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한수창 인사팀장과의 대담을 마친 후.
다시 종합상가에 들렀다.
-아까 방문했던 곳 아니더냐?
“살 게 좀 있어서.”
중급 포션(2) - 1억.
부산물 채집 키트(1) - 2천만.
중급 포션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보험.
부산물 채집 키트는 도축용 칼이나 혈액 추출 장비 등, 괴물 사체에서 값나가는 부위를 채집하는 장비다.
[포식]으로 해당 종족의 정수를 모두 흡수하면, 남은 사체들한테서 건져야 하지 않겠어?
튜토리얼 1위 보상으로 욕망의 주머니를 받은 덕에 부산물을 챙기기 한결 편해졌다.
남은 돈 4억은 통장에 그대로 두었다.
괜찮은 장비를 사려면 돈이 더 필요해.
반지나 목걸이, 반지 같은 장신구는 최소가 [매직] 등급이다.
노멀이나 언커먼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고, [매직]급 장비도 비싼 데 비해 성능이 떨어졌다.
차라리 돈을 더 모아서 최소 [레어]급 장비를 사는 게 이득이리라.
투자할 만한 기업이라도 외워 둘걸.
국내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을 몇 개 기억하고 있지만, 몇 년은 지나야 벌어질 일이라 당장에는 의미가 없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데 회귀해서 투자할 기업 알아볼 정신이 있었겠어?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탑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다시 바벨탑으로 가야겠구나.
“왜?”
-그곳으로 나오지 않았더냐.
“아, 튜토리얼만 그래.”
나는 휴대전화를 가볍게 흔들었다.
스마트폰에 설치된 무수한 앱.
그중, 기다란 탑 모양을 한 아이콘이 하나 보였다.
“이거 하나만 누르면 되거든.”
휴대전화, 컴퓨터. 그 외에도 와이파이 송신이 가능한 단말기라면 모두 탑으로 연결된다.
-신기하구나.
“편하게 들어오라는 고신족의 수작질이지.”
바벨탑은 이른바, 커다란 와이파이 중계기 같은 거다.
튜토리얼을 마친 플레이어들은 적당한 단말기만 있으면 어디서든 탑의 미션에 도전할 수 있다.
동화 수치는 접속 중인 플레이어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빠르게 올라가거든.
나는 앱 아이콘을 꾹 눌렀다.
[바벨탑 접속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합니다.]
[현재 사용자가 머무는 공간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접속됩니다.]
[도전 가능한 층계는 1층입니다.]
[1층에 도전하시겠습니까?]
[Y/N]
Y 버튼을 누르자, 화면 중심부에 생긴 원이 빙글빙글 돌았다.
[1층 미션을 매칭 중입니다.]
[매칭 범위 - 글로벌 서버]
[2/5]
[4/5]
[5/5]
[글로벌 팀(463)으로 매칭이 완료되었습니다.]
[60초 후에 1층 미션을 시작합니다.]
금방 잡히네.
저 463이라는 숫자는 동시에 1층 미션을 진행 중인 팀을 가리키는 거다.
개별로 진행되는 미션이라서 큰 의미는 없지만.
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두두둑, 시원한 소리와 함께 몸이 쫙 풀렸다.
-다시 도전하는구나.
“여신님과의 약속도 지켜야 하잖아.”
-그대만 믿고 있겠노라.
휴대전화 화면에 표기된 시간이 0이 되는 순간.
강렬한 빛이 액정 너머로 솟구치더니 내 전신을 휘감았다.
* * *
히스패닉계 미국인, 해리 디아즈.
그는 며칠 전에 튜토리얼 스테이지를 통과했다.
어엿한 플레이어가 된 후, 해리는 자신감으로 넘쳤다.
‘나도 유명인이 될 수 있어!’
플레이어로 성공해서 사람들의 인기를 사겠다는 목표!
의욕에 가득 차서 공략을 달달 외운 후에야 1층 미션에 도전할 수 있었다.
해리는 감았던 눈을 떴다.
짹! 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산이 망막을 가득 채웠다.
탑 1층.
미션 장소인 드레이낙산이다.
[바벨탑 - 1층]
[드레이낙산에 입장했습니다.]
[미션 - 레드 고블린 토벌]
레드 고블린 군락은 오랜 세월 동안 드레이낙산의 지배 세력으로 군림했습니다.
고블린의 통치를 무너트려서 산의 주민들에게 평화를 돌려주십시오.
산에는 레드 고블린을 적대하는 종족이 많습니다.
각 종족의 이해관계를 파악하면 군락 토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목표: 레드 고블린 군락 붕괴
[5분 후에 미션이 시작됩니다.]
[장비나 역할 분배, 혹은 정보 등 미션 수행을 준비해 주십시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해당 스테이지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푸른 막.
푸른 막 중심에는 이번 미션에서 팀원으로 선정된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와, 진짜 휴대폰으로 접속이 되잖아?”
