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2층 미션을 매칭 중입니다.]
[매칭 범위 - 글로벌 서버]
[27/100]
[36/100]
[43/100]
…….
빠른 속도로 채워지는 숫자.
-2층은 100명이 팀을 이루는 것이더냐?
“아, 팀은 아니고. 모두 적이야.”
2층 미션의 주제는 서바이벌이다.
제한 시간 동안 살아남거나.
아니면 모든 이들을 쓰러트리고 최후의 승자가 되거나.
-그대의 선택지가 무엇인지 알 것 같구나.
“이제 나를 좀 아시네.”
난 짧게 웃었다.
빠르게 차오르는 숫자.
2층은 플레이어들에게 꽤 인기가 많은 미션이다.
운만 따라 주면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클리어가 가능하며, 다회차로 도전해도 보상이 짭짤해서다.
그 말인즉슨, 2층에서 마주칠 플레이어들은 다회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잠시 후.
[바벨탑 - 2층]
[생존 지대에 입장했습니다.]
[미션 - 서바이벌]
플레이어 100인은 무작위로 정해지는 필드에서 생존해야 합니다.
각 플레이어는 힘을 모으거나 경쟁자를 사냥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를 쓰러트릴수록 보상도 커집니다.
▶ 목표: 30분 동안 생존.
혹은 최후의 1인이 되는 것.
▶ 필드: 로헤인 평원
매칭 완료 후 대기 시간이 모두 지나니, 미션 장소로 이동했다.
푸른 잔디로 뒤덮인 평평한 대지.
넓디넓은 벌판 주위로, 플레이어 아홉 명이 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왜 하필 로헤인 평원인데?”
“숨긴 틀렸네.”
낭패한 기색을 띤 이들.
“이번 미션은 빨리 끝낼 수 있겠군.”
“보상을 두둑하게 챙기겠어.”
반면, 기쁜 기색으로 전투를 준비하는 플레이어도 있었다.
은·엄폐하기가 마땅찮은 평원.
기척을 감추는 스킬이 있어도, 이런 환경에서 몸을 숨기는 건 쉽지 않다.
“당신, 혹시 초회차야?”
한 플레이어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끄덕여 주니.
“인생 쓴맛 한번 본다고 생각하라고. 처음에는 원래 조기 탈락도 경험해 보고 그러는 거야.”
히죽 웃으면서 전투준비를 갖추었다.
응, 그래. 인생의 쓴맛, 너나 많이 봐라.
[2층 미션이 시작됩니다.]
[플레이어 여러분의 무운을 빕니다.]
플레이어들을 감싼 푸른 막이 사라졌다.
동시에, 칼을 든 녀석이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죽……!”
서걱.
[날카로운 손톱]이 플레이어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벌어진 상처에서 튀어나오는 피.
“끄륵.”
급소를 베인 플레이어는 지면에 고꾸라졌다.
회색으로 물든 사체.
사체는 포식을 사용한 것처럼 가루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대여, 저들의 정수는 흡수하지 못하는 것이더냐?
“진짜 죽은 게 아니야.”
미션 도중에 사망하면 단말기 바깥으로 튕겨난다.
손톱으로 목덜미를 그어 놨지만, 저 녀석이 느낀 고통은 따끔한 정도일걸?
탑 시스템은 너무 큰 고통이 가해질 때 강제적으로 간섭, 플레이어가 받을 충격을 완화시켜 준다.
동기화가 올라가면 저런 배려(?)도 없어지지만.
“뭐, 진짜 시체라고 해도 포식은 안 돼.”
-그렇구나.
회귀 전, 세계가 무너져 내리던 때에 시도해 보긴 했다.
괴물한테 죽어 간 플레이어의 피가 땅을 붉게 물들이는 시절.
그땐 윤리고 뭐고 따질 시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적합한 대상이 아니라고 했지.
내 입가를 물들이는 쓴웃음.
당시를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마모되는 느낌이다.
기분 더럽구먼.
“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플레이어가 쓰러졌어.”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나를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서바이벌 미션은 100인 모두가 경쟁자.
더 큰 보상을 얻으려면 최대한 많은 플레이어를 쓰러트려야 한다.
나는 주위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훑어보면서 손가락을 까딱였다.
“안 덤비고 뭐 해?”
