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심연.
닉스의 힘을 마주하는 순간,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계약자여, 이겨 내거라.
아.
깜박이는 켜고 들어오셔야죠!
농밀한 ‘밤’의 힘이 파고들자, 전신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물을 잔뜩 흡수한 솜처럼 무거워진 몸뚱이.
가이아의 권능이 날 집어삼키려는 해일 같았다면.
닉스의 힘은 나를 한없이 바닥으로 끄집어 내리는 감각이었다.
빌어먹을 여신님.
내가 억울해서라도 이겨 낸다!
[밤의 여신 닉스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정수 등급: 신화]
가이아의 정수를 포식했듯, 닉스의 힘도 집어삼켜 주마.
진한 ‘밤’의 정수를 삼키자, 아득해졌던 감각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빛 한 점 없는 터널을 걸어가듯, 닉스가 보여 준 무한의 어둠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던 중.
어느 순간, 몽롱했던 정신이 또렷해졌다.
[스텟 - 극야가 생성됩니다.]
[극야: 1]
[밤의 여신의 가호가 스며듭니다.]
[어둠 지배 스킬이 추가됩니다.]
정수리에 자리 잡은 새로운 힘.
닉스의 힘인 [극야]다.
마력이나 내공, 혹은 신력처럼 별개의 에너지가 추가된 것이다.
스으으읏!
어둠이 손끝에 아른거린다.
브라질의 하이 랭커, 안토니오가 다루었던 ‘그림자’와 비슷한 형상.
하지만 난 본능적으로 느꼈다.
‘놈이 다루었던 그림자는 아류야.’
성유물로 구현해 낸 기적의 단면.
밤의 여신, 닉스의 힘은 고작 그림자에 한하지 않는다.
하늘을 뒤덮은 밤.
빛을 집어삼킨 어둠을 구현하는 힘이다.
[어둠 지배]
등급: ★★★★★
분류: 액티브
닉스의 힘으로 어둠을 일으킨다.
공격이나 방어, 어느 쪽으로든 사용할 수 있다.
*극야 소모.
*범위: 10미터.
*성장형 스킬입니다.
-밤의 조각을 완벽하게 흡수하다니. 역시 계약자로구나!
“여신님, 솔직하게 말해 봐.”
-뭘 말이더냐.
“나 암살하려고 했지?”
-후후훗, 여는 계약자를 굳게 믿은 것뿐이니라.
“그런 식의 신뢰는 이번 한 번만으로 족해.”
진심이었다.
닉스의 힘 일부를 받아들이다가 하마터면 밤의 어둠에 묻힐 뻔했다.
“참, 어둠 지배는 뭐야?”
-여의 힘을 그대로 나누어 준 것이니라.
“흠, 그림자 조종보다 안 좋아 보이는데.”
-성유물의 파생물 따위와 여의 힘을 비교하는 것이더냐?!
닉스가 분개하더니 내 머리 위로 올라탔다.
콩- 콩- 앙증맞은 주먹으로 정수리를 치는데 아프기보단 안마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원하다. 조금만 아래로.”
-감히 여를 모욕하다니! 어둠 지배야말로 여의 근본이니라.
“내 말 좀 들어 봐.”
그림자 조종의 사거리는 30미터.
타인이나 물체의 그림자도 조종할 수 있다.
반면에 어둠 지배는 범위 자체가 너무 좁았다.
“밝은 곳에서는 내가 어둠을 피워내야 하는 페널티도 있잖아.”
-후후훗. 여의 힘, 극야는 태양마저도 덮을 수 있느니라.
“아, 여신님이 말한 극야라는 것도 문제야.”
그림자 조종은 마나를 소모한다.
[용의 심장] 덕에 넘쳐 나는 마나를 지닌 나한테는 전투 중에 사용해도 부담이 전혀 안 되었다.
그런데 어둠 지배는 어떤가?
닉스의 힘, ‘극야’로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니까 더 상위의 힘 아니더냐. 성유물의 찌꺼기 따위는 여의 권능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니라.
“시간이 지나면 그러겠지.”
-이제 여의 위대함을 이해…….
“당장은 그림자 조종이 더 나아 보여서 문제지.”
극야라는 스텟은 신력이랑 비슷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력의 분화 개념으로 극야가 추가된 거다.
“현 시점에서는 극야 스텟을 늘릴 방법이 없어.”
내가 다룰 수 있는 건 지극히 작은 어둠뿐.
