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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54화 (54/300)

54화

[바벨탑 - 4층]

[크루지스 고원에 입장했습니다.]

[미션 - 세 갈래 방어전]

아지스탄의 오크들은 크루지스 고원을 호시탐탐 노리는 중입니다.

고원으로 향하는 길은 셋.

각 길목에 위치한 요새를 지키면서 오크 군대의 진격을 저지하십시오.

▶ 목표: 최소 1개 이상 요새 방어.

4층 미션 장소는 크고 작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악 지대다.

전이된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서로를 확인한다.

“당신, 혹시 유진호 플레이어 아닌가요?”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나를 가리켰다.

벌써부터 날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네.

“유진호라면 3층까지 기록을 싹 갈아치운 플레이어?”

“와, 이번 미션은 업혀 가겠네.”

다른 플레이어들도 사내의 말에 동참했다.

9명의 주목을 받는 상황.

이런 분위기, 미션을 수월하게 진행하려면 아주 좋은 상황이다.

-여의 계약자라면 타인의 주목을 받는 게 당연한 것이니라.

“예이, 예이.”

닉스의 말을 대충 넘긴 후, 팀원으로 매칭된 플레이어들을 바라봤다.

“알아봐 주니 이야기가 빠를 것 같군.”

“이야기요?”

“중앙 길목은 나 혼자 막겠습니다.”

세 갈래 방어전.

4층 미션은 그 이름대로, 세 갈래 길로 올라오는 오크 군대를 막아 내는 게 핵심이다.

●: 오크 리스폰 지역

┃: 진격 방향

◈: 요새

→: 샛길(플레이어만 이용 가능)

좌·우측 플레이어는 이동 불가.

중앙에 배치된 플레이어만 양쪽을 오갈 수 있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중앙 길목으로 몰려드는 오크 군대는 좌우의 공세를 합친 숫자와 동일하다.

그러니까, 두 배란 말이지.

“혼자 두 배 물량을 막겠다고요?”

“아무리 신기록을 갈아치운 플레이어라고 해도…….”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닙니까?”

플레이어 일동은 내 말에 반발했다.

하긴,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일반적인 4층 공략법은 중앙에 전력을 밀집, 몰려드는 오크 군대를 물리치고 좌우로 지원을 나가는 형식이다.

팀의 평균 전력이 모자라면 좌·우 길가를 포기.

중앙이라도 지킬 수 있어서다.

오크의 물량이 많은 만큼, 수비군에게 이점을 부여하는 요새가 3개나 배치되어 있으니.

만약에 중앙 길목이 허무하게 무너지면 80% 정도는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뭐, 맨입으로 그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닙니다.”

나는 손가락에 낀 반지 중 하나를 뺐다.

탐식의 입.

바알한테서 받은 레전드 등급 반지다.

“만약 요새가 하나라도 넘어가면 이 반지를 드리죠.”

[탐식의 입]의 정보가 기재된 반투명한 창이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레, 레전드?!”

“진짜 레전드 아이템이라니.”

“유진호 플레이어, 어느 길드에도 안 속한 거 아니었나?”

“집이 부자일 수도 있잖아.”

수군거리는 플레이어들.

하긴.

레전드 등급 아이템을 튜토리얼이나 탑 저층에서 얻었다고 생각하긴 어려울 거다.

“모르스, 나올 수 있나?”

-가능합니다.

지이잉!

공간을 가르면서 나타난 상인.

노움, 모르스는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인사를 했다.

“부르셨습니까, 유진호 님.”

“탑의 계약서 하나 살 수 있지?”

“30cp입니다.”

“더럽게 비싸군.”

cp를 지불하니, 모르스가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물건이나 내놔.”

“예이.”

모르스는 주머니에서 누런색 양피지를 꺼냈다.

[바벨탑의 계약서]

등급: 매직

분류: 잡화

내구도: 1/1

바벨탑의 시스템을 공증인 삼아 계약을 진행하게 해 주는 양피지입니다.

계약 내용은 달성·미달성 시 자동적으로 이행되니 신중하게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난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내용을 채워 넣었다.

-중앙 요새가 하나라도 함락 시, [탐식의 입]의 지분을 다른 팀원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줄 것.

-유진호가 중앙 요새를 모두 지켜 냈을 경우, 팀원들은 30cp씩을 지불할 것.

