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하루 도전 횟수를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접속이 종료됩니다.]
[한국 서버 기준으로 00:00시부터 다시 도전할 수 있습니다.]
퉁!
누군가가 뒷덜미를 홱 잡아당긴 것처럼 뒤로 쭉 밀려났다.
검어진 시야.
다시 눈을 떴을 땐 서 있는 장소가 자취방으로 바뀌었다.
-그대의 세계로 돌아왔구나.
“응. 탑에 들어가는 건 제한이 있거든.”
-다음 날이 되려면 시간이 꽤 남은 듯하다만.
“그렇다고 쉴 수는 없지.”
달맞이 돌을 입에 문 채, 가부좌를 틀었다.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간 돌.
청량한 기운이 꿈틀거린다.
곧장 삼재기공을 운용, 달맞이 돌의 기운을 전신으로 순환시켰다.
[내공: 22.8 → 37.1]
“이제 삼류 무인 수준인가.”
역시 내공은 올리기가 힘들어.
동일한 영약을 섭취하면 효과가 떨어진다.
내가 익힌 심법이 삼재기공인 것도 한몫했고.
고작해야 삼류 무공.
한 번 대주천을 이룰 때마다 쌓이는 내공 양이 너무나도 적었다.
-돌에 실린 힘에 비하면 그대의 몸에 깃든 힘이 미미하구나.
“그래도 삼재기공으로 모은 내공은 다른 심법과 충돌하지 않으니까.”
삼재기공으로 모은 내공은 어느 성질도 띄지 않는다.
정(正)·사(邪)·마(魔).
어느 속성의 심법을 익히더라도 손실 없이 녹여 낼 수 있다는 것!
-궁금한 것이 있느니라.
“뭔데?”
-그렇다면 더 높은 등급의 심법을 익힌 후에 영약을 먹는 게 이득이지 않더냐?
“아, 상위 심법을 익히면 내공도 같이 늘어나서 괜찮아.”
삼재기공보다 높은 등급의 심법을 운용하면 대주천 과정 중에 기존의 내공도 증폭된다.
달맞이 돌의 기운을 직접 흡수하는 것보다는 손실이 있지만.
“15일에 한 번 흡수할 수 있으니,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시간을 당기는 게 이득이다.”
-과연. 그대는 다 계획이 있구나.
아무렴. 2회 차 플레이어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삼재기공 운용을 마친 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만 수백.
쌓여 있는 문자는 천 단위다.
-계약자를 찾는 이들이 많구나.
“필요 없는 연락이야.”
-대학 동기 철수야. 기억하지?
-안녕하세요, 오빠. 1학기 인문학개론 강의에서 조별 과제 같이했던…….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이들이 내 이름을 친근하게 불렀다.
회귀 전에는 큰 접점이 없던 사람들.
포식 능력의 진가를 알 때까지는 플레이어 중에서도 바닥을 전전했다.
그때만 해도 휴대전화가 과열될 정도로 연락이 오지도 않았었고.
나는 문자를 휙휙 넘겼다.
사람의 위치가 달라지니, 과거와는 다른 미래가 펼쳐졌다.
쌓인 문자들을 쭉 넘기던 중.
-대경기업입니다. 유진호 님이 이번에 새로 발매되는 플레이어 관련 장비의 홍보 모델로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불가사리에서는 유진호 플레이어를…….
“이야, 벌써부터 기업에서 연락이 오네.”
-모델이 무엇이더냐?
“이런 거.”
인터넷을 켜서 유명 헌터들이 장비를 착용한 채로 광고하는 영상을 틀어 주었다.
닉스는 곰곰이 영상을 보고는.
-이상하구나.
“뭐가?”
-그대보다 잘생기고 아름다운 이들이 나오는데, 어이하여 그대에게 제안을 하였는지 모르겠도다.
“여신님.”
-왜 그러느냐?
“솜사탕 3일 압수.”
-계약자여, 여에게 왜 그러느냐!
“잘 생각해 보면 알 거야.”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예정보다 빠른 기업들의 연락.
하지만 당장 기업들과 접촉할 생각은 없었다.
몸값을 더 올려야지.
탑의 기록을 하나하나 경신할 수록.
날 섭외하는 데 제시해야 할 액수도 빠르게 올라갈 것이다.
