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52화 (52/300)

52화

발아래에서 튀어나오는 창.

[백 스텝을 사용합니다.]

창날이 갑피를 스치고 지나간다.

뒤로 물러나서 창을 피했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연달아서 쏘아지는 화살들은 벽 형태로 극야를 구현, 그 자리에서 튕겨 냈다.

-그대여. 벽이 주저앉기 시작한다!

“알고 있어.”

민첩한 뒷발을 사용.

땅바닥을 박차면서 앞으로 쑥 나아갔다.

거기에 [전력 질주]를 운용해서 속도를 유지했다.

[라이트닝 볼트]

[창 함정]

벼락이 정수리로 떨어지고, 정면에서는 기다란 창이 매서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한발 먼저 위기를 감지한 육감의 경고.

오른손을 위로 향하자.

[마나 업소브를 사용합니다.]

새파란 번개가 검붉은 안개에 삼켜졌다.

그와 동시에 내공을 발산, 호미조로 창끝을 쳐 냈다.

힘없이 튕겨 나오는 창날.

완벽하게 힘을 분배해서 궤도를 틀어 버렸다.

통로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함정 공세도 거세졌지만, 움직임을 봉쇄하기에는 부족했다.

함정 위치가 무작위이긴 해도 나오는 종류는 정해져 있거든.

여태껏 흡수해 온 정수들의 능력을 활용하면 피해 없이 통과가 가능한 수준이다.

『올림포스의 군신이 당신의 몸놀림에 감탄합니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탐욕의 입을 전해 준 것에 흡족함을 드러냅니다.』

『하늘의 악이 무공의 성취와 활용도가 낮다며 아쉬움을 표합니다.』

『많은 성좌가 당신의 움직임을 주목합니다.』

아레스의 엄포 때문에 메시지를 보내지 못하는 성좌들.

천장 너머 만신전에서 여러 성좌들이 나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만 느껴졌다.

-후훗, 그대는 참으로 인기가 많구나.

“인기는 무슨. 한 번 삐끗하면 관심도 안 둘 성좌들이야.”

-여는 그대가 실수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만?

그거야 그렇지.

나는 빙그레 웃는 걸로 닉스의 말에 화답했다.

파죽지세로 함정들을 통과하던 중, 초록색 빛으로 감싸인 공간이 나타났다.

-이것도 함정인 게냐?

“아니, 중간 지점. 쉬어 가라고 있는 곳이야.”

난 현황판을 켰다.

[제한 시간 - 23:27:10]

중간 지점까지 33분이라.

“이번에도 기록 경신은 안 어렵겠어.”

-최고 기록이 몇 분이더냐?

“4시간 11분이네.”

-여의 계약자는 역시 다르도다.

닉스는 내 정수리로 뾰로롱, 하고 날아오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참. 저번에 머리를 만진 후, 틈만 나면 이러는군.

3층 중간 지점.

체력과 마나·내공 등 함정을 돌파하면서 소모된 것들을 회복시켜주는 공간이다.

이 장소에 머무르면 미션 시간도 흘러가지 않으니 마음껏 쉴 수 있다.

나야 소모한 게 없다 보니 쉴 것도 없다만.

체력과 마나는 대지모신의 가호와 용의 심장 덕에 넘쳐 났다.

돌파 중에 극야의 힘을 다소 소모했지만, 통로 곳곳을 물들인 어둠 덕에 금세 회복되었고.

내공은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해서 최대한 아껴 뒀거든.

“운기조식만 좀 해야겠군.”

제자리에 앉아서 삼재기공을 운용했다.

소주천(小周天).

약식으로 기공을 운용하자, 소모된 내공이 다시 차올랐다.

[중간 지점에서는 미드론 상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상인을 무작위로 호출하거나 코드를 입력하여 특정 인물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각 상인의 판매 품목은 종족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상회라고 하면, 그대가 튜토리얼에서 아이템을 산 곳 아니더냐.

“응.”

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되짚으면서 코드를 입력했다.

[#7693 - 상인 모르스를 선택하셨습니다.]

번쩍!

환한 빛과 함께 나타난 노움은 두 눈을 껌뻑이다가 날 올려다보았다.

* * *

모르스.

바벨탑에게 흡수된 차원, 올다린의 주민이다.

내가 저 녀석의 신상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간단했다.

앞으로 크게 될 녀석이니까.