“이 정도면 믿음이 가죠?”

팀원들은 계약서를 훑어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진짜야. 빠져나갈 틈이 없는 계약이다.”

“탑의 계약서는 반드시 이행되잖아.”

“중간에 접속을 끊는 것도 방법이지만, 다시 탑에 접속하면 강제집행이니까.”

“손해 볼 건 없겠는데? 30cp가 아깝긴 해도…….”

플레이어들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눈빛.

내가 요새를 지킬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분위기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계약하겠습니다.”

“저도 믿어 볼게요.”

날 믿는 게 아니라 탐식의 입이 탐나는 거겠지.

“믿어 주시니 고맙군요.”

한쪽 입술만 말아 올리면서 그들의 신뢰(?)에 화답했다.

-그대의 웃는 모습이 꼭 말라비틀어진 꽃을 보는 것 같구나.

한숨 섞인 닉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감돌았다.

* * *

중앙 1요새.

5미터 높이의 벽이 고원으로 진입하는 길을 틀어막은 형태다.

벽 위에 배치된 석궁 5문.

오크가 사거리 안에 들어오면 자동으로 발사하는 마법의 석궁이다.

“저, 유진호 님.”

“너는 아직 안 돌아갔냐?”

뒤따라온 모르스가 요새를 가리켰다.

“헤헤, 혼자서 막기는 버겁지 않으시겠습니까.”

“말 돌리지 말고.”

“점수를 소모하면 요새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4층 미션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오크를 사냥하느냐다.

그렇기에, 오크를 사냥해서 얻은 점수를 차감하면 미션에 도움이 되는 버프나 요새를 강화하는 게 가능하다.

“난 빈털터리인데?”

“고객님을 위해서 외상 정도는 가능하죠.”

“네 마음만 받을게.”

“그러다가 정말로 계약서대로 반지를 양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막을 자신이 없으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 했어.”

진심이다.

나는 앞으로 탑을 올라가면서 모든 기록들을 갈아치워야 한다.

오크들 따위.

얼마든지 상대해 주지.

“정 궁금하면 벽 위에서 지켜봐라.”

등 뒤에 있는 요새를 가리켰다.

“그래도…….”

“전속 계약을 맺은 플레이어의 실력.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좋잖아?”

“그런 이야기는 계약 전에 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입술을 내민 채, 요새로 올라가는 모르스.

-저치는 아직 계약자의 진면목을 잘 모르고 있구나.

“이젠 알게 될 거야.”

자신이 어떤 존재와 전속 계약을 맺었는지.

또한, 외상 같은 얄팍한 수법으로는 나한테 물건을 팔 수 없다는 것까지도 말이야.

[아지스탄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새를 보호하면서 오크들의 공세를 막아 내십시오.]

[1차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시스템의 안내가 끝나기 무섭게, 고원 아래쪽이 시끌벅적해졌다.

“쿠륵, 쿠륵.”

“요새, 부순다.”

2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신장.

초록색 피부에 왕방울만 한 눈, 그리고 보디빌더를 연상시키는 근육질 몸매가 도드라진다.

오크.

초보 학살자라고 불리는 괴물 20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호라. 저치들, 근육이 꽤 탄탄하구나.

“저런 게 여신님 취향인가?”

-무엄하도다! 감히 세 치 혀로 여를 능욕하려드느냐!

“별말 안 했는데요?”

닉스와 떠들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붉은 보석에 집중되는 마나.

이윽고, 반지에 맺힌 화염구를 오크 무리에게 투척했다.

콰앙-! 매캐한 연기가 전방 수 미터를 검게 물들였다.

-해치웠느냐?

“그렇게 허약한 놈들이면 걱정도 안 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에 화답하듯, 오크 무리가 연기를 뚫고 앞으로 돌진했다.

“쿠르륵!”

“저 인간, 먼저 사냥한다.”

사망 1. 부상 5.

폭발의 중심부에 있던 놈만 죽었고, 나머지는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1층에서 본 작은 것들보다 훨씬 튼튼하구나.

“고블린보다 훨씬 세지.”

-저 근육이 폼은 아닌 모양이로구나.

“오크 한 마리가 고블린 10마리를 상대할 수 있으니까.”

