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튜토리얼이 종료될 때까지 남은 기한은 3일.
나는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뀌이잇!”
정면으로 달려드는 가시멧돼지.
10미터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어둠 지배를 사용합니다.]
발아래에서 솟구친 암흑 칼날 여러 개가 가시멧돼지의 배를 찔렀다.
“뀌잇?!”
가시멧돼지의 콧소리가 고통으로 변질되었다.
손가락을 까딱이자, 암흑 칼날에 꿰인 가시멧돼지가 내 쪽으로 당겨졌다.
츠칵.
쭉 자라난 손톱으로 혈조공의 첫 초식인 맹호혈조를 전개.
내공이 깃든 손으로 가시를 부숴버리는 데 이어 멧돼지를 수 갈래로 찢어발겼다.
-여의 힘을 다루는 데 익숙해졌구나.
“갈 길이 멀어.”
나는 짧게 투덜거렸다.
닉스의 권능, [극야]는 다루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회귀 전에도 여러 정수를 포식한 터라 무공이나 마법 등 갖가지 전투 기술에 익숙해져 있지만.
[극야]의 난이도는 절정 무공 이상이었다.
-그대의 습득 속도가 굉장히 빠른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상대평가잖아.”
[극야]의 힘을 닉스만큼 다루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내 주력은 [포식] 능력.
탑을 오르면서 여러 정수를 잡아먹는 거다.
닉스의 힘이 유용한 건 사실이지만, 그걸 내 주력으로 활용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기본은 해야지.’
조금 더 하면 극야를 전투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은 공격 패턴이 단순한 가시멧돼지한테나 유용했다.
-늘 정진하는구나. 그 모습이 여의 마음을 참 흡족하게 하는도다.
“여신님 마음에 들려고 이러는 거 아니거든?”
-후훗, 더 정진하도록.
[극야] 수련.
경험치.
그리고 튜토리얼 점수까지.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잠자는 시간조차 아꼈다.
“그나저나 옷을 또 해먹었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지원이 선물해 준 옷도 군데군데가 찢겨져 있었다.
[극야]를 수련하는 중, 괴물들의 공격을 모두 피하지 못해서 생긴 흔적이다.
-문제라도 있느냐?
“아니. 이제 곧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래서야…….”
지금쯤 탑 바깥에는 여러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들과 각 길드 관계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을 거다.
내가 부끄럼을 타는 성격은 아니라지만, 헤진 옷을 입고 나가기는 좀 그렇잖아?
-계약자여, [극야]를 움직여서 전신을 감싸 보아라.
“극야는 무슨 일로?”
-후훗, 여의 말대로 해 보면 알 것이니라.
닉스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못 이기는 척 [어둠 지배]로 일으킨 극야를 전신에 휘감았다.
-그대가 생각하는 옷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려무나.
촤라라락-!
극야로 피워 올린 어둠이 기다란 코트 형태로 변하면서 몸을 감쌌다.
최근 유행했던 스타일.
바벨탑에 들어가기 전, 우연히 본 형상과 비슷했다.
“오오?!”
-마음에 드느냐?
“당연하지. 엄청 좋아! 쩔잖아!!”
-그대의 수련에도 도움이 될 것이니라.
[극야]로 구현한 옷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어둠 지배를 사용해야 한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어둠 지배]로 구현한 극야의 힘이 형태를 잃어버리고 정수리로 돌아가겠지.
그럼…….
‘파멸이군.’
회귀를 하면서 웬만한 건 안 부끄럽다고 느끼지만.
맨몸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다.
“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려면 힘내야겠군.”
-후후훗, 더욱 정진하여라.
묘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는 닉스.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 같은데.
여신님의 망상이 현실이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 한 놈 더 발견.”
막 달려드는 실버 팽에게 꼬아낸 어둠의 창을 던지는 순간, 실버 팽의 모습이 하얗게 칠해졌다.
곧이어, 섬을 물들인 여러 색이 하나씩 사라졌다.
-계약자여, 시공간이 뒤틀리고 있느니라!
“튜토리얼이 끝난 거야.”
-그럼 우리는 어찌 되는 것이더냐?
“내 세계로 돌아간다.”
하얗게 물든 공간 위로 반투명한 현황판이 나타났다.
[14일이 지났습니다.]
[생존 미션을 종료합니다.]
[튜토리얼 스테이지 - 한국 채널]
[최종 점수 집계]
1위 - 유진호(5,316점)
2위 - 오지원(1,479점)
3위 - 박종원(1,438점)
…….
