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인상.
짧은 스포츠머리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눈꺼풀을 반쯤 떠서 언뜻 보면 나른해 보이는 인상이다.
하지만 그 아래에 감도는 눈빛은 여느 사람보다도 강렬했다.
신준석.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플래티넘 등급 플레이어.
정상급으로 손꼽히는 무공 사용자는 날 보자마자 악수를 청했다.
“이야, 유명인을 여기서 보는군요.”
“유명도만 놓고 보면 신준석 플레이어만 하겠습니까?”
“오, 알아봐 주시니 영광이네요.”
“모를 리가 없죠. 국내 랭킹 10위 안에 들어가는 분을요.”
“과찬입니다.”
신준석은 허허로이 웃음을 흘렸다.
“선배님이신데, 말씀 편하게 하시죠.”
“흠, 그래도 초면인데.”
“제가 평소에도 존경하던 무공 사용자이시니, 말을 높이면 불편합니다.”
난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내뱉었다.
회귀 전에는 가까운 사이였으니, 진실과 허구가 반쯤 섞인 셈인가.
“그렇다면 말을 편하게 하겠네, 후배님.”
신준석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근데 무공 판매자가 선배님일 줄은 몰랐습니다.”
“국내에 풀린 무공 비급 중 상당수는 내가 내놓은 매물이라네.”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는 신준석.
“어떤 분이 무공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걸 확인하려고 선배님이 직접?”
“무공에 매진하는 플레이어 숫자가 많지 않으니까.”
신준석의 입가가 쓴웃음으로 물들었다.
내 예상대로군.
신준석의 무공에 대한 집착은 회귀 전과 차이가 없었다.
아니, 도리어 눈가에 감도는 열망을 보면 내 기억보다 더 강해 보였다.
반 정도 감은 눈으로 나를 훑어보는 신준석.
잠시 후, 짧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후배님, 내공이 단전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군.”
“그래 봐야 삼류 무공입니다.”
“아. 그게 아니라, 진짜로 무공을 익힌 플레이어라면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그래.”
신준석은 책자를 내밀었다.
원래 내가 구매하려고 했던 아이템, [운류보] 스킬 북이다.
“큰 값어치를 지닌 비급은 아니다만, 후배가 쓰게.”
“돈을 안 받겠다고요?”
“무학에 매진하는 후배님을 본 것만으로 충분해.”
역시.
생각대로다.
이 남자, 무공 하나에는 진심이야.
나는 짐짓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그냥 받는 건 내키지가 않는군요.”
“별 볼 일 없는 선배의 후배 사랑이라고 여겨 주면 안 되겠나?”
“제가 빚지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요.”
끙, 하고 신음을 흘리는 신준석.
“그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호의를 받는 측에서 조건을 제시하는 기괴한 상황.
신준석은 묘한 흐름을 인지하지 못한 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련을 벌여서 선배님을 만족시키는 것.”
“후배님이랑…… 대련을?”
“예.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 * *
갑작스럽게 성사된 대련.
우리는 종합상사 근처에 있는 트레이닝 센터로 장소를 옮겼다.
200평 크기의 넓은 강당.
나는 텅 빈 강당에서 신준석을 마주했다.
“갑작스러운 대련 제안이라.”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신준석.
그러면서도, 입가에 감도는 미소를 감추진 못했다.
타고난 무공 매니아라 그런지 이 상황 자체를 꽤나 즐기는 듯했다.
아니, 내가 기억하는 신준석이라면, 말은 안 해도 100% 만족하고 있을 거다.
“이번 기회에 선배님께 가르침을 청하는 거죠.”
뭐, 그것도 내가 대련에서 사람 구실은 해야 신준석의 마음을 완전히 살 수 있을 거다.
물론, 신준석의 마음을 잡을 정도의 ‘대책’은 이미 다 마련했지만.
-그대여, 갑자기 웬 대련이더냐?
“어쩌다 보니.”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래의 지식을 활용, 신준석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대련을 벌인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승산은 어느 정도라고 보느냐?
“10분 정도.”
-호오, 그 안에 승부를 내겠다는 것인가.
“아니. 10분 버티면 잘한 거라고.”
신준석은 현 시대에도 국내에서 두 손 안에 꼽히는 플레이어다.
