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블루 고블린 주술사의 정수를 흡수했습니다.]
[등급: 일반]
[포식한 정수: 100%]
[민첩 + 2]
[마력 + 4]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약화의 문장이 추가됩니다.]
[약화의 문장]
등급: ★
분류: 액티브
방어력을 떨어트리는 저주의 문장을 대상에게 새긴다.
일정 시간 동안 저주의 대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장이 해당 부위에 새겨진다.
*사거리: 50미터
*1초 동안 집중 필요.
“뜻밖의 수확이군.”
즉발 형태로 발동되는 디버프.
사용 대상을 1초 동안 봐야 하지만, 범위도 제법 돼서 큰 페널티는 아니었다.
-거리가 먼 상대에게는 사용하기 힘들겠구나.
“지금이야 어차피 원거리 견제기가 마땅히 없어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에너지 볼트는 과충전을 해야 쓸 만한 파괴력이 나온다.
어둠 지배의 경우는 사거리가 제한적이고.
성취가 늘어나면 거리와 범위, 일시에 전개할 수 있는 극야의 힘도 커지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지.
“쓸 만한 스킬을 얻었어.”
일대 다수보다는 강적과의 전투에 특화된 저주.
발동조건도 까다롭지 않아서 간간히 쓰임새가 있을 것 같다.
나는 군락에 널려 있는 고블린들의 사체를 흘겨봤다.
목덜미에 달려 있는 독주머니.
개당 10만 원 정도 할 텐데.
-왜 그리 아쉬운 눈빛으로 사체를 보느냐?
“고블린 독주머니가 솜사탕 100개 가격이거든.”
닉스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
헉, 이라는 숨소리가 옆에서 튀어나왔다.
-믿을 수가 없구나!
“그러면 뭐 해. 뜯어 갈 시간도 없는 걸.”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부산물 채집 키트에는 예비용 도축 칼이 여럿 들어있다.
문제는 한가하게 고블린의 목덜미에 붙은 독주머니를 딸 시간이 없다는 것.
“아까 그 사람들 있잖아.”
-그대의 팀원들 말이더냐?
“어. 지금쯤 산 뒤쪽으로 돌아서 암벽등반을 할 거야.”
플랜 B.
레드 고블린의 비밀 병기인 늙은 트롤을 해방, 역으로 이용해서 군락을 무너트리는 공략이다.
트롤이 갇힌 곳은 정상에서 멀지 않으니.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려면 몇 시간 정도 걸릴 테지만, 나도 블루 고블린 군락을 몰살시키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후훗.
“여신님, 웃으면서 부탁해도 안 돼.”
-그대는 여가 왜 웃는지를 잘 모르는구나.
엥? 이 여신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가 그대를 도울 힘이 생겼노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랬지.”
-그 힘을 이제 보여 주겠노라.
스스스슷!
닉스의 영체가 내 그림자로 스며든다.
꿈틀거리는 극야.
-힘을 풀거라. 그리고 여에게 극야의 제어 능력을 맡기어라.
나는 순순히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발끝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암흑.
[어둠 지배]로 구현해 낸 극야의 힘이다.
그런데 말이지.
처음 극야를 익힐 때 감각을 동조했던 거랑 조금 다르다.
손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느낌.
내가 다루는 거랑 좀…… 달라.
암흑은 드라이아이스처럼 바닥에 깔렸다.
한데, 암흑에 닿은 물체의 질감이나 냄새가 느껴졌다.
손바닥을 500배 정도 키우고 지면을 훑으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잘 보아라. 이것이 진정한 극야의 힘이니라!
닉스의 외침과 함께, 땅바닥에 깔린 암흑이 수십 가닥으로 뭉쳤다.
[극야]의 힘은 여전히 5.
한 번에 구현할 수 있는 힘의 총량은 동일했다.
“이건 대체…….”
50까지 늘어난 촉수 다발.
가닥 하나에 들어가는 [극야]는 0.1이다.
하지만 얇을지언정, 고밀도로 응축되어 있다.
저 한 가닥에 내가 1의 힘을 내서 구현해 낸 촉수와 비등한 에너지가 실려 있다는 게 믿기는가?
난 입을 쩍 벌렸다.
“미친.”
-후훗, 힘의 차이가 느껴지느냐?
“여신님.”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림자를 바라봤다.
-무, 무슨 일이더냐, 계약자여.
“진짜 최고야!”
하하하하!
웃음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터져 나왔다.