언제까지고 뺄 수야 없겠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도 힘이니까.
하지만, 적당히 시간을 벌어야 내 몸값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나저나.
“탑과의 동기화가 19%라.”
내 기억보다 더 빠른 속도다.
-동기화가 진행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게이트 브레이크.”
나는 게이트 브레이크 현상에 대해 짧게 설명해 주었다.
-침식이라. 그 아이들도 한때 필멸자들의 우러름을 받았던 성좌들일진대, 참으로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구나.
“그 녀석들은 여신님도 이용했잖아.”
-여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하느니라.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저렇게 편히 생각하지 못할 텐데.
고신들보다도 더 위.
개념의 영역에 닿은 신은 모두 저런 걸까?
-하나, 그들의 욕망을 이루려고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건 이해할 수 없느니라.
“……그렇군.”
아니었다.
닉스의 자비로운 마음은 필멸자들을 아끼는데서 나오는 거였다.
현세대의 신들 중에서도 이런 자비심을 품은 존재는 거의 보지 못했다.
“내가 파트너 하나는 잘 삼았군.”
-계약자여, 감히 여를 재단하는 것이더냐?
“재단이 아니라 존경하는 건데.”
순간 닉스의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후, 후후훗. 앞으로도 여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도록 하여라.
여신님, 지금 당황한 티가 팍팍 나는데요?
나는 닉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상태 창을 바라봤다.
게이트 브레이크.
그러니까 침식 1단계가 시작된 건 2026년 3월경이다.
이 속도로 동기화가 진행되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게이트 브레이크가 벌어질 텐데.
기억보다 반년 가까이 빨라진 속도.
회귀 전과 차이가 있다면…….
나밖에 없잖아?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탑의 동기화가 빠르게 오르는 건, 그만큼 플레이어들이 열정을 가지고 도전한다는 의미다.
튜토리얼 기록 교체.
1층과 2층의 최고 기록 경신.
전 세계의 플레이어들을 자극할 만한 건 그뿐이다.
나비효과인가.
이지영의 가능성을 일찍 일깨워 주고 플레이어 권한을 박탈당할 오지원이 유망주로 떠오르는 것처럼.
게이트 동기화가 빠르게 올라가는 것도 회귀가 일으킨 미래의 변곡점이다.
회귀 전과 다른 미래.
그 변화가 반드시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물러나지 않아.
나는 굳은 눈빛으로 상태 창을 노려보았다.
예정된 비극을 앞당기는 것.
그로 인해 미래에 어떤 변화가 들이닥칠지 모르지만, 그게 두려워서 돌아갈 수는 없다.
탑의 고신족들을 쓰러트리려면, 한시라도 빨리 더 강해져야 했다.
나는 외출 준비를 했다.
-어디로 가려느냐?
“훈련.”
바벨탑에 들어가지 못해도,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 * *
이튿날.
해가 뜨자마자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는 바벨탑 앱에 접속했다.
-아침부터 부지런하구나.
“일찍 일어난 새가 배고프다는 말도 있잖아.”
-그래서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것이로군!
닉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감탄사.
저 말 어디에 감탄할 만한 요소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곧장 3층을 선택했다.
화아악!
눈을 감았다가 뜨니 장소가 바뀌었다.
[바벨탑 - 3층]
[죽음의 통로에 입장했습니다.]
[미션 - 끝을 향한 직진]
온갖 함정으로 도배가 된 죽음의 통로.
후퇴할 수 없고,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만 허락된 길의 끝에 도달하십시오.
▶ 목표: 통로 끝 도달
[제한 시간 - 24:00:00]
사면이 벽으로 된 곳.
회색으로 된 돌이 층층이 쌓여서 틈 하나 찾을 수 없다.
옆면에 매달린 화톳불.
주홍색을 띤 불꽃이 통로의 어둠을 몰아냈다.
-이번에는 다른 플레이어와 매칭을 하지 않는 것이더냐?
“혼자서 진행하는 미션이라.”
-그렇구나.
앞으로 쭉 뻗은 통로.
나는 망설임 없이 회색으로 물든 길을 걸었다.
끼리릭-!
세 걸음을 내딛는 순간, 태엽이 맞물리는 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통로 양옆.