먼 미래에서도 랭킹에서 밀리지 않을 만큼 뛰어난 실력과 자질을 지녔고.
반면 나는 갓 튜토리얼을 통과했다.
뭐, 실제 스펙은 탑 저층 구간 정도는 씹어 먹을 수 있는 정도이지만…… 탑급 플레이어에게 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 방만 먹이면 성공한 거야.”
나는 짧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풀었다.
“준비는 끝나셨나, 후배님?”
“예.”
“후배님을 상대하는 거니, 3초 양보하겠네.”
손가락 셋을 펼치는 신준석.
“그럼 사양 않고.”
[민첩한 뒷발을 사용합니다.]
50미터의 거리가 한순간에 좁혀진다.
내 움직임을 쫓는 신준석의 눈.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는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괴물의 시선을 한순간이라도 흔들 수 있었지만, 국내 10위권 랭커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난 손톱을 쭉 내민 채, 혈조공의 첫 초식인 맹호혈조를 펼쳤다.
[탐욕의 가호]로 강화된 손톱.
“호오, 그 기운은?”
신준석은 놀란 기색으로 내 손을 직시했다.
후웅!
매서운 기세를 담은 손톱이 허공을 가른다.
몸을 트는 신준석.
사선으로 내리긋는 맹호혈조가 헛되이 공기를 갈랐다.
난 2초식으로 이어 가는 대신, 하나를 건너뛰었다.
3초식, 혈호폭풍조.
맹호혈조를 펼친 손을 거두지 않고, 그 힘을 추진력 삼아서 전신을 회전시켰다.
360도 돌면서 펼치는 3초식.
다리를 회전축으로 삼아서 더 센 힘으로 밀어붙이는 기술이다.
“호오, 초식에 대한 이해도가 대단하군!”
감탄사를 터트리는 신준석.
실전에서는 좀처럼 활용하기 힘든 기술이지만.
그가 3초를 먼저 양보한다고 선언한 덕에 큰 기술을 사용했다.
신준석은 회피하지 않고 팔뚝을 X 자로 교차했다.
카가가각!
손톱 끝에서 불똥이 튀었다.
[탐욕의 가호]와 내공, 그리고 마나가 더해지면서 철판마저 찢어발길 수 있는 손톱이지만, 신준석의 팔뚝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역시, 전신이 흉기인 무공 사용자답다.
나는 혈조공의 마지막 초식을 펼쳤다.
쭉 편 왼손에 집중된 내공.
파파팟!
뱀이 먹이를 노리듯, 좌우로 흔들거리더니 훤히 드러난 신준석의 복부로 파고들었다.
사두조.
뱀의 머리를 닮은 초식이다.
“여기서 빈틈을 노릴 줄은 몰랐는데.”
함박웃음을 짓는 신준석.
내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오른팔을 휘두르는 신준석.
손에 깃든 기(氣)가 내 왼손을 가볍게 쳐 냈다.
“훌륭하군. 후배님과 손속을 겨루기를 잘한 것 같아.”
“무슨 소리죠?”
“후배님의 무공 솜씨가 대단하다는 것을…….”
“아니, 선배님.”
나는 신준석의 말을 끊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신준석.
“전 이제 시작이라고요.”
3초는 어디까지나 ‘무공’을 사용하는 신준석에 대한 예우를 해 준 것뿐.
내 ‘진짜’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드드드드!
전신을 감싸는 [가시 갑피].
튀어나온 가시 일부가 옷가지를 찢었다.
그와 동시에, 극야의 힘을 현실로 구현했다.
발끝에서 솟구치는 어둠의 칼날.
내가 펼칠 수 있는 최대치인 5의 극야를 모두 실체화시켰다.
신준석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당혹감이 피어났다.
[호신강기]
푸른 막이 어둠의 칼날들을 튕겨 냈다.
내공을 구체 형태로 넓게 퍼트려서 공격을 막아 내는 운용 방법.
뭐, 불의의 공격을 펼쳤지만 재미를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는 탑 50층 이상을 돌파한 실력자.
이 정도 잔꾀로는 한 방 먹이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닿을 수는 있겠죠.”
나는 꽉 말아 쥔 주먹을 전력으로 휘둘렀다.