닉스가 [극야]와 동기화를 이루었을 때, 신위의 자락을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그 감각을 한 번 체험한 것만으로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방법을 안 셈이다.
그뿐이랴.
닉스가 [극야]를 지배해서 서포트를 해 주면 전투 능력이 배 이상 상승하는 효과를 볼 거다.
-그리 기뻐하지 말거라. 동기화는 여에게도 부담이 되는 기술이니.
“왜?”
-이 극야는 여의 것이 아닌, 그대의 것이니라. 본질이 같아서 여가 다룰 수 있지만…… 길어야 10분이니라.
지속 시간은 10분.
다시 전개하려면 10일이 걸린다고 한다.
그 이상은 닉스한테도 부담이 간다는 모양.
“잠깐, 그런 기술을 왜 썼어?”
-여가 솜사탕을 어떻게 포기하겠느냐!
암흑 촉수 다발이 고블린들의 목에 달린 독주머니를 휘어 감았다.
툭, 투툭.
수십이나 되는 촉수가 독주머니를 휘감은 채, 내 앞에 놓았다.
-무엇 하느냐. 어서 챙기지 아니하고!
“…….”
솜사탕에 진심인 여신님이라.
미션이 끝나면 집에 솜사탕 기계라도 들여 놔야 할 것 같다.
-그대여, 조금 아래로 움직여 보아라.
“왜?”
-여가 극야를 지배해도 최대 사거리가 30미터밖에 안 되느니라.
닉스의 주문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독주머니를 땄다.
[욕망의 주머니]가 없었으면 낭패를 볼 뻔했군.
고블린들의 사체에서 독주머니를 다 건져 냈을 때 즈음.
-크읏.
닉스가 내 그림자에서 튕겨 났다.
원래 하얬던 피부이지만, 지금 보니 얼음장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괜찮아?!”
-훅, 후욱. 여는 괜찮으니라.
“동기화라는 거, 그렇게나 부담이 큰 거였나.”
-계약자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니라.
이번에 한해서는 제가 아니라 솜사탕을 위해서 그러신 것 같은데요?
마음에서 떠오른 말을 속으로 삼켰다.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키는 닉스.
나는 그동안 닉스가 다루었던 [극야]에서 전해졌던 느낌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어둠에 닿는 것들이 모두 읽히는 감각.
또한, 차원의 섭리에 다가간 것 같은 전능감도 느껴졌다.
갈 길이 멀구나.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아가야 할 길이 멀다는 건.
그 끝에 도달했을 때, 그만한 보상이 기다린다는 것이다.
극야의 힘이 극대화되었던 당시의 감각을 몇 번이고 되새길 때 즈음.
-계약자여.
닉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몸은 괜찮아?”
-이제 좀 안정이 되었느니라.
“그놈의 솜사탕이 뭐라고.”
난 닉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 무엄하구나. 여의 머리를 쓰다듬다니!
“다음에는 이런 걸로 무리하지 마.”
내 도발(?)이 부른 일.
닉스가 극야의 힘을 다룬 덕에 위로 향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닉스가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알겠느니라. 하나, 그대가 위험하면 망설이지 않고 나설 것이니라.
“그런 상황이 오면 부탁할게.”
닉스는 훗, 하고 웃더니 내 어깨에 걸터앉았다.
* * *
진호가 블루 고블린 군락을 한참 공략하고 있을 때, 해리 디아즈를 필두로 한 4인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툭, 투툭.
발에 밀린 조약돌이 아래로 굴러간다.
밀려난 돌은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수십 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한순간이라도 발을 잘못 딛는 순간…….
방금 떨어진 돌과 같은 운명이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은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가 제일 안전한 루트입니다.”
해리는 두려움에 젖어 든 팀원들을 독려했다.
그의 말대로다.
무수한 선배 플레이어들이 확보한 최적의 공략 루트.
플랜 B.
늙은 트롤을 해방하려면 이 길이 가장 안전했다.
“그 정신 나간 인간 때문에 뭔 고생이에요?”
“으그그, 보면 한 방 먹여 준다.”
“조금 더 힘내세요.”
팀원들은 미션 시작과 동시에 블루 고블린 쪽으로 뛰쳐나간 진호를 씹어 댔다.
활활 타오르는 전의.
팀원들은 위험 구간을 지나 레드 고블린의 영역에 침투했다.
“공략에 따르면 보초가 있을 겁니다.”
“적 탐색은 나한테 맡겨 줘요.”
메이 챙이 앞장섰다.
그녀의 능력은 [오감 강화].
오감 중 하나를 지정해서 증폭시키는 효과다.