평평했던 벽이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화살이 튀어나왔다.
[육감이 위험을 감지합니다.]
나는 갑피를 전신에 둘렀다.
콰드득!
화살촉이 갑피와 충돌하자, 내구도가 7% 소모되었다.
[갑피]와 [철비늘]의 시너지.
매직 등급 방어구보다 더 뛰어난 방어력을 지녔기에 충격을 무효화시켰다.
-그대여, 괜찮으냐?
“이 정도쯤이야.”
-함정이라니. 참으로 고약한 장소로구나.
닉스.
명색이 밤의 여신이면서 어두운 곳이나 간계 같은 건 안 좋아한다는 말이지.
“함정이라는 건 알고 있으면 위험도 떨어지는 법이야.”
-그대는 이미 함정의 위치를 알고 있구나?
“아, 그건 아니고.”
무작위로 배치되는 3층 함정.
함정의 종류는 정해져 있지만, 어디서 뭐가 나올진 해당 미션을 도전할 때마다 달라진다.
“위치까지는 직접 맞아 보면서 파악해야지.”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이 정도로 무리할 일이 있을까.
나한테는 어떤 위험이든 미리 알려 주는 [육감] 스킬이 있다.
초음파의 시너지 효과도 적용되니.
함정 따위는 눈 감고도 대응할 수 있을걸?
달칵-.
몇 걸음을 떼지도 않았는데, 저 멀리서 무언가가 작동했다.
정면으로 날아드는 얼음 덩어리.
하얀 냉기가 덩어리 주위를 휘감았다.
난 양팔을 X 자로 교차한 채, 날아드는 덩어리와 부딪쳤다.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15% 감소했습니다.]
2배 이상으로 소모된 내구도.
화살보다 충격이 크다.
그 뒤로도 걸음을 뗄 때마다 함정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땅이 훅 꺼지거나.
머리 위에서 불꽃이 쏟아지거나.
생각지도 못한 각도에서 암기를 토해 내기도 했다.
나는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그대여, 반격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실험해 볼 게 있어서.”
3층 미션.
회귀하기 전에는 목숨을 걸고 통과해야 했던 통로다.
그래서일까.
나는 함정을 하나하나 몸으로 겪어보면서 회귀 전보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차근차근 비교했다.
오호라.
입가 위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단순하게 [가시 갑피]의 방어력이 강해서 품은 생각이 아니다.
공격을 받았을 때, 갑피가 충격을 흡수해 주더라도 그 힘을 온전히 흘려 내지는 못한다.
충격 흡수와 별개로 그 공격에 실린 힘을 못 버티면 밀려난다는 것.
하지만 어떤 함정이 몸을 두들겨도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만큼 내 근력과 민첩, 그리고 맷집 수치가 높다는 말이었다.
역시.
꾸준하게 포식을 사용한 보람이 있어.
탑 이틀 차 플레이어라고 보기 어려운 하이 스펙.
모두 다 포식 덕분이다.
-실험은 다 끝났느냐?
“응. 이 정도면 가뿐하겠네.”
나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통로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둠으로 뒤덮인 곳.
시작지점을 기준으로 10킬로미터를 걸어야 통로 끝에 닿을 수 있다.
평균 클리어 시간은 약 한나절.
플레이어들한테 인기가 없는 이유다.
달칵-.
함정이 다시 한번 작동했다.
정면으로 날아드는 화염.
이번 공격은 몸으로 받아내는 대신, 오른손을 내밀었다.
[마나 업소브를 사용합니다.]
화살이 아닌, 순수한 마력 구체는 얼마든지 흡수가 가능했다.
사용자의 마력 수치에 반응하는 [탐식의 입].
내 마력 수치는 일반적인 저층 플레이어를 아득하게 넘어섰다.
츠츠츠츳!
검붉은 기운에 흡수된 얼음 덩어리.
-호오, 이번에는 몸으로 받아 내지 않았구나.
“속도를 좀 올려 봐야지.”
-지켜보는 데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뻔했느니라.
여신님, 눈가에 아른거리는 습기나 감추고 그런 이야기를 하시죠.
이미 하품해 놓고 안 한 척하긴.
“이제부터는 지루할 틈이 없을 거야.”
나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