“나는 PC로 들어왔는데요.”
“저기요. 지금 영어 안 쓰는 거 맞죠?”
제각각 할 말을 하면서 떠드는 플레이어들.
1층 미션은 전 세계의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매칭을 잡는다.
그래서 이 팀처럼 다국적으로 팀원 구성이 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오프라인에서 따로 팀을 구축해서 도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해리처럼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은 앞으로 자주 겪을 일이었다.
‘내가 나서야 해.’
탑 1층은 튜토리얼과 진행 양상이 전혀 다르다.
다섯이나 되는 팀원이 호흡을 맞춰야 클리어가 가능한 난이도!
해리는 매칭 버튼을 누르기 전, 탑 공략을 다섯 번이나 정독했었다.
미션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5분.
그 정도면 팀원끼리 의견 교환을 하기에 충분했다.
해리는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당신, 동양인?”
“한국인이다.”
“오우, 반가워. 난 해리라고 해.”
“유진호.”
“한 팀이 된 것도 인연인데 잘해 보자고.”
손을 내미는 해리.
진호는 그 손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낯을 많이 가리는 친구네.”
해리는 머쓱해하며 손을 거두고는 다른 팀원에게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메이 랭, 중국인이에요.”
“피터, 영국 출신. 반갑수다.”
“전…….”
이번에 매칭된 팀원과 인사를 한 해리.
짝짝!
박수를 두 번 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들 공략은 숙지하셨겠지만, 혹시 모르니 브리핑 한 번 하겠습니다.”
-레드 고블린 군락은 일반적인 플레이어의 수준으로 절대 공략할 수 없다.
-따라서 미션 클리어를 위해서는 산에 머무는 다른 세력들을 이용해야 한다.
-이용 가능한 세력은 다음과 같다.
플랜 A. 블루 고블린(난이도 下)
플랜 B. 노예 트롤(난이도 中)
플랜 C. 빛의 숲 연맹(난이도 上)
1층 공략법을 한참 동안 설명한 사내.
“모두 이해했죠?”
“네.”
“첫 번째로 갈 거죠?”
중국 출신 플레이어, 메이가 손을 들어서 질문했다.
“그래야죠. 셋 중 가장 쉬운 방법이잖아요.”
“리더는 아저씨가 하는 거고요?”
“아저씨라니…….”
끙, 앓는 표정을 짓는 해리.
영국 출신 플레이어, 피터가 큭큭 하고 웃었다.
“형씨가 해 주쇼. 가장 적극적인 양반 말 듣는 게 낫겠지.”
“감사합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도 괜찮으신 거죠?”
침묵하는 진호.
해리는 그 반응을 무언의 승낙이라고 여겼다.
[5분이 지났습니다.]
[1층 미션이 시작됩니다.]
[플레이어 여러분의 무운을 빕니다.]
주위를 감싸고 있던 푸른 막이 사라졌다.
“우선 레드 고블린 보초의 위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신중하게 움직여…….”
해리는 말끝을 흐렸다.
바짝 뜨이는 두 눈동자.
망막에 비치는 건 산 동쪽으로 뛰어가는 진호의 모습이었다.
“유진호 씨?!”
“잠깐만, 그쪽은 블루 고블린 군락이 있는 방향이잖아.”
“블루 고블린을 자극하면 첫 번째 작전은 못 쓰는 거 아니에요?”
팀원들은 공황에 빠져서 서로를 흘겨보기만 했다.
그중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해리였다.
진호를 붙잡으려고 뛰어가는 해리.
“허억, 헉.”
하지만 진호가 가볍게 내디딘 한 걸음을 따라잡으려면 다섯 걸음을 떼어야 했다.
급격하게 멀어지는 거리.
진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가만히들 있어.”
“예?”
“방해하지 말고.”
그는 무심하게 한마디를 내뱉은 후, 팀원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팀원들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진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잠시 후.
“미친 트롤 새끼.”
욕설을 내뱉는 영국 출신 플레이어.
“아저씨, 어쩌죠?”
“자, 잠시만요. 상황 정리를 좀 해야…….”
해리는 눈을 좌우로 돌리면서 미리 숙지해 놓은 공략 내용을 되새김질했다.
* * *
나는 지면을 박차면서 앞으로 달려갔다.
-계약자여, 저들을 방치해 둬도 되는 것이더냐?
“언제 다 설명해.”
따분하다는 감정이 목소리에 베어 나왔다.
정석적인 공략?
선발대 플레이어들의 조언을 따르면 안전하긴 하겠지.
그렇지만, 공략대로 진행하면 보상이 줄어든다.
이번 미션의 핵심은 레드 고블린을 얼마나 죽이느냐.
군락을 무너트리는 것과 별개로, 점수 책정은 베어 넘긴 고블린의 머릿수에 따라 결정된다.