능력 자체는 평범하지만, 상황에 따라 원하는 감각을 강화하는 게 가능해서 활용도가 높았다.
“시력을 강화할게요.”
메이 챙의 눈가 위에 감도는 푸른 빛.
[오감 강화]가 적용되었다.
팀원들은 메이 챙의 뒤를 따라 산자락을 천천히 올라갔다.
슥-.
앞서가던 메이는 손을 올렸다.
“전방 100미터. 고블린 다섯 마리가 있어요.”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됩니다.”
“형씨. 나한테 은신 스킬이 있으니 맡겨 줘.”
피터가 나무에 몸을 기댔다.
흐릿해지는 형상.
주변의 풍경에 동화되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피터의 고유 능력, [동화]가 은신 스킬 효과를 강화시켰다.
잠시 후.
고블린 무리 근처로 다가간 피터가 단검을 휘둘렀다.
푸악! 목덜미에서 초록 피가 솟구쳤다.
“지금입니다. 돌격!”
해리를 필두로 한 팀원 셋의 공격.
“끼익!”
당황한 고블린들은 해리와 피터 사이를 번갈아 가면서 봤다.
이어지는 전투.
팀원 하나가 독침에 맞아서 둔해졌지만, 큰 피해 없이 고블린들을 해치웠다.
“우리 제법 잘 맞잖아?”
“훅, 그러게요.”
으스대는 피터.
메이가 그 말에 동의했다.
“이대로만 쭉 가면 미션 클리어도 어렵지 않겠습니다.”
해리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미션 진행에 초를 친 진호를 생각하면 화가 났지만.
팀원들끼리의 호흡은 최고였다.
‘느낌이 좋아.’
해리와 팀원들은 신뢰가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 * *
나는 산 동부를 초토화시킨 후, 중심부로 발걸음을 돌렸다.
-꽤 서두르는구나.
“지금쯤 트롤 감옥 근처까지 갔을 거야.”
늙은 트롤.
말 그대로 늙었다.
바벨탑 중층에서나 나오는 진짜 ‘트롤’에 비해 약할뿐더러 재생 능력도 변변찮다.
그럼에도.
타고난 종족 값이 다르기에, 놈을 풀어놓고 유도만 잘하면 레드 고블린 군락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게 가능했다.
[운류보를 사용합니다.]
쭉쭉 나아가는 몸.
지금은 내공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끼잇! 침입자다!”
이번에는 붉은 띠를 이마에 두른 고블린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레드 고블린.
블루 때와 마찬가지로 산자락 곳곳에 기지를 구축해 놓았다.
-그자들처럼 산자락 위로 가지 않느냐?
“돌아가. 그럼 늦어.”
나는 암흑을 피워 올렸다.
닉스처럼 세련되지 않은 운용 방식.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끼이잇!”
“낏!”
달려들던 레드 고블린들이 사방으로 튕겨 났다.
나는 아쉬운 눈빛으로 고블린의 사체를 흘겨보았다.
“저놈들을 포식하는 건 나중이다.”
-고블린의 정수는 이미 취하지 않았더냐?
“아, 그게 색이 다르면 다른 종으로 취급되더라고.”
바벨탑 시스템의 빈틈인 걸까.
두른 띠의 색깔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종인데도 뱉는 정수의 종류가 달랐다.
“지금은 앞만 볼 거야.”
나는 [민첩한 뒷발]로 고블린 기지를 뛰어넘었다.
앞길을 막는 놈들만 최소한으로 쓰러트리고, 늙은 트롤을 가둬 놓은 장소로 향했다.
한달음에 산자락을 올라가니, 목적지가 금방 눈에 들어왔다.
“어? 저 사람, 아까 그 한국인이에요!”
“잠깐만, 저 트롤 새끼가 여기에서 왜 튀어나와?”
“피터 씨, 트롤은 저기 있어요.”
“아우, 그 말이 아니라…….”
당혹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팀원들.
그중 리더 격인 해리는 늙은 트롤을 가둬 놓은 동굴 문을 막 열어젖히려고 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네.
나는 다시 한번 지면을 차면서 포효를 내질렀다.
“하아아아-!!”
한순간 몸을 움찔거리는 팀원들.
그 작은 틈이면 충분했다.
나는 해리를 밀치고는 동굴 앞에 섰다.
“이게 무슨……!”
“내 먹이에 손대지 마.”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등 뒤에서 솟구친 암흑 칼날들이 나무로 만든 동굴 입구를 산산조각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