108위 - 서수식(151점)
*생존자 - 108/109
[플레이어 유진호는 이번 기수에서 1위를 기록했습니다.]
[튜토리얼 스테이지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 기록을 경신하였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탑에 기록하시겠습니까?]
“새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벨탑에 이름을 새기는 행위.
언뜻 보기에는 과시용 외에 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탑 랭킹은 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거야 그때 가면 알 일이니.’
나는 튜토리얼 스테이지 보상을 기다렸다.
▶ 튜토리얼 0층 - 생존을 통과했습니다.
▶ 보상: 욕망의 배낭
[욕망의 주머니]
등급: 레전드
분류: 잡화
걸신들린 것처럼 아이템을 계속 삼킨다고 하는 주머니입니다.
아공간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1톤까지 보관 가능.
와- 나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마침 필요한 걸 얻었네.”
아공간 마법이 걸린 장비는 가격이 비싸다.
탑 안에서도 흔치 않을뿐더러, 현대에서도 마력 회로를 새겨서 만든 게 있지만 성능이 떨어졌다.
한데, 이 주머니를 보라!
크기는 한 손에 들어갈 정도인데 적재량은 1톤이나 되었다.
닉스가 혀를 내둘렀다.
-생긴 것이 조금…… 비호감이지 않느냐?
“왜, 귀엽기만 하네.”
초록빛 가죽 위에 새겨진 웃는 얼굴.
왠지 좀 비웃는 것처럼 생겼지만, 성능만 좋으면 됐지.
튜토리얼 1위에 어울리는 보상을 받았다.
“받은 김에 써먹어야겠어.”
난 ‘늪 도마뱀’의 가죽을 사용해서 만든 임시 가방을 주머니에 넣었다.
[포식]을 안 쓰니, 괴물들의 부산물들이 바닥에 나뒹굴잖아.
두고 가기 아까워서 추릴 수 있을 만큼 챙겨 두었다.
아공간 주머니 덕분에 한결 편해졌네.
-계약자의 세계라, 참으로 기대가 되는구나.
“많은 일이 있을 테니 기대해도 좋아.”
-후훗, 그대를 보고 있자면 지루할 일이 하나도 없겠구나.
닉스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하얀 공간 너머로, 커다란 문이 보인다.
대리석으로 된 문.
튜토리얼 때와 동일한 풍경이다.
“여신님, 바깥세상 구경할 준비나 하십쇼.”
나는 문 너머에 아른거리는 어둠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흐릿해진 오감.
전신이 붕 뜬 것 같은 느낌은 탑을 입장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얼마 정도 가만히 있었을까.
찰칵! 찰칵!
귓가에 아른거리는 셔터 소리와 함께 오감이 하나둘 돌아왔다.
“유진호 플레이어님! 이번에 튜토리얼 최고 기록을 경신하셨는데요!”
“이번 튜토리얼 1위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경인일보의 박주태입니다! 혹시 염두에 두신 길드가 따로 있는지…….”
“유진호 플레이어……!”
탑 입구 주위에 친 기자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고막을 가득 메웠고, 연신 터져 나오는 하얀 섬광이 내 망막을 쉴 새 없이 자극했다.
-계, 계약자여!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더냐?!
“말했잖아. 많은 일이 있을 거라고.”
-이건 대체…….
말끝을 흐리는 닉스.
누군가가 내 곁에 떠 있는 닉스를 발견하고는 마이크를 내밀었다.
“그 인형은 유진호 플레이어의 소환수입니까?”
-소환수? 설마 여를 가리키는 것이더냐!
자기 욕(?)하는 것은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구먼.
그대로 두면 닉스가 진노할 게 분명하니, 분위기를 한번 바꿔야겠다.
“한 분만 질문 받습니다.”
나는 오른손을 위로 올렸다.
웅성웅성-.
모여든 기자들이 수군거렸다.
“어디 대기업 자제나 연예인이야?”
“능숙해 보이잖아. 취재 현장 분위기에 안 눌리고.”
“조사했을 땐 그냥 평범한 20대던데…….”
내가 말이에요. 회귀 전에는 인터뷰를 수백 번 해 본 사람이야.
이 정도 분위기에 눌릴 만큼 허술하지 않거든.
나는 기자 한 명을 골랐다.
“양석진 고려일보 기자입니다. 우선 이번에 튜토리얼 1위 경신을 축하드립니다.”
“인사말은 됐고. 본론으로 가시죠.”
살짝 굳는 기자의 얼굴.
하기야, 고려일보면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언론사인데, 이런 대접은 처음이겠지.
다 의도대로다.
