의 힘을 다루는 데 덜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극야의 힘에만 집중할 수 있으면 이야기가 다르지.

스스스슷!

암흑 칼날이 오크의 글레이브를 피해서 안으로 파고들었다.

푹- 푸푹- 시커먼 칼날들이 오크의 몸뚱이에 박힌다.

“쿠르…….”

발버둥을 치는 오크.

근육이 단단해서 단번에 숨통을 끊진 못했다.

“버텨 봐야 고통만 길어질 텐데.”

몸을 꿰뚫은 극야의 힘을 세분화, 상처 안으로 파고들게 하고는 가시 형태로 구현했다.

오크의 눈동자가 왕방울만 해졌다.

“쿠륵!!!”

“근육을 키워도 내부까지 단련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놈의 내부를 헤집어놓은 뒤.

극야를 다시 한번 칼날 형태로 구현, 빈사 상태가 된 오크의 숨통을 끊었다.

“쿠륵! 죽인다!”

“쿠르륵. 사술 못 쓰게 해라.”

오크 무리가 살기등등한 기세로 들이닥친다.

신체 능력을 활용하면 금방 정리 가능한 숫자이지만.

닉스의 부탁도 있겠다.

[어둠 지배]만으로 오크들을 상대했다.

채애앵!

암흑 방벽이 오크의 도끼를 왼쪽으로 흘려보낸다.

-1층에서 석궁을 튕겨 낸 기예로구나!

도탄이랑 근거리 공격을 빗겨나게 하는 원리는 좀 다르다만…….

힘을 흘려 내는 과정을 닉스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그저 웃었다.

과하게 힘을 줬는지 비틀거리는 오크.

“빈틈.”

암흑 칼날이 훤히 드러난 오크의 가슴팍을 찔렀다.

채찍과 칼날, 혹은 방벽 형태로 끊임없이 변하는 극야(極夜).

그야말로 공방일체의 힘이다.

나는 극야를 자유자재로 다루어서 오크들을 농락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괜히 나서다가 다치지 말고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십쇼.”

난 손을 휘휘 저었다.

끼리릭, 퉁-!

요새 위에 설치된 석궁이 화살을 발사했다.

기진맥진한 오크의 급소를 향해 쏘아진 화살촉.

“내 먹잇감이다.”

스스슷!

극야를 방패 형태로 구현, 화살을 튕겨 냈다.

앞으로는 살기등등한 오크들을 상대해야 하고.

등 뒤에서 (오크들에게) 날아드는 화살도 튕겨 내야 했다.

양쪽을 모두 신경 쓰고 있자니, 극야를 다루는 감각이 조금씩 벼려졌다.

“이 정도면…… 극야의 출력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아.”

원래 구현할 수 있는 극야의 총량은 5 스텟.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실전에서 극한까지 집중을 한 덕분일까.

구현 가능한 극야의 힘이 0.5가 늘어났다.

닉스처럼 힘을 더 세분화하는 건 어렵지만, 구현한 힘의 가닥들의 출력을 조금 더 늘릴 수 있었다.

0.1이라.

수치로만 놓고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전투에서는 사소한 변수 하나가 큰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에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쿠륵! 버겁다.”

암흑 칼날을 쳐 낸 오크가 피로감을 호소했다.

“네놈들 덕에 극야를 다루는 능력이 향상되었군.”

나는 히죽 웃었다.

오크가 한 마리라도 남아 있는 한, 다음 웨이브는 시작되지 않는다.

미션 점수의 핵심은 킬 카운트.

시간은 넉넉하다.

-아직 멀었도다. 그대가 미숙하다보니 저 치들이 여의 권능을 놓고 사술이라고 하지 않더냐.

닉스는 토라진 척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럼 지금부터 안 씁니다?”

-아, 아니니라! 여가 보기에는 충분히 훌륭하니라.

본전도 못 찾을 말을 왜 하시는지 몰라.

“저 스킬. 유진호 플레이어의 고유 능력일까?”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겠어.”

“저러니까 튜토리얼부터 기록을 갈아치웠구나.”

뒤에서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극야.

형태를 수시로 바꾸는 어둠의 힘을 보면 놀랄 만도 하지.

“쿠륵! 쿠륵!”

“쿠르륵. 악마다!”

그 뒤로는 오크들의 비명 소리와 절규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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