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철퍽, 철퍽.
신준석이 진흙으로 뒤덮인 땅을 밟으면서 다가온다.
등 위로 솟구치는 하얀 기운.
실체화된 기가 주위의 공기와 맞닿으니, 신기루처럼 풍경을 일그러트렸다.
덤프트럭이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 같은 압박감.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도 숨이 턱 막혔다.
“경신법은 안 쓰는 겁니까?”
“내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해 주게나.”
경신법을 펼치면 머드 트랩 정도야 한달음에 떨칠 수 있을 거다.
그럼 대련은 그 자리에서 바로 끝났겠지.
“쓰게 될 겁니다.”
한 방 먹이는 데는 성공했다.
실질적인 피해는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국내 10위 안에 드는 랭커를 조금 물러나게 했다.
남은 과제는 하나.
신준석의 ‘전력’을 끌어내는 거다.
주력 무공인 폭호신권도 펼치게 했으니, 이제 하나만 남았군.
호감을 산다는 목적은 달성한 것 같지만.
두 번째 목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에너지 볼트를 사용합니다.]
푸른 구체가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신준석은 구체를 노려보더니.
퍼엉!
주먹을 뻗었다.
그 순간, [육감]이 매서운 경고음을 날렸다.
머리를 우측으로 트는 순간, 주먹에서 솟구친 기파가 옆을 스쳤다.
신준석의 주먹에서 솟구친 권기가 에너지 볼트를 지워 낸 데 이어 내가 있는 곳까지 솟구친 거다.
기를 형상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방출까지 하다니.
2025년에도 충분히 괴물이었구먼.
기파가 머리를 스친 것만으로 골이 울렸다.
“후배 죽일 생각입니까?”
“아, 미안하군. 너무 흥이 나서 말일세.”
“…….”
권기 방출의 사거리는 10미터 언저리.
사정거리 끝에 걸린 덕에 회피가 가능했다.
원래 저런 양반이었지.
후, 실전 느낌 나고 아주 좋구먼.
나는 뒤로 더 물러났다.
권기의 최대 방출 범위에서 멀어질 생각이다.
“아무 대책 없이 거리를 벌리는 건 용납 못 하네.”
신준석은 걸음에 속도를 올리면서 내 뒤를 빠르게 쫓아왔다.
내 스펙이 100레벨 초반대의 플레이어 버금간다지만, 신준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경신법 없이도 떨쳐 낼 수 없는 속도.
하나, 나에게는 여태 흡수해 온 [정수]들이 있다.
[블레이즈를 사용합니다.]
화르륵!
주홍색 불이 막 지나간 족적 위로 솟구쳤다.
나는 원을 그리듯 빙글빙글 돌았다.
“후배님, 자꾸 신기한 능력을 하나씩 꺼내 드는군.”
“제 고유 능력이 좀 대단해서요.”
“무공을 그만큼 익힌 것도 놀라운데 말이야.”
발에 힘을 주는 신준석.
속도를 올리면서 2미터 넘게 솟구친 불길을 뚫고 직진 거리로 달려들었다.
“이러면 어떻게 할 셈인가!”
정면.
신준석의 주먹이 일순간 커다랗게 보였다.
전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기세.
그래. 여기까지는 예상대로다.
‘내 실력만으로는 신준석에게 닿을 수 없어.’
힘.
속도.
동체 시력, 내공. 그 어느 것 하나 신준석을 앞설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앞서는 게 딱 하나가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적과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격언이다.
회귀하기 전, 신준석과 꽤 연이 있던 만큼 무공을 펼치는 습관도 잘 알고 있었다.
보고 피하는 게 아니다.
신준석의 행동을 내 의도대로 유도하는 거다!
‘첫 공격은 무조건 정면.’
나는 신준석이 불길을 뚫고 전진하는 순간, 예측한 대로 움직였다.
[블레이즈]를 펼친 건 타격을 입히려는 게 아니었다.
신준석의 움직임을 고정시키는 작업.
이렇게 불꽃을 전개하면 무리하게 뚫으면서 정면으로 돌파하는 게 그의 전투 스타일이어서다.
부웅!
바람을 찢는 신준석의 정권.
“호오, 감이 좋은 건가?”
첫 번째 공격을 흘려보내면 다음은 폭호신권의 두 번째 초식이다.
권투의 잽처럼 빠르게 쏟아지는 주먹.
이건 내 속도로는 피할 수 없다.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시커먼 막이 겹쳐지면서 날아드는 주먹을 방어했다.
쾅! 쾅! 연속적으로 터지는 폭발음.
방어막 하나가 폭호신권의 두 번째 주먹을 받아 낸 시간은 0.1초도 안 되었다.
