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다음 날.
난 자취방 침대에서 기지개를 폈다.
“으그그그, 잘 잤다.”
-참으로 곤히 자더구나.
“2주 동안 제대로 못 쉬었으니까. 하루 정도는 쉬어 줘야지.”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는 최소한의 휴식만 취했다.
소모된 체력과 허기는 [포식]으로 회복.
쉼 없이 괴물들의 정수를 사냥하러 다녔다.
정수를 모두 흡수한 후에도 [극야]의 힘을 수련했으니.
“한숨 자니 낫네.”
말끔해진 정신으로 휴대전화를 잡았다.
-그 작은 물건은 무엇이더냐?
“현대인의 필수품.”
나는 인터넷 기사를 쭉 훑어보았다.
실시간 1위를 차지한 기사.
[역대급 신인의 패기인가, 아니면 과욕인가?]
저 신인이 누구인지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군.
나는 웃음을 흘리면서 기사를 눌렀다.
-이번 튜토리얼 한국 서버에서는 역대급 신인이 등장했다.
유진호, 한국대 무역학과 23학번이다.
그는 엘렌 테일러의 기존 점수를 갈아치우면서 새로운 1위에 등극하였다.
하지만 엘렌의 기록에 근접한 플레이어는 유진호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러시아의 세르게이나 인도의 무케시도 튜토리얼에서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후 탑에서 큰 활약상이 없었다.
…….
(중략)
유진호 플레이어는 자신의 가치를 1천억이라고 규정하였다. 촉망받는 플레이어이나, 일부에서는 너무 큰 기대감으로 짓눌리지 않을까 우려를 사고 있다.
-고려일보 양석진-
이야.
이 악물고 기사를 쓰셨네.
-여가 볼 때에는 그대를 폄하하는 것 같다만.
“맞아. 돌려 까는 거지.”
-괘씸하구나! 감히 여의 계약자를 이리도 매도하다니!
다른 기사들도 큰 차이는 없었다.
메이저 언론에서는 내 활약상을 추켜세워 주는 척하면서 폄하하는 내용도 섞었다.
일부 언론은 대놓고 화랑의 박종원을 띄우는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고.
“호오, 동서에서는 엄청 좋게 포장해 줬네?”
-그대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이구나.
“에이, 가치는 무슨.”
국내 언론이 정·재계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사를 쓰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동서라면 백호랑 선을 데고 있을 텐데.
내 옹호 기사는 백호 길드의 뜻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백호 길드에서 무슨 생각으로 나선 거지?
하여간, 참 재밌어.
“생각한 대로 움직여 주네.”
-그대를 모욕한 것이, 어찌하여 생각대로더냐?
“애가 타는 쪽은 따로 있거든.”
난 휴대전화를 가볍게 흔들었다.
액정에 비친 글자.
[부재중 통화 - 257건]
[문자 - 999+건]
-레드문 길드 스카우터, 성미진입니다.
-최고의 조건으로 당신을 모십니다. 이무기 길드에서는…….
-유진호 플레이어처럼 뛰어난 인재와…….
비판적인 기사들과 대조되는 분위기.
여러 길드에서는 나랑 통화 한번이라도 해 보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대를 원하고 있구나!
“어제는 내 몸값을 올릴 최고의 기회였으니까.”
튜토리얼 스테이지 최고 기록 경신.
모든 언론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 1천억이라는 금액을 던졌다.
당장에 그 돈을 모두 투자하겠다는 길드가 없어도, 그 한마디로 내 몸값=1천억이라는 공식이 반쯤 성립된 셈이다.
성난 언론에서 나를 때려 줄수록, 저 1천억이라는 금액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겠지.
-계약자여, 명심할 것이 있느니라.
“뭔데?”
-그대가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면 바로 추락할 것이니라.
단호하게 말하는 닉스.
말은 저렇게 해도, 걱정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난 닉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래로 추락하는 건 회귀 전에 겪어 본 걸로 충분하다.
이번 생에서는, 떨어지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을 거다.
이 환경도 못 이기면 고신족과의 전쟁에서 무슨 수로 승리하겠어?
-후훗, 여의 계약자이니 잘 해낼 것이라고 믿는다.
“여신님의 무한한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느냐?
“돈 좀 벌어야지.”
나는 허리에 맨 주머니를 툭툭 건드렸다.
* * *
뾰롱, 뾰로롱.
닉스는 쉬지 않고 몸을 좌우로 움직였다.
-오오, 다리 넷 달린 철마들이 참으로 많구나.