2035년.

그러니까 현시점에서 10년 뒤에는 플레이어치고 모르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다.

노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장비 제작 능력!

모르스는 반지나 목걸이 등, 보조 장비를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뛰어난 손재주는 비단 장비 제작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미션 중에 사용 가능한 소모품의 성능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지.

수많은 노움 상인 중에서 손재주가 가장 뛰어난 이를 가리키는 호칭, 마이스터.

내 앞에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노움이야말로, 향후 ‘마이스터’가 될 재목이다.

“혹시 저, 지금 지목받은 겁니까?”

“응. 내가 지목했어.”

“저는 이제 막 상인 등록을 했는데 어떻게 코드를 알고……?”

“거래하기 싫으면 다른 녀석 부르고.”

필요 없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젓자, 모르스가 다리라도 붙들 것 같은 기세로 말했다.

“아, 아닙니다! 환영합니다, 고객님!”

“오냐.”

난 팔짱을 낀 채, 오만하게 모르스를 내려다보았다.

-계약자여, 왠지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는구나.

귓가에 와서 속삭이는 닉스.

예리하기도 하시네.

슬쩍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체했다.

“고객님, 미션 관련 아이템 중에 괜찮은 게 있는데, 좀 보시겠습니까?”

모르스는 등에 진 보따리를 풀었다.

[올빼미 안경 - 32분 소모]

[강제 탈출 장치 - 27분 소모]

[스파이크 부츠 - 65분 소모]

…….

-오, 저 귀여운 안경은 무엇이더냐?

“이야, 고객님의 소환수입니까?”

-소환수가 아니니라. 여는 고귀한 밤의…….

“응. 소환수다.”

-계약자여!

닉스가 소리를 빽 질렀다.

여신님아, 그런 모습을 한 채 밤의 여신이라고 주장하면 퍽이나 먹히겠다.

“흐, 흐흠. 이 안경은 함정 위치를 알려 주는 아이템입니다. 지속 시간은 10분이고요.”

-안경을 쓰면 통로를 쉽게 지나갈 수 있겠구나.

호오, 하고는 감탄사를 터트리는 닉스.

“응. 안 사.”

-그대의 눈과 감이 뛰어난 건 아느니라. 하나, 안전하게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저걸 쓰면 제한 시간이 깎여 나가.”

미션 관련 아이템은 튜토리얼에서 경험했듯, 해당 미션에서 따낸 점수나 기록을 소모해서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3층의 주제는 타임 어택.

아이템을 구매하면 미션 진행이 쉬워지겠지만, 그만큼 기록도 나빠진다.

-여가 보기에는 충분히 시간이 남는 듯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쓸데없는 아이템을 사서 낭비할 수는 없지.”

미묘한 표정을 짓는 모르스.

방금 내뱉은 말 덕에 쓸데없는 아이템을 파는 사람이 되어 버려서일까.

표정 관리를 하려고 힘을 주었다.

하긴.

이 녀석, 작품에 대한 자부심 하나는 진짜였지?

-그래도 아쉽구나.

“잘 만들긴 했는데 나한테는 필요가 없어.”

진심이었다.

미드론 상회에는 여러 상인들이 속해 있다.

미션 관련 아이템 종류는 층계마다 대동소이하지만, 아이템 효율이 모두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같은 올빼미 안경이라고 해도, 어떤 상인은 75분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

모르스 녀석.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초보 상인 주제에 아이템 효율부터 남달랐다.

“일반 아이템은 어떻습니까?”

오른손에 쥔 보따리를 푸는 모르스.

[시제 연막탄 - 100cp]

[모르스의 실험용 폭발 구체 - 150cp]

[모르스의 실험용 고정 실드 - 170cp]

…….

일반 아이템은 해당 층계만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쓸 수 있는 장비다.

-cp의 쓰임새가 이거였구나.

“아이템 구매 말고도 탑을 오르다 보면 종종 쓸 일이 있어.”

-이 탑이라는 곳은 알아갈수록 신비롭도다.

눈을 반짝이는 닉스.

“그 소환수님한테 어울리는 장신구도 있…….”

“오늘은 그런 걸 사려고 부른 게 아니다.”

나는 모르스가 헛바람을 넣기 전에 재빠르게 말을 잘랐다.

“ㅇ, 예?”

“너랑 전속 계약을 맺고 싶군.”