“저놈부터 재껴!”
“우와아아!”
눈치를 보던 플레이어 8인은 이내 한마음이 되었는지,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래, 이래야 시간 낭비를 안 하지.
사선으로 그어지는 손톱.
맹호혈조를 펼치자, 플레이어 셋의 몸뚱이가 회색으로 물들었다.
이어지는 2초식.
호미조(虎尾爪).
호랑이가 꼬리를 움직이듯, 민활한 손동작으로 플레이어의 멱을 땄다.
반수가 회색이 되어 사라지자,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긴장한 기색을 띤 채로 거리를 벌렸다.
“빌어먹을.”
“왜 저런 괴물이 2층에 온 건데?”
“우리로서는 이길 수가 없어.”
눈빛을 교환하는 플레이어 잔당.
거의 동시에, 내 반대쪽으로 등을 홱 돌렸다.
오,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근데 이미 내 간격에 들어왔어.”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발밑에서 솟구친 극야가 플레이어들의 배후를 노렸다.
막 몸을 돌린 터라, 플레이어들이 반응하기 어려운 각도였다.
-처음부터 극야를 꺼내지 않은 것은 이를 위해서였느냐?
“응. 놈들이 도망치면 귀찮아지잖아.”
푸욱! 푹!
암흑 칼날들은 등을 드러낸 플레이어들을 도륙했다.
난 미션 현황을 확인했다.
[킬 카운트]
유진호 - 9
안드레이 - 2
마르코 - 1
…….
[남은 플레이어: 84]
[남은 시간: 00:29:47]
“시간이 많이 없군.”
-여기 있는 전원을 쓰러트리기에는 충분하지 않느냐?
“아, 노리는 게 하나 있거든.”
현시점에서는 밝혀지지 않은 2층의 히든 룰.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숨 돌릴 틈도 없이 움직여야 한다.
마침 지형도 평원이 떴으니.
이번에 그 히든 미션을 클리어해야지.
나는 운류보를 전개하면서 지면을 박찼다.
* * *
[남은 플레이어: 65]
[남은 플레이어: 47]
빠르게 줄어드는 플레이어의 숫자.
이번 미션에 참여한 플레이어들은 금세 원흉을 알아챘다.
“유진호?”
“이 녀석, 뭐 하는 놈이야?!”
압도적인 킬 카운트!
미션이 시작되고 2분이 조금 안 된 시점인데, 50이 넘는 플레이어가 한 명에게 학살당했다.
“이 정도면 아이언 등급 아니야?”
“멍청아, 승급전을 치르면 아래 층계 미션에 참여할 수 없잖아.”
“아, 그렇지.”
“그럼 이 속도는 뭔데?!”
당황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피는 플레이어들.
잠시 후.
“여기들 있었구나?”
벌게진 눈으로 들이닥친 진호는 팔을 휘둘렀다.
날 선 손톱이 허공에 푸른 선을 그었다.
일 초(招)도 받아 내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플레이어들.
진호가 지나간 곳마다 회색 가루가 휘날렸다.
“유진호라고? 설마 최근에 튜토리얼 최고 기록을 경신한…….”
“그럴 리가 없잖아. 며칠 전에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놈이 그렇게나 강할 수 있나!”
“동명이인이든 아니든 그건 안 중요해.”
“이번 미션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는 거다.”
플레이어 몇 명은 서로에게 겨누던 무기를 거뒀다.
유진호라는 생태계 교란종을 먼저 쓰러트려야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모여 있으면 더 편하지.”
진호는 플레이어들의 저항을 어렵지 않게 짓밟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조차 어렵지 않게 튕겨 내는 단단한 갑피.
“아얏!”
도리어 칼을 휘두르던 플레이어는 갑피를 뒤덮은 가시에 찔려서 비명을 질렀다.
사거리가 긴 창이나 원거리 공격은 한결 나았지만.
[어둠 지배]
극야로 빚어낸 촉수 다발이 공격의 궤도를 읽어 내서 낚아챘다.
플레이어들의 공격 수단은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상황.
반면, 진호가 펼치는 공격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너, 너무 빨라.”
경악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플레이어.
일단 플레이어 군집과 진호 사이에는 압도적인 스펙 차이가 존재했다.
