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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44화 (44/300)

44화

하얗게 질린 팀원들.

“무, 무슨 짓이야!”

아까 살갑게 말을 걸었던 외국인, 해리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뭐기는, 늙은 트롤을 풀어 주는 거지.”

“그 문을 뚫으면 트롤이 이쪽으로 나오잖아!”

비명을 지르는 해리.

내가 박살 낸 건 해리가 잠금을 풀려고 했던 문과 정반대였다.

-어느 문이든 열면 그만 아니더냐?

“트롤이 내려가는 방향이 달라.”

플랜 B.

늙은 트롤을 해방한다고 해서 플레이어의 편이 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굶주린 트롤을 레드 고블린 군락 방향으로 풀어놓는 것뿐.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내가 부순 문은 블루 고블린 군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트롤이 이대로 내려가면 레드 고블린 군락을 무슨 수로 공략한다는 거야!”

“누가 내려간대?”

난 어깨를 으쓱였다.

콰직, 솥뚜껑만 한 손이 산산조각 난 문을 짚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나오는 커다란 물체.

레드 고블린이 사육하고 있던 비밀 병기, 트롤이다.

“크어어어.”

“놈이 우리를 봤어.”

“이 트롤 새끼야!”

백인 한 명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왜 불쌍한 트롤 욕을 하냐.

레드 고블린한테 사육당하는 불쌍한 녀석인데.

“몬스터 혐오를 멈춰 주세요.”

“저 트롤 말고 너 말하는 거다!”

팀원들이 혼란에 빠져서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을 때.

“크어어.”

쾅!

늙은 트롤이 반쯤 부서진 문을 박차면서 흉성을 드러냈다.

“다 틀렸어.”

주저앉는 해리.

다른 팀원들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트롤을 올려다보았다.

아, 나한테 욕을 내뱉었던 놈은 스킬을 써서 몸을 빼는 중이군.

“아주 훌륭한 팀워크일세.”

-기척을 숨긴 채 물러나는 것도 팀 활동의 일환이더냐?

“아니. 그냥 동료 놓고 도망치는 건데.”

-동료를 버리는 것이 팀워크라니. 그대의 세계에서는 그 의미가 변질된 모양이로구나.

어휴, 이 순진한 여신님 보소.

“크어어어!”

쿵! 쿵!

늙은 트롤이 양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첫 타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로 정한 듯했다.

배은망덕한 녀석.

너를 풀어준 게 누구인데 달려드냐?

“오히려 좋아.”

나는 씩 웃었다.

[독수리의 눈을 사용합니다.]

[상대가 당신보다 약합니다.]

늙은 트롤 위로 피어오르는 노란색 오라.

1층의 히든카드인 늙은 트롤이 나보다 스펙이 떨어질 줄이야.

여태껏 정수를 포식해 온 보람이 있군.

나는 트롤을 마주하며 걸어갔다.

“크어어어!”

오른팔을 휘두르는 늙은 트롤.

단전의 내공이 혈도를 타고 전신을 순환했다.

툭 튀어나온 손톱으로 맹호혈조를 전개, 넓적한 트롤의 손과 충돌했다.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지는 트롤의 손가락.

“크어어어?!”

늙은 트롤은 고통 섞인 신음을 흘리면서 팔을 거뒀다.

“왜. 뭐가 잘 안 돼?”

나는 트롤의 가슴팍 안으로 파고들었다.

* * *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해리는 경악 어린 눈빛으로 전투를 지켜보았다.

늙은 트롤.

기괴한 각도로 틀어진 왼 다리.

피부 여기저기에는 흉터가 훈장처럼 남아 있지만.

그래도 ‘트롤’이다.

갓 1층에 도전하는 플레이어 수준으로는 절대 사냥할 수 없는 괴물!

한데…….

그 강대한 괴물이.

“크어어어어.”

혼비백산한 채 비명을 질렀다.

푸아악!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피.

모두 트롤의 몸뚱이에서 솟구친 거였다.

[민첩한 뒷발]

[어둠 지배]

[블레이즈]

진호는 늙은 트롤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족적에서 솟구친 불길은 트롤의 움직임을 제한했고.