최대한으로 얇게 펼치면 전신을 겨우 감쌀 수 있는 정도다.
뭐, 스텟 1으로 낼 수 있는 것 치고는 엄청나긴 했다.
마나 10, 아니 20에 가까운 힘.
[어둠]을 응축시키면 단단한 강철이라도 찢어발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이래 가지고는 그림자 조종보다 실전 활용도가 떨어지잖아.
-그럴 리가 없도다.
“왜?”
-보너스 스텟을 극야에 투자하면 되지 않느냐.
“그게 될 리가…….”
난 말끝을 흐렸다.
잠깐, 안 된다고 상정하는 게 이상하지.
나한테 힘을 부여한 여신, 닉스가 가능하다고 했잖아?
레벨 업 보너스로 극야 스텟을 늘릴 수 있다면.
“엄청나군.”
나는 마침내 닉스의 말을 이해했다.
1에 해당하는 스텟으로 이만한 힘을 낼 수 있는데, 레벨을 올릴 때마다 극야 스텟에 투자하면?
‘신력보다 더 유용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극야는 닉스의 ‘신력’인 거다.
좁쌀 크기의 신력과 달리, 내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극야.
내 입이 쩍 벌어졌다.
-후후훗, 이제야 여의 위대함을 이해하였구나.
“여신님.”
-무엇이더냐?
“진짜 고마워!!!”
난 머리 위에 올라탄 닉스를 붙들고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계, 계약자여. 그만하거라! 어지러우니라!
“다 여신님 덕분이야.”
나는 활짝 웃었다.
한참을 제자리에서 돌다가 멈춰 섰다.
-우욱, 우우욱.
“여신님도 멀미 같은 걸 하는구나.”
-여, 여의 육체는 필멸자 수준이니라. 우욱!
영체라서 게워 낼 것도 없을 텐데.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닉스를 뒤로 한 채, 마지막으로 그녀가 부여한 가호를 확인했다.
[밤의 여신의 가호]
등급: EX
분류: 패시브
가호 랭크: 1
밤의 질서를 지배하는 여신, 닉스의 가호다.
어둠에 머무를 때 회복력이 50% 증가하며, 어둠 관련 스킬의 효율을 늘려 준다.
호오.
마력이나 신력, 또는 극야의 회복력까지 늘려 주다니.
회복 범위만 놓고 보면 [대지모신의 가호]의 상위 호환이었다.
지면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보다는 충족시키기 어려운 조건이지만 말이야.
거기다가, 체력과 생명력은 [대지모신의 가호]와 중첩이 되면서 회복력이 100% 상승한다.
“미쳤군.”
-욱, 왜 그러느냐?
“여신님이 너무 대단해서.”
-후훗, 후후훗, 여의 위대함을 더 찬양하여라!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와중에도 코를 세우는 닉스.
회귀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었다.
“참, 여신님. 물어볼 게 있어.”
-무엇이든 말만 하여라.
“밤의 전당에 여신님의 정수가 가득하거든.”
-후후훗, 어차피 여가 쥘 수 없는 힘이니. 마음껏 먹어 버리려무나.
역시.
나랑 붙어 다닌 지 좀 되었다고 바로 알아듣는구먼.
“여신님, 사랑합니다.”
-사, 사탕발림하지 말거라!
아니, 왜요. 나름대로 진심인데?
“그럼 사양하지 않고…….”
난 공동 바닥에 손바닥을 얹었다.
과거 제우스 신전에서 정수를 포식했던 때가 떠오르는구먼.
[밤의 여신 닉스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정수 등급: 신화]
공동을 가득 메운 어둠이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왔다.
[극야: 25]
〔밤의 전당〕에 깃든 정수를 모두 포식한 성과다.
“생각보다 적은데?”
-여의 힘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느니라.
“흩어진 힘이 느껴져?”
-그렇느니라.
하긴.
바벨탑은 각 나라에 세워졌다.
전 세계에 있는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인 튜토리얼.
〔밤의 전당〕의 개수도 그만큼 늘어나 있을 테니, 힘이 분산되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지. 고신족들은 여신님의 힘으로 탑의 밤을 구현했을 거야.”
-무슨 말이더냐?
“레인보우 아일랜드를 터는 걸로는 여신님의 힘을 되찾는 게 불가능하단 말.”
-일이 복잡하게 되었구나.