그것도 독침을 사용했을 때의 경우.

순수 피지컬만 놓고 보면 20마리가 몰려와도 오크를 이길 수 없다.

정상적인 공략은 요새의 화력 지원을 받으면서 오크 무리를 격퇴하는 거지만.

[전력 질주를 사용합니다.]

굳이 공략대로 할 필요가 있나?

두 발로 지면을 박차니,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거긴 석궁의 사거리 바깥이에요!”

등 뒤에서 모르스의 외침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석궁한테 킬 카운트를 뺏길 수는 없잖아?

“쿠르륵!”

선두의 오크가 허리께에 걸어 둔 도끼를 쥐었다.

빙그르르-.

원을 그리면서 날아드는 도끼.

피하는 건 간단하지만.

그게 저 오크의 노림수다.

첫 공격은 다음을 위한 시간 벌기.

나머지 오크들이 투척 준비를 끝낼 수 있게 하려는 위협사격.

그렇기에.

피하지 않고 날아드는 도끼를 혈조공으로 쳐 냈다.

“쿠륵!”

“왜. 생각한 대로 안 풀리나?”

나는 막 도끼를 던진 오크에게로 짓쳐 들었다.

[맹렬한 돌진을 사용합니다.]

오크가 코 평수를 넓힌 채로 양팔을 휘둘렀지만, 허둥거리는 공격이 나한테 닿을 리 없었다.

콰앙!

치켜세운 어깨로 오크를 들이받자, 폭음과 유사한 소리가 났다.

[맹렬한 돌진]으로 강화된 힘을 고스란히 받은 오크의 몸뚱이가 수십 갈래의 육편으로 화했다.

비산하는 살점과 핏물.

경직 효과를 체험하기는 틀렸군.

“쿠르륵!”

오크 무리가 분개하면서 달려들었다.

글레이브, 단창, 양날 도끼 등.

전투에 특화된 종족답게 여러 무기로 나를 공격했다.

“몸풀기도 안 되겠군.”

육감에 의지하지 않아도 훤히 보이는 공격 패턴.

쏟아지는 공격 가운데에서 틈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팅!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러 주는 것만으로 한 오크의 무기 궤도를 틀어 버렸다.

“쿠르륵?!”

홱 틀어진 도끼가 다른 오크에게로 향했다.

동족에게 공격을 받은 오크.

놈은 쭉 뻗었던 창을 회수해서 도끼를 막아 냈다.

오크들의 공격 궤도를 살짝 틀어 주는 것만으로, 합동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공격 궤도와 힘, 그리고 속도를 모두 계산해서 쳐 낸 것이로구나!

감탄 섞인 닉스의 음성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난 대꾸해 주는 대신, 오른손으로 혈조공 첫 초식을 펼쳤다.

맹호혈조.

손톱을 사선으로 긋자, 초록색 피가 한 박자 늦게 솟구쳤다.

토막 나 버린 오크의 사체.

무두질을 한 가죽 갑옷조차도 내공이 더해진 손톱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쿠륵!”

한 오크가 거친 숨소리를 토해 내더니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참수]

칼날에 아른거리는 붉은 기운.

목을 노리는 스킬이다.

저 검격은 쳐 내는 정도로는 궤적을 틀기 어렵겠는걸.

간격 밖으로 피하거나 반격을 하자니 기껏 잡은 공방의 주도권을 놓아줘야 했다.

“그건 좀 곤란하지.”

스스슷!

발밑에서 어둠이 솟구친다.

[극야]의 힘을 구현, 암흑 칼날 다섯 자루가 막 글레이브를 휘두른 오크를 노렸다.

채앵! 검 두 자루는 글레이브를 튕겨 냈고.

나머지 셋은 오크의 목덜미와 심장, 그리고 가랑이 사이를 푹 찔렀다.

“끄르르륵…….”

풀썩 주저앉는 오크.

목이랑 가슴팍은 막았지만, 가랑이 사이에 파고든 칼날까지 방어하는 건 무리였다.

목숨 대신 다른 걸 포기했네.

대단한 녀석이야.

-그대여, 다른 오크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몰아붙여야 하느니라.

예예. 알고 있습죠.

“걱정하지 마. 2분 안에 끝낼 테니까.”

츠캉!

쭉 늘어난 손톱을 곧게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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