“철마가 아니라 차야.”
-차?
“기계라고.”
-여가 필멸자들의 사회를 관찰하던 때하고는 너무 달라졌느니라!
신나는 목소리로 주위를 둘러보는 닉스.
그 덕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나한테 집중되었다.
“저건 혹시 정령이야?”
“와, 플레이어인가.”
“얼굴 본 적 있어. 이번에 튜토리얼 1위한 사람이잖아.”
“아, 그 천억?”
“그럼 저 정령도 튜토리얼 1위 보상인 건가.”
나를 보면서 삼삼오오 떠드는 사람들.
튜토리얼 스테이지 1위로 유명해지긴 했구나.
새삼 인기(?)가 실감되었다.
“튜토리얼 가지고 천억이 말이 되냐.”
“거품인지는 봐야지.”
“그나저나 정령 너무 귀엽다.”
그중 절반 정도는 의구심이나 욕설이고, 나머지는 닉스에 대한 궁금증이지만 말이야.
저 의구심을 조만간 확신으로 바꿔 주지.
“여신님.”
-저, 저거, 너무 귀엽도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 닉스.
뭘 가지고 저러나 했더니, 노점상의 손에 들린 솜사탕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닉스.”
-으, 응? 여를 불렀느냐.
“목적지에 다 왔어.”
-크흠, 그렇구나. 참으로 요지경인 세상이로다.
어휴, 솜사탕에 현혹되는 여신님이라니.
-한데, 이토록 높게 솟아오른 탑은 무엇이더냐?
“탑이 아니라 건물이야.”
구 용산 전자상가를 허문 뒤에 세워진 커다란 빌딩.
총 50층 규모로, 플레이어 관련 장비들을 다루는 종합상가다.
뭐, 파는 것만 아니라 매입도 하는 곳이고.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하게 꾸며진 로비.
커다란 샹들리에로 꾸며진 천장 아래로 온갖 장식품들이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너무 아름다운 공간이로구나!
“다 자본주의의 맛이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건물 아래로 향했다.
부산물을 매입하는 곳은 지하 2층.
안으로 들어가자, 1층에서 봤던 화려함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형씨, 200 이하로는 못 드려.”
“드라일의 뿔이 왜 200이야? 250!”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
1층이 화려한 백화점 같았다면, 지하는 전통 시장을 연상시켰다.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받으려는 플레이어와 한 푼이라도 깎아 보려고 핏대를 세우는 상인들.
탑에서 나온 부산물들의 값어치가 실시간으로 매겨졌다.
‘그 아저씨는 아직 없나?’
회귀 전에 단골이었던 사장님을 찾아봤지만, 그 자리에는 엉뚱한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흐음.
그 아저씨가 있으면 ‘장인’과의 끈을 만들어 둘 수 있을 텐데.
아직은 ‘장인’을 찾아갈 때가 아닌 듯했다.
‘대충 처분해야겠어.’
주위를 둘러보다가 근처에 있는 상인에게 갔다.
“튜토리얼 부산물을 팔려고 하는데요.”
상인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면서 내 전신을 훑었다.
“파실 물건이 어디 있는데요?”
“여기요.”
나는 [욕망의 주머니]를 활짝 젖혔다.
후두둑!
늪 도마뱀의 가죽으로 싸 놓은 부산물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힘센 이끼, 가시멧돼지의 가죽, 실버 팽의 어금니 등 튜토리얼에서 가치 있는 부산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틀 동안 이 악물고 사냥한 성과다.
[포식]으로 갈아 버린 사체들을 포함하면 부산물 양이 몇 배는 되겠지만, 그 덕에 강해졌으니 후회는 없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보십쇼.”
상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부산물들을 확인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상인의 감정이 끝나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총 5억 3천이 조금 안 되게 나왔군요. 그냥 반올림해서 5억 3천 드리겠습니다.”
내가 생각한 액수와 큰 차이 없는 감정가.
생각보다 정직한 아저씨군.
“좋아요. 팔죠.”
“잘 선택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랑 거래하셨으면 뒤통수 맞았을 겁니다.”
깨알 같은 자기 PR까지.
재미있는 아저씨군.
[Web발신]
입금 530,000,000
소신상회
잔액 530,235,300
확 늘어난 잔고.
2주 만에 5억이라는 금액을 벌어들였다.
기자들과 각 길드 관계자들 앞에서 불렀던 1천억에 비해, 현실감이 느껴지는 금액이다.
“이 정도면 돈은 충분하군.”