“두 군락을 싸움 붙이면 내 몫이 줄어들잖아.”
-과연. 그대다운 생각이니라.
“나다운 게 뭔데?”
-그것을 왜 여에게 묻느냐.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터.
어째 묘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닉스를 더 추궁하고 싶지만, 나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켰다.
사실 이유가 하나 더 있지만, 그건 말 못 하지.
난 회귀 전의 인연을 떠올렸다.
파괴 군주, 세르게이.
러시아의 플레이어이자, 나와 마찬가지로 ‘군주’의 칭호를 받은 강자다.
세르게이는 회귀 전, 그가 얻었던 기연 몇 가지를 알려 주었다.
그중 하나가 1층에 숨겨져 있다.
-야, 과거로 돌아가면 그거 꼭 얻어라.
회귀에 필요한 성유물들을 모으고 다닐 때, 그 녀석은 1층의 보상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오냐, 네놈이 알려 준 기연. 확실하게 접수해 주마.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3미터 높이의 나무 탑.
그 아래에는 엉성하게 만든 목책이 드문드문 설치되어 있다.
고블린 전진기지다.
“키익, 킥!”
“킥, 침입자다.”
푸른색 두건을 이마에 두른 초록색 괴물.
블루 고블린이 나를 발견했다.
탑 위에 올라선 녀석이 경보를 울리자, 기지에 머무는 고블린들도 전투준비를 갖췄다.
“키익!”
“킥, 키익.”
목에 건 대롱을 일제히 입에 무는 고블린 무리.
대롱의 끝이 나를 향했다.
피융! 피융!
미세한 소음과 함께 날아드는 작은 침.
-계약자여, 저 작은 건 무엇이더냐?
“독침.”
고블린의 피에 독초를 조합한 마비 독을 잔뜩 발라 놓은 침이다.
-음험한 것들이로구나. 독을 쓰다니!
“힘이 약해서 그래.”
-저 숫자에 독이라고 하면, 조금 위험하지 않느냐?
나는 [가시 갑피]를 전신에 두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티티팅!
가시 갑피의 내구도를 1%도 깎아내지 못한 채,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독침들.
고블린이 독침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저놈들, 힘이 약하거든.
고블린의 신체 능력은 튜토리얼에서 마주친 실버 팽보다도 떨어졌다.
독침.
그리고 단체 행동에 익숙한 것.
두 가지 요소가 더해져야 실버 팽보다 조금 더 위험한 정도다.
한데, 주력 무기인 독침이 나한테는 안 통하네?
“저놈들은 이제 제 밥입니다.”
나는 고블린 무리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허공에 사선을 긋는 손톱.
맹호혈조를 한 번 펼치자, 초록색 피가 비산했다.
“키익! 다섯이 당했다!”
“킥! 죽여라!”
블루 고블린들은 방망이나 돌칼로 내 다리를 두들겼다.
깡! 깡!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1% 감소했습니다.]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0%…….]
고블린들이 타격할 때마다 아른거리는 메시지.
하지만 포위 공격을 당하는데도, 내구도 소모가 거의 없었다.
[탐욕의 가호]로 강화했으면 흠집조차 나지 않았을 것 같네.
[가시]와 [갑피], 그리고 [철비늘]을 엮어 낸 능력.
3성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내구도만 놓고 보면 [매직] 등급 장비를 상회할 거다.
“정수를 박박 긁어모은 보람이 있네.”
난 히죽 웃으면서 [극야]의 힘을 구현했다.
스스슷-!
[어둠 지배]로 실체화된 칼날.
발아래에서 솟구친 암흑의 칼들은 10미터 안에 있는 고블린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피융!
먼 곳에 있는 고블린이 다시 한번 독침을 쐈다.
[혈조공을 사용합니다.]
내 손톱은 대롱에서 쏘아진 독침의 궤도를 읽어 내고 한 치의 오차 없이 쳐 냈다.
-그대에게 해를 끼칠 공격은 아닌 것 같다만, 굳이 그러는 이유가 있느냐?
“혈조공 성취도 올려야지.”
무공 이해도.
이렇게 공격을 받아치거나 궤도를 읽어 내면 성취가 더 빠르게 올라간다.
10초. 블루 고블린 무리를 정리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계약자여, 저기 한 마리가 도망가느니라!
아, 정정해야겠네.
하나를 살려 보냈으니 전멸은 아니구나.
“내버려 둬도 돼.”
-침입 사실을 알면 방비를 굳히지 않겠느냐?
“그러라고 놔준 거거든.”
블루 고블린의 영역은 산 동쪽 대부분이다.
전진기지가 수십 개는 더 있을 텐데, 그걸 언제 다 찾으러 다니겠어?
“모아 놓고 처리하는 게 편하잖아.”
-이런 걸 보면 누가 괴물인지 모르겠구나.
닉스의 한탄(?)이 초토화된 전진기지의 분위기를 한층 더 가라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