“든든한 계약자가 있잖아. 힘내라고.”
-후훗, 여는 그대만 믿겠노라.
웃자고 한 이야기인데.
그걸 닉스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머쓱해졌다.
“여신님, 부탁할 게 있어.”
-무엇이더냐?
“내 스승이 되어 줘.”
스스슷!
짙은 어둠이 등 뒤에서 솟구쳤다.
[극야]로 빚어낸 암흑.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어둠은 불꽃처럼 거세게 일렁였다.
“이거, 생각보다 다루기가 까다롭네.”
난 미간을 찌푸렸다.
어둠을 구현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신력을 다뤄 본 경험이 있기에, 극야의 힘을 외부로 방출하는 것까지는 쉬웠다.
문제는 그다음.
바깥으로 구현해 낸 어둠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안토니오 새끼는 잘만 하더만.’
끙. 여신님 앞에서 체면 구기네.
-걱정하지 말거라. 여의 힘은 무수한 성좌들조차 두려워하고, 또한 이해하지 못했느니라.
닉스는 앙증맞은 손을 팔뚝에 갖다 대었다.
-지금부터는 여가 그대의 극야를 잠시 움직이겠느니라.
“알았어.”
꿈틀, 정수리에 자리를 잡은 극야가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난 두 눈을 감은 채, 극야의 흐름에 집중했다.
-이제부터 느껴 보아라.
스스슷!
반경 10미터를 뒤덮은 극야.
닉스는 그 어둠을 일점으로 응축시켰다.
25에 해당하는 극야 스텟의 에너지가 한 자루의 검으로 합쳐졌다.
-명심하거라. 극야는 의지의 힘, 그대의 생각이 곧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니라.
검 한 자루로 뭉쳐졌던 극야의 에너지가 수십으로 흩어졌다.
이번에는 촉수 다발처럼 흐느적거리는 형태.
25에 해당하는 힘의 총량.
하나로 뭉쳐진 게 언제냐는 듯, 촉수 한 가닥 한 가닥에 동일한 힘이 분배되었다.
-극야는 그대를 지키는 방패이며, 적을 베는 검이며, 또한 도구이니라.
나는 닉스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겼다.
변화무쌍하던 어둠.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후우욱.
크게 한숨을 내쉬는 닉스.
안 그래도 하얗던 피부는 핏기가 쫙 빠져서 창백하게 보였다.
“여신님, 괜찮은 거야?!”
-괜찮으니라. 여의 지배력으로 그대의 극야를 다루었더니 조금 피로한 것뿐이니라.
“위험한 짓은 하지 마.”
나는 안색을 굳혔다.
닉스가 내 [극야]를 컨트롤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
방금 한 말을 들어 보면 꽤 무리한 것 같은데.
“앞으로 함께할 시간은 많아. 그러니까 쉬엄쉬엄해.”
-아, 앞으로 말이더냐?
말끝을 흐리는 여신님.
……이번에는 또 왜 이러는 거야?
-크흠, 여도 누군가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준 건 처음이라, 힘이 드는지도 몰랐느니라.
“다음부터는 무리하지 마.”
-계약자를 걱정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닉스한테 확답을 받은 후.
몸에 깃든 [극야]를 천천히 이끌어 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끄집어내면 오히려 컨트롤하기가 힘들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스스슷!
[극야]가 시커먼 연기 형태로 구현되었다.
“여기까지는 원래 됐던 거고.”
닉스가 극야를 운용한 방식.
바깥으로 구현한 어둠에 의념을 투영, 형태를 고착화하는 것을 시도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여의 어둠은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깊이를 지녔……?
말끝을 흐리는 닉스.
나는 멍한 표정을 짓는 닉스에게 한 마디 던졌다.
“되는데?”
2미터 길이의 검.
어둠으로 빚어낸 암흑의 장검이 구현되었다.
-극야는 의지력이 부족하면 바로 흩어지느니라. 그 검을 휘둘러 보아라.
닉스는 당혹감과 기쁨이 섞인 음성으로 지시했다.
철컥.
장검의 손잡이를 잡은 후, X 자로 휘둘러 보았다.
전당 내부에 있는 공기가 칼의 궤적에 따라 찢겨 나간다.
훙! 후웅!
연속적으로 칼을 휘둘러 봐도,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미, 믿을 수가 없구나!
“뛰어난 스승님이 지도해 주는데 제자가 분발해야지.”
나는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