“화랑이나 불사조, 혹은 백호 중에 생각해 두신 길드가 있습니까? 백호 길드는 이번 튜토리얼에서 참여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국내 3대 길드.
기자가 언급한 길드는 모두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곳이다.
생각해 보니 이번 기수에는 그 중 둘이나 들어왔구나.
‘예상대로 질문을 해 주네.’
난 웃음을 삼켰다.
고려일보는 백호 길드를 후원하는 기업 중 하나다.
막 꺼낸 질문도 내 입에서 백호라는 이름이 나오기를 유도한 거겠지.
“딱히 없는데요?”
“예? 그게 무슨…….”
질문을 던진 기자의 눈에서 당혹감의 빛이 아른거렸다.
그뿐이랴.
탑 근처에 진을 친 기자들이 당혹스러운 눈빛을 띄었다.
국내 3대 길드 중 한 곳은 부를 줄 알았겠지.
“길드 안 들어갑니다. 질문 끝나셨죠?”
“어, 어어어.”
“제가 피곤해서요. 그럼 이만.”
난 탑 주변에 진을 친 언론을 휙 지나쳤다.
“유진호 플레이어!”
“향후 목표에 대해 말씀을……!”
“1위를 하신 소감이라도!!”
비명을 지르듯 달려드는 기자들.
조금 떨어진 곳에 머무르던 각 길드 관계자들도 나를 발견했다.
“유진호 플레이어다.”
“그 1위?”
“우리 길드에서 섭외해야 해!”
몰려드는 길드 관계자들.
-그대의 인기가 엄청나구나.
“이게 다 능력 많은 사람의 비애지.”
-아무렴. 여의 계약자는 능력이 넘치는 사람이니라.
칭찬을 듣는 것도 좋지만.
이대로는 오늘 밤을 새도 집으로 못 갈 것 같다.
“1천억.”
나는 아무렇지 않은 투로 한마디를 꺼냈다.
하지만.
그 말이 퍼져 나가자, 길드 관계자들은 물론 기자들의 움직임도 멎었다.
“1천억 주시는 곳이 있으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할 말을 잃은 채, 끔벅거리는 눈동자로 서로를 멀뚱멀뚱 보는 길드 관계자들.
기자들은 질문을 던지기보단, 모두가 얼어붙은 장면을 찍으려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 * *
“1천억이라고?”
“예. 길드장님.”
껄껄껄, 커다란 웃음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국내 3대 길드 중 하나.
백호 길드를 세운 플레이어, 서현민은 한바탕 웃더니 미소를 지웠다.
“유쾌한 친구야.”
“제 선에서 결정하기에는 너무 큰 사안이라…….”
“엘렌 테일러의 계약금이 얼마라고 했었지?”
“1천만 달러입니다.”
“대충 1백억 조금 넘는군.”
“그렇습니다.”
“당시보다 플레이어의 가치가 조금 더 늘었고, 기록 경신까지 감안하면…… 4백억 정도가 적정선 아니던가?”
“마, 맞습니다, 길드장님.”
백호 길드 스카우터는 진땀을 흘렸다.
서현민의 계산은 그가 몇 시간 동안 계산기를 두드려 본 결과와 동일했다.
“자네가 보기는 어때.”
“5백억. 발전 가능성을 생각했을 때 최대 금액입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러시군요.”
“아니, 그래서 공교롭다는 거야. 실은.”
“네?”
서현민은 팔걸이를 툭툭 건드렸다.
“5백억의 두 배. 그냥 터무니없이 부른 가격이 아니라면?”
“설마. 본인의 가치를 정확하게 읽고…….”
“귀담아 두지 말게나. 그저 내 망상일 뿐이니.”
장난스럽게 말하는 서현민.
하지만.
백호 길드 스카우터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릴 수 없었다.
서현민의 ‘감’은 플레이어 업계에서도 유명했기에.
“1천억에 대한 근거를 찾아보겠습니다.”
“좋아.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나한테 직접 보고하게.”
“예.”
“그러고 보니 취재진을 물 먹였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고려일보나 경인일보에서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백호 길드와 긴밀한 관계인 고려 일보.
반면에 경인일보는 경쟁자인 불사조 길드의 입김이 강한 신문사다.
“고려일보에 연락 좀 해 줘.”
“알겠습니다.”
서현민은 휴대전화 액정에 비친 사진을 훑어보았다.
취재진 사이에 둘러싸인 채, 무료한 눈빛을 띠고 있는 사내.
유진호의 모습이 화면 너머로 비쳐졌다.
“그 자신감의 비밀이 궁금하군.”
서현민의 눈은 한동안 사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