다섯 개를 모두 방어로 돌렸으니, 번 시간은 0.4초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해.’
신준석이 폭호신권을 펼치는 걸 보고 움직이면 늦는다.
발끝의 방향.
어깨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고 회귀 전 지식과 대조해서 예측해야 한다.
다시금 허공을 휘젓는 하얀 권기.
신준석의 눈동자에서 의아함의 빛이 새어 나왔다.
“2권까지 흘려보낼 줄은.”
붕! 부웅!
폭호신권의 묘리를 담은 주먹이 연이어 쏟아졌다.
세 번째 공격.
이번에는 온전히 피하는 게 불가능해서 [가시 갑피]에 [탐욕의 가호]를 둘렀다.
침식 작용으로 강화된 갑피.
폭호신권의 권기에 닿자, 순식간에 분쇄되었다.
갑피로 감싼 부위가 아릿했지만, 참았다.
피부를 스치기만 해도 결판이 날 정도의 위력.
주먹 하나를 흘려보낼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렸지만, [냉혈]이 평정심을 유지하게 도와줬다.
난 계속 뒤로 물러나면서 주먹을 뻗은 숫자를 셌다.
다섯, 여섯.
그리고 일곱 번째 주먹이 뻗어지는 순간.
내 눈동자가 번뜩였다.
이때를 기다렸어!
나는 처음으로 반격에 나섰다.
사두조.
혈조공의 네 번째 초식을 펼치자, 기묘한 각도로 틀어진 팔이 신준석의 겨드랑이 쪽을 파고들었다.
현시점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신준석의 빈틈.
폭호신권 7초식을 펼칠 때 숨을 들이마시면서 힘을 쭉 빼는 거다.
무공을 펼치는 당사자도 모르는 틈이니.
일곱 번째 초식을 펼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흠?!”
신준석은 놀란 기색으로 막 뻗던 주먹을 되돌렸다.
분명히 공격을 먼저 전개한 건 신준석이었지만, 내가 펼친 사두조는 한발 늦게 펼쳤음에도 그의 빈틈을 정확하게 노렸다.
공격을 거둔 신준석.
거친 바람이 불더니, 그의 신형이 뒤로 쭉 멀어졌다.
폭풍보, 일류 무공으로 분류되는 경신법이다.
“바, 방금…… 어떻게?!”
경악으로 물든 신준석의 목소리.
놀랄 만도 하지.
내 공격은 그야말로 ‘의표’를 찔렀으니까.
“후욱, 훅.”
나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공격을 성공시키려고 한계 이상으로 육체를 혹사했다.
권기에 스친 부위가 파르르 떨렸다.
[철비늘]로 강화한 [가시 갑피]로도 권기를 막아 내는 건 무리였다.
조금씩 쌓이는 충격.
[대지모신의 가호]가 아니었으면 간접적으로 쌓인 충격 때문에 진즉에 쓰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신준석은 눈을 부릅뜬 채, 내가 호흡을 가다듬을 때까지 기다렸다.
“호흡입니다, 후욱.”
“호흡?”
“네. 일곱 번째 주먹을 뻗으실 때,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라고요.”
폭호신권의 특징은 상대를 무자비하게 몰아붙이는 거다.
연달아 무공을 전개하다 보면 호흡이 일그러지면서 필연적으로 틈이 생긴다.
-그 틈 때문에 요단강 익스프레스 탈 뻔했다.
요단강이라는 표현은 또 어디서 들었대.
걱정하지 마라.
당사자인 신준석한테 들은 이야기.
이보다 더 확실한 약점이 어디 있겠어?
신준석은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연신 허공에 주먹을 뻗다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군. 폭호신권에 이런 약점이 있었을 줄이야.”
“이 정도면 무공을 받을 자격은 충분하겠죠?”
나는 씩 웃었다.
* * *
대련을 마친 후.
“아고고고.”
나는 신음을 흘렸다.
-계약자여, 몸은 좀 어떠느냐?
“음, 죽을 것같이 아프지만 괜찮아.”
팔과 다리, 몸통을 스친 권기.
갑피로 충격 대부분을 흡수한 덕에 눈에 띄는 외상 같은 건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골골대는 건 권기의 특징이다.
유형화된 기(氣)는 스치기만 해도 적의 신체에 스며든다.
사용자의 의념이 깃든 기.
기는 상대의 근육을 조금씩 찢어내고 마나나 기 운용을 방해한다.
무공 사용자가 대적하기 까다로운 이유다.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덜 아픈 모양이구나!
찰싹!
“아야, 아프잖아.”
-그대는 더 아파도 되느니라.
“왜 그러는데?”
-분명히 여가 힘을 보탠다고 하지 않았더냐!