순수한 능력치만 놓고 보면 100레벨대 플레이어와 버금가는 진호.
그뿐이랴?
무기나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았지만, 동 레벨에서 구하기 힘든 목걸이와 반지를 여럿 낀 덕에 장비 보정 스펙도 밀리지 않았다.
“에잇, 한국의 플레이어는 괴물이냐!”
발악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미국 소속 플레이어.
카가각!
피격 부위에서 불똥이 튈 뿐, 진호에게는 충격 하나 전하지 못했다.
[남은 플레이어 - 15]
[남은 시간 - 00:27:55]
진호한테 달려들었던 플레이어는 모두 사망.
남은 건 애초부터 30분 동안 살아남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숨어 버린 플레이어뿐이었다.
[은신]
[보호색]
[디그]
땅굴을 파거나 주변 환경에 스며들면서 은폐하는 일부 플레이어.
“훤히 보이는 데서 뭐 하는 거냐?”
진호는 몸을 숨긴 이들조차 하나씩 찾아냈다.
그의 망막에 비치는 노란 아우라.
[독수리의 눈].
플레이어가 내뿜는 마력이 선명하게 보인다.
상대의 마력을 감지하는 스킬의 또 다른 활용 방법.
기척 자체를 숨기지 않으면 감지 계열 스킬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플레이어의 숫자가 진호를 포함해서 다섯만 남았을 때.
구구구궁!
평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평원에서 지진이 나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진동 때문에 은신이 깨졌잖아!”
운 좋게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비명을 질러 댔다.
[남은 플레이어 - 5]
[남은 시간 - 00:27:05]
[미션 개시 후 3분 안에 플레이어의 숫자가 5인 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
[2층의 숨겨진 요소가 충족되었으므로 미션 내용이 변경됩니다.]
[히든 미션 - 분노한 아울비스트]
플레어의 피 냄새를 맡고 깨어난 괴물, 아울비스트.
분노한 아울비스트는 나머지 생존자들을 사냥해서 배를 채우려고 합니다.
괴물에게서 도망치거나, 먼저 사냥해야 합니다.
▶ 목표: 30분 동안 생존.
혹은 최후의 1인이 되는 것.
혹은 분노한 아울비스트 사냥.
머리는 부엉이.
그 아래로는 흉포한 곰을 떠올리는 몸뚱이의 괴물, 아울비스트가 평원 중심부에 나타났다.
* * *
부어엉!
요란하게 우는 [분노한 아울비스트].
포효가 평원 곳곳으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겨우 시간에 맞췄군.”
난 오른팔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분노한 아울비스트는 미션 개시 후 3분 안에 생존자를 다섯 명 이하로 줄여야만 볼 수 있는 괴물이다.
저걸 나오게 하려고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그대가 무리를 한 건 저 괴물을 불러내기 위함이었구나.
“아슬아슬했어.”
2분 55초.
하마터면 숨어 버린 플레이어들을 찾다가 시간을 못 맞췄을 수도 있었다.
내일 2층 미션을 다시 도전해도 되지만, 이왕이면 한 번에 클리어하는 게 좋잖아?
후우욱.
길게 숨을 들이마시니 쌓였던 피로가 사라졌다.
발바닥을 땅에 딛기만 해도 적용되는 [대지모신의 가호].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 체력이 쭉쭉 회복되었다.
-꽤 지친 것 같은데 괜찮겠느냐?
“쟤가 다른 플레이어를 사냥하면 곤란해.”
미션 목표 중에는 최후의 1인도 포함되어 있다.
분노한 아울비스트가 출몰했어도 최후의 1인이 남으면 자동적으로 클리어가 된다.
히든 미션 보상이야 받을 수 있겠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원하는 건 미션 보상보다도…….
“분노한 아울비스트의 정수지.”
평원 중심부로 걸어가자, 놈의 둥근 눈동자가 내 움직임을 좇는다.
“부어어엉!”
“그래. 먹잇감 보니까 좋지?”
“부어엉!”
쿵! 쿵! 분노한 아울비스트가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육중한 무게 탓인지, 발을 뗄 때마다 이 일대가 들썩거렸다.
보아하니 미션에 참여한 다른 플레이어에게 어그로가 튈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럼 전력으로 싸울 수 있겠어.”
난 주먹을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