지면 위로 튀어나온 암흑 칼날이 괴물의 몸뚱이에 새겨진 상흔을 헤집어놓았다.

그뿐이랴.

“크어어!”

트롤이 발악적으로 팔을 휘두르면 정면으로 받아쳤다.

호랑이의 움직임을 본떠 만든 혈조공.

[탐욕의 가호]로 강화한 [날카로운 발톱]으로 무공을 펼치니, 늙은 트롤의 두꺼운 가죽이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저, 해리 씨. 트롤이 밀리고 있는…… 거죠?”

“그런 것 같습니다.”

메이 챙도 어안이 벙벙한 건 마찬가지였다.

진호가 트롤을 이쪽으로 풀었을 때만 해도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한데, 끝난 건 저 트롤이었다.

고블린 군락을 무너트릴 비장의 수가.

진호한테 농락당했다.

한편.

“더럽게 질기네.”

진호는 짧게 투덜거렸다.

늙었다고는 해도 트롤의 재생 능력은 여전했다.

교전 초기에 잘라 냈던 손가락은 어느새 다시 자라나 있었고.

손톱으로 찢어발긴 가죽 사이로 분홍빛 기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경이에 가까운 재생 능력.

-목불인견이로다. 참으로 끔찍하구나.

“탑을 오르다 보면 이보다 더한 것도 많이 볼걸?”

-그때는 여에게 미리 경고를 해 주어라. 눈을 감고 있을 터이니.

진호는 손발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닉스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눴다.

“크, 크으으으어.”

“시끄럽네.”

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스스슷!

쭉 늘어난 극야가 늙은 트롤의 입을 후려쳐서 비명 소리를 막았다.

트롤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양팔을 아무리 휘둘러 대도 진호한테는 도통 닿지를 않았다.

큰 바위조차 쪼개는 주먹이지만.

진호의 손톱에 닿는 순간 몇 갈래로 찢겨 나갔다.

재생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고통까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트롤이 고통에 둔한 편이지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괴롭히면 아픔을 느꼈다.

“크어어.”

늙은 트롤은 도망치려고 몸을 틀었다.

하지만.

3미터 높이로 치솟은 불길 때문에 도망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몸 여기저기에 생긴 상흔.

혈조공이 남긴 흔적이다.

상처가 고열에 노출되면 재생력이고 뭐고 즉시 봉합되어 버린다.

“크어, 크어어.”

늙은 트롤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도망치는 것도 맞서 싸우는 것도 둘 다 고르기 싫은 선택지였다.

늙은 트롤의 눈자위로 살의가 번들거렸다.

포식자로 군림해 왔던 괴물의 본능이 도주 대신 공격을 택한 것이다.

“이제 마음을 먹었나 보군.”

진호의 입가에 감돌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늙은 트롤의 방어력과 재생 능력은 그한테도 꽤 부담이 되었다.

블레이즈로 전장을 제한.

빙빙 돌면서 트롤의 체력을 깎아내렸지만, 승부를 결정지을 마지막 수를 놓기에는 하나가 모자랐다.

-이제 저 흉물을 쓰러트릴 수 있겠구나.

“그러게.”

해리는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늙은 트롤을 농락할 만한 실력자라니.’

처음에는 진호가 블루 고블린의 군락으로 뛰어든 걸 보면서 객기라고만 생각했다.

아니, 객기라는 말보다는 자살행위라고 여겼다.

전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고, 그중엔 진호처럼 미션에 훼방 놓는 걸 즐기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까.

‘착각이었어.’

해리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부끄러웠다.

자신의 짧은 생각으로 누군가를 재단했다는 사실.

이번 미션에서 부족했던 것은 진호가 아니라 해리 자신이었다.

‘나도 저 사람처럼 강해지고 싶다.’

해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쯤 주저앉은 채로 전투를 지켜보는 팀원들.

그들의 눈빛에도 자신과 같은 동경의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때.

“허억, 헉!”

등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늙은 트롤이 해방되었을 때 바로 도망쳤던 플레이어, 피터였다.

“당신이 왜 여기로 다시 왔습니까?”

“혀, 형씨! 아래에서 고블린들이 올라오고 있어!”

사색이 된 피터.