[괴력]의 효과로 순수 근력의 300% 보정을 받는 일격.
쩌엉! 주먹이 호신강기를 후려치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뚝, 뚝.
-그대여, 설마 다쳤느냐?
“아냐. 괜찮아.”
호신강기를 타격한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내 주먹으로는 신준석의 방어 막을 절대 뚫을 수 없다.
알면서도 내지른 주먹.
“허, 허허.”
신준석의 표정이 놀라움과 경악으로 뒤섞였다.
방금 전의 충돌로 그의 신형이 20센티가량 밀려났다.
“어때요. 이제 진심으로 할 마음이 났습니까?”
“내가 후배님에 대한 예의가 부족했군.”
신준석은 얼굴에서 감정을 지웠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평정심’이라고 이야기하는 만큼,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손속은 두겠지만, 내 나름의 진심으로 가겠네.”
신준석의 어깨가 살짝 흔들리는 순간.
[육감이 살기를 감지했습니다.]
차가운 감각이 뒷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시각으로 쫓으면 늦는다.
나는 본능에 의지해서 몸을 비틀었다.
직후에 들이닥치는 주먹.
팔뚝 주위를 휘감은 하얀 권기가 [가시 갑피]를 긁어냈다.
정면에서 맞은 것도 아니고 스쳤는데도, 갑피의 내구도가 절반 이상 깎여 나갔다.
권기상인.
기를 방출해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경지다.
‘이 아저씨, 벌써 폭호신권을 익혔나?’
폭호신권.
신준석이 오랫동안 애용했던 일류 무공이다.
무공 명답게 폭발적인 기세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특징을 지녔다.
난 신체를 움직여서 반격하는 대신, [극야]의 힘을 끌어냈다.
촤라락!
이번에는 채찍처럼 길게 늘어난 극야가 신준석의 양팔을 휘감았다.
“훗, 재밌는 힘을 다루는군!”
콰아앙!
발로 지면을 세게 치는 신준석.
내공을 실은 진각(震脚)에 극야로 빚어 낸 촉수 다섯 개가 찢겨 나갔다.
회수조차 할 수 없어서 채찍을 구현하는 데 들어간 [극야]의 힘을 모두 소진했다.
‘이거면 됐다.’
폭호신권에 이어 진각을 연거푸 사용하면서 생긴 미세한 틈.
“하아아아!”
[포효]로 신준석에게 디버프를 거는 동시에, 재차 괴력을 사용했다.
노림수는 막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 팔뚝.
“갈(喝)!”
돌연 신준석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내 고막이 흔들렸다.
제길.
2025년에도 사자후를 쓸 수 있었어?
사자후는 내가 사용한 [포효]와 비슷한 원리이지만, 훨씬 윗줄에 속한 스킬이다.
내 디버프를 풀어 버리는 데 이어 역으로 틈을 만들어 냈다.
신준석은 오른팔을 거두면서 몸을 바짝 붙였다.
벽산고.
몸을 틀면서 어깨부터 허리 아래까지, 전신으로 밀치는 기술이다.
폭호신권의 내공을 온몸에 휘감아서인지, 하얀 기가 전신을 감싼 형태다.
발의 움직임을 읽는 순간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지만, 신준석의 몸 주위로 발현된 기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콰득!
스치기만 해도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뚝뚝 떨어졌다.
주먹에 스친 부위는 연이은 충격에 산산조각 나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음 공격이 들어오면 끝이다.
난 이를 악물고 심장의 마나를 외부로 방출했다.
[머드 트랩을 사용합니다.]
둘 사이에 펼쳐진 진흙탕.
신준석이 잠깐 멈춰 섰을 때, 그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10분이 아니라 1분 만에 끝날 뻔했네.”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한숨.
아슬아슬했다.
-그대여, 위험하면 여가 힘을 보태겠느니라!
“아, 그 새로운 능력 말이야?”
-그러하니라.
“아냐. 이번에는 내 힘으로 부딪쳐 볼게.”
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닉스의 새로운 능력.
궁금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신준석, 국내 무공 사용자 중 최강자와의 대련은 자주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다.
이번 기회에 무공의 성취를 팍팍 늘려 주마!
내 눈동자가 전의로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