닉스는 볼을 부풀린 채, 분통을 터트렸다.
“미안. 저 양반한테는 내 순수한 힘으로 부딪치고 싶었거든.”
신준석의 마음을 확실하게 살 수 있는 방법.
닉스가 힘을 빌려주었으면 효과가 조금 덜했을 거다.
-흥이니라.
고개를 홱 돌리는 닉스.
으음.
여신님이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
“후배님, 미안하게 되었군.”
“뭐가 말입니까?”
“대련에서 너무 진심이 된 것 같아서 말이야.”
허허- 하고 웃는 신준석.
얼굴에는 부끄러움과 미안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제가 그만큼 대단했나 보죠.”
“후배님의 실력이 뛰어난 건 인정하지.”
신준석은 아까 보여 줬던 [운류보] 스킬 북을 내밀었다.
“이건 후배님 거야.”
“선배님한테 인정받은 겁니까?”
“인정은 무슨. 오히려 내가 고맙지.”
신준석은 한마디를 던지고는 돌연 눈을 감았다.
폭호신권의 빈틈.
무공이 지닌 태생적인 틈을 어떤 식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듯했다.
대화 중에 상념에 빠진 신준석을 둔 채, 난 책자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운류보를 습득했습니다.]
운류보
등급: ★★★
분류: 액티브
성취: 1성[0%]
총 16걸음으로 이루어진 경신법.
전개 중에 내공을 추가로 소모하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방향 전환이 가능하다.
*전개 시 내공 스텟 필요.
운류보.
내 기억과 큰 차이가 없는 경신법이다.
속도도 빠르고 방향 전환이 자유로운 대신, 소모되는 내공 양이 많은 게 단점인 무공.
“딱 좋아.”
나한테는 이미 [민첩한 뒷발]이 있다.
탑을 오르다 보면 여러 정수를 합치면서 기동력 관련 스킬도 여럿 얻을 수 있을 거다.
운류보의 단점은 장기전으로 들어섰을 때 지속력이 떨어지는 것.
내공이 부족하면 마나 기반 스킬로 속도를 올리면 되니, 운류보가 지닌 약점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내력 운용 구결을 몇 번이고 되뇌고 있을 때, 신준석이 감았던 눈을 떴다.
“기다려 줘서 고맙네.”
“중요한 순간 같아서요.”
“후배님이 찌른 의표를 곱씹어 보던 중, 작은 깨달음을 얻었어.”
파르르.
신준석의 주변을 감싼 공기가 잘게 떨렸다.
무공 사용자들은 일반적인 플레이어와 달리 ‘깨달음’을 얻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국내에서 무공 사용자가 천대받는 것도 저 이유.
스킬 북을 익히는 것보다 성장과정이 너무 까다로워서다.
나중에는 저 상황이 역전되지만.
어느 길을 걷든, 결국 깨달음이 필요하니까.
뭐, 그건 나중의 이야기고.
나는 상념을 지웠다.
“원래는 후배님에게 뭐 하나라도 주고 싶어서 온 건데, 내가 더 받아 버렸군.”
“뭐, 나중에 비급이라도 챙겨 주십쇼.”
“필요한 무공이라도 있는가?”
“각(脚), 조(爪), 장(掌)법이요.”
“전신을 모두 단련할 생각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칙적으로는 한 길을 파는 걸 추천하지만, 후배님은 왠지 가능할 것 같군.”
암요.
내 예전 별명 중 하나가 걸어 다니는 흉기였거든.
[포식]으로 쌓아 올린 최고의 재능으로 박투와 관련된 무공을 모두 극성까지 익히기도 했었다.
“알겠네. 최근 무공 비급 매물을 구하기가 조금 어려워졌지만, 내 힘을 써 보지.”
“무공 비급이 왜요?”
“중국에서 무공 비급을 모으고 있거든.”
아, 그런 일도 있었지.
중국은 ‘무림’이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그렇기에, 무공의 효율이 낮은 시점에서부터 공격적으로 투자를 했다가 탑 경쟁에서 쭉 밀려난 적도 있다.
나중이 되어야 그 투자가 조금 빛을 발했지만.
탑이 열린 지 얼마 안 됐을 때 주력 투자를 엉뚱한 곳에 해 버린 탓에 상위 경쟁에서 큰 힘을 쓰지 못했다.
지금이 그 시기였구나.
뭐, 내가 주력으로 익힐 무공은 11층에서 구할 수 있으니까.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힘닿는데 까진 구해보겠네. 이건 내 연락처이니 언제든지 연락 주게.”
신준석은 명함을 내밀었다.
후후, 이로써 과거의 연이 하나 이어졌구나.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투박한 명함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