그는 트롤을 피해서 도망치던 중, 산 중턱으로 올라오던 레드 고블린 수십 마리와 마주쳤다.

비장의 무기인 은신으로도 수십이나 되는 고블린의 감각을 속이지는 못했다.

“독침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니까?”

피터는 그 말을 내뱉고는 이마에서 땀을 훔쳤다.

그 말을 들은 해리는 마체테를 꽉 쥐었다.

“우리가 막죠.”

“뭐, 뭐?”

“유진호 씨가 트롤을 쓰러트리는 동안 시간을 버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 하기는 싫은데. 좋아요.”

메이 챙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터를 제외한 팀원들은 다시 한번 용기를 북돋았다.

한데.

“그 고블린, 건들지 마.”

엉뚱한 곳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막 트롤의 오른팔을 몇 갈래로 찢어발긴 진호.

그의 눈동자에서 광기가 번들거렸다.

“기여도는 다 내 거야.”

해리는 그의 눈빛에 감도는 살의에 움찔거렸다.

* * *

레드 고블린의 북상.

최단거리로 산 중턱을 오른 부작용이다.

쯧, 나는 혀를 찼다.

“그것까진 생각 못 했는데.”

-레드 고블린은 저들에게 맡기지 그러느냐?

“안 돼. 기여도 아깝잖아.”

각 층의 미션은 최초 클리어 때 가장 보상이 좋다.

이미 클리어한 층계를 반복적으로 도전하면 보상 질이 확 떨어진다.

더 높은 곳을 도전해서 동기화를 빠르게 올리라는 고신족들의 술수.

그러니, 레드 고블린은 한 마리도 양보할 수 없다!

[버서크를 사용합니다.]

[근력과 민첩이 30% 증가합니다.]

[지속 시간: 60초]

분노 유인원의 정수에서 얻은 스킬.

버서크를 사용했다.

근육이 팽팽해지고, 용력이 복부에서 솟구친다.

평소보다 1.5배 정도 빨라진 심장 박동.

엔진이 고막 근처에 있는 것처럼,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냉혈이 발동됩니다. 분노 일부를 억제합니다.]

냉혈 스킬이 광화(狂化)의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눌러 주었다.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폭주하듯 내달리지만, 가운 이성으로 신체를 제어했다.

나는 제자리에서 [민첩한 뒷발]로 도약했다.

빨라진 속도에 적응 못 트롤은 발악하듯 팔을 휘둘렀다.

부웅-.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가는 팔.

나는 활짝 열린 트롤의 가슴팍에 파고들어서 맹호혈조를 전개했다.

두꺼운 피부가 찢겨 가고, 솟구친 피가 눈을 어지럽힌다.

버서크의 효과로 강해진 힘은 더 깊은 상흔을 새겼다.

“여기서 끝이 아니야.”

나는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혈조공의 3초식.

혈호폭풍조로 막 벌려 은 상처를 찢어발겼다.

손톱 끝에 걸린 놈의 심장.

재생 능력이 뛰어난 트롤이어도, 심장이나 뇌를 파괴하면 죽는다.

“크어…….”

쿵, 4미터 크기의 거체가 뒤로 넘어갔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시스템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더 중요한 건.

“손대지 마. 다 내 거니까!”

레드 고블린들을 팀원에게 빼앗기지 않는 거였다.

[운류보를 전개합니다.]

파파팟!

섬전 같은 속도로 질주.

해리를 포함한 팀원들을 지나치고는 산 중턱까지 올라온 레드 고블린 무리와 부딪쳤다.

“낏, 끼잇!”

당황한 고블린의 눈망울 너머로 내 모습이 비쳐졌다.

눈에 감도는 붉은 빛.

[버서크]가 발동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크흐흐, 너희는 내 몫이야.”

[민첩한 뒷발]을 사용해서 레드 고블린 무리의 중심을 돌파.

레드 고블린 무리의 뒤를 점했다.

그 과정에서 갑피에 달린 가시에 찔려서 피를 흘리거나 튕겨 나서 쓰러진 고블린만 10마리 정도.

“끼잇! 퇴로가 막혔다!”

“낏, 미친 인간 먼저 죽인다!”

나한테 달려드는 레드 고블린들.

그 뒤로는 일방적인 학살극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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