“잠시만요. 고객님, 혹시 전속이라고 하신 겁니까?”

“어, 맞아.”

모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첫 상행이라서 긴장했는데 이상한 손님을 만났네.”

퉤, 하고 땅바닥에 침을 뱉는 모르스.

그래.

내 기억 속에 있는 모르스는 이렇게 삐딱한 녀석이었다.

“손님. 거, 전속이 뭔지는 알고 말하는 거요?”

“말 그대로 나만 담당해 주는 전속 상인이 되어 달라는 거지.”

전속 상인은 무작위 상인 매칭에서 제외되는 대신, 내가 미션을 수행할 때마다 무조건적으로 배치되는 계약이다.

해당 플레이어의 활약상이 클수록, 전속 상인에게도 떨어지는 콩고물도 많아진다.

그렇기에 랭커급 플레이어들은 수완이 괜찮은 상인과 전속 계약을 맺기도 했다.

“빌어먹게도 잘 아시네. 근데 사람 잘못 찾아왔수.”

“내 기록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미심쩍은 눈으로 미션 현황을 확인하는 모르스.

잠시 후.

“다, 당신, 아니 고객님. 이 기록이 모두 사실입니까?”

태세 전환 빠른 거 보소.

“왜. 마음에 안 들거나 신뢰가 안 가면 돌아가도 돼.”

“아닙니다, 고객님! 제가 귀하신 분을 못 알아보고 헛소리를 했습니다!”

모르스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을 툭툭 쳤다.

“나쁜 말을 한 입은 혼나야 합니다. 제가 대신 혼내겠습니다.”

찰싹, 찰싹.

제 손으로 입술을 때리는 노움이라.

-참으로 흉한 모습이로구나.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계약자여, 여의 눈이 아파 오니 그만두게 하는 것이 어떠냐.

“들었지?”

내 말을 듣자마자 자학을 멈추는 모르스.

이야, 먼 미래의 마이스터를 세 치 혀로 움직이다니.

이것도 회귀 전의 지식 덕분이다.

나는 웃음을 삼킨 채, 모르스와 계약을 진행했다.

[플레이어 유진호와 상인 모르스와의 전속 계약을 진행합니다.]

[유진호는 탑을 오르는 중 모르스에게만 아이템 구매 및 판매를 합니다.]

[모르스는 무작위 상인 배치에서 제외되며, 전속 계약자가 탑의 기록을 갱신할 때마다 추가 성과급을 받습니다.]

[양자가 동의하면 계약이 성립됩니다.]

“동의합니다!”

소리를 빽 지르는 모르스.

내 마음이 바뀔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계약에 동의한다.”

지잉-.

보이지 않는 끈이 둘 사이에 연결되었다.

“미션 최고 기록을 연달아 갈아 버린 분과 전속 계약이라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모르스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회귀 전의 모르스가 이 모습을 보면 혀를 차면서 뜯어말렸을 텐데.

난 속내를 꾹 감춘 채, 모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부터 잘 부탁하지.”

“흐흐, 저야말로.”

마주 잡은 손.

참, 그러고 보니 계약 기념으로 선물을 하나 줘야겠군.

“아이템을 하나 처분해 줬으면 하는데.”

“첫 의뢰가 판매입니까?”

“보상으로 받은 건데. 나한테는 쓸모가 없어서.”

나는 [C급 성좌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 이 아이템은?!”

“팔면 CP가 얼마쯤 나올까?”

“성좌와 계약을 주선해 주는 아이템이면 못해도 2천은 넘죠!”

양도 불가 아이템.

다른 플레이어에게 넘기는 건 불가능해도, 상인한테 팔 수는 있다.

미드론 상회에서 상인 등급을 정하는 기준은 둘이다.

플레이어에게 얼마나 많이 파느냐.

그리고 값진 아이템을 잘 매입하느냐.

[C급 성좌 계약서]를 들고 가면 상인 랭크를 둘은 올릴 수 있을 거다.

“첫 거래인 만큼 제 역량을 총동원해서 비싸게 팔겠습니다!”

“오냐.”

“더 볼일은 없으신 겁니까?”

“이제 슬슬 3층 기록을 갈아치우러 가야지.

“흐흐흐, 유진호 플레이어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하얀 빛과 함께 사라진 모르스.

적막감이 통로를 휘감았다.

자, 그러면 이제 끝을 보러 가 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