-그럼 아까 그 구름…… 아, 아무것도 아니니라.
군침을 흘리는 닉스.
말을 중간에 잘라도 뭘 말하려는 지 투명하게 보였다.
참 알기 쉬운 여신님이라니까.
“개처럼 벌었으니 정승처럼 쓰러 가 보실까.”
-어딜 가려는 것이더냐?
“저 위.”
나는 천장을 가리켰다.
* * *
플레이어 종합상가 5층.
여긴 자유 경매장이다.
매매할 매물을 경매장에 등록, 거래가 진행되면 수수료를 지불하는 방식이다.
오이마켓의 중고 거래와 비슷한 구조.
아이템 가격이 원체 높다 보니, 플레이어 다수는 인터넷보다 자유 경매장에서 거래하는 것을 선호했다.
-다들 보잘것없구나.
흥미가 꺼진 눈빛으로 자유 경매장을 둘러보는 닉스.
“이 층에는 여신님 마음에 들 만 한 건 없을 걸?”
자유 경매장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대부분 하(下) 등급이다.
사용감이 있는 중고 아이템.
혹은 비주류 스킬 북.
평균적으로 일반에서 매직 정도 수준의 아이템이 거래되는 장소다.
-참으로 시시하도다. 한데, 이런 곳에서 그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있다는 말이더냐?
“아마.”
난 말끝을 흐린 채, 자유 경매장 리스트를 쭉 확인했다.
-에딘 판금 갑옷.
-아이스 애로 스킬 북.
-화염 보주.
-배시 스킬 북.
역시나. 높아 봐야 매직 등급, 혹은 1성급 스킬 북들만 눈에 들어왔다.
저 방어구들은 내 [가시 갑피]보다도 효율성이 떨어질 테니, 시선이 가지 않았다.
스킬 북들은 어떤가?
튜토리얼에서 얻은 수많은 정수들과 동일한 등급이다.
같은 1성이라고 해도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에, 구매해도 재미를 보기는 힘들 거다.
하지만 자유 경매장에 거래되는 아이템들은 최소가 천만 단위였다.
‘이런 걸 살 바에는 땅바닥에 돈을 뿌리고 말지.’
난 손을 휘휘 올리면서 빠르게 리스트를 확인했다.
어디 보자.
내 생각이 맞으면 반드시 있을 텐데.
5분 정도 경매장 품목을 확인했을 때, 연신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찾았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물품.
[운류보(雲流步)]
등급: ★★★
분류: 무공
가격: 250,000,000
처음으로 보는 3성 스킬 북.
더 중요한 건 운류보의 분류가 ‘무공’이라는 점이다.
“역시. 내 생각대로야.”
난 웃음을 삼켰다.
무공 스킬은 2025년 때만 해도 멸시를 받았다.
‘내공’이라는 스텟이 있어야 전개가 가능한 제한적인 스킬.
거기에, 익힌 후에도 숙련도를 100%까지 채우기까지도 오래 걸린다.
무공 스킬이 재조명받는 건 몇 년 뒤의 일.
일반적인 3성 스킬 가격이 최소가 10억인 걸 감안하면…… 2억 5천은 완전히 헐값이다.
-혹시 그거 말고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더냐?
“웬 꿍꿍이.”
-그대의 입가가 간질거려서 하는 말이니라.
용케 그걸 봤네.
닉스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무공을 팔 사람은 많지 않거든.
운이 좋으면…… 내가 생각하는 인물과 연을 맺을 수도 있다.
“좋아. 바로 거래해야지.”
망설임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자유 경매장에 물품을 올려 둔 당사자의 연락처로 구매 확인 문자가 갔을 터.
‘연락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
바깥에서 오래 머무를 이유는 없다.
후발 주자인 입장이니, 부지런히 탑을 올라야 하거든.
보통 구매 의향을 밝히면 하루에서 이틀 정도 걸리니, 그 안에만 운류보를 받으면 늦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자유 경매장에 계시나요? 바로 드리겠습니다.
……라는 알림이 날아왔다.
오, 마침 판매자가 플레이어 종합상가에 있었나 보다.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되어서 좋군.
나는 팔짱을 낀 채, 판매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나오는 사내.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를 보고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왔다.
“운류보 구매자 맞으시죠?”
활짝 웃는 판매자.
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는.
“예. 맞습니다.”
감정을 억누른 채로 대꾸했다.
때 묻은 책자를 들고 온 인물.
운류보의 판매자는 국내에서 무공 사용자로 유명한 플레이어, 신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