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계약자여, 무슨 일이더냐!
다급하게 묻는 닉스.
“아, 아냐. 너무 놀라서 그랬어.”
-다행이로구나. 그대의 음색이 너무 떨려서 걱정했느니라.
닉스가 그렇게 느낄 만했다.
방금 전 네스의 정수를 포식하는 순간, 엄청나게 놀랐거든.
[거대 뱀 네스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전설]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체력 + 25]
[맷집 + 25]
[내공 + 10]
[스킬 - 여의주가 추가됩니다.]
[여의주]
등급: ★★★★
분류: 패시브
단전에 내공을 축적하는 여의주를 생성한다.
여의주는 내공 운용을 더 효율적으로 하게 해 주며, 축적에도 도움을 준다.
*심법 효율 50% 증가.
*내공 소모 -20%
*축적한 내공의 양에 따라 성장 가능
무려 전설 등급!
탑 저층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고등급 정수다.
〔잊힌 신전〕에서 마주친 용아병이야, 튜토리얼의 맹점을 노린 덕에 [용의 심장]을 얻은 거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니, 등급도 등급이지만…….’
난 턱을 만지작거렸다.
여의주.
낯익은 이름이다.
회귀 전에도 얻었던 정수.
그렇지만, 이걸 포식하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탑 50층 너머에 사는 괴물.
이무기를 쓰러트린 후, 놈의 정수에서 추출해 낸 게 바로 [여의주]였다.
‘호수에 사는 뱀 새끼도 이무기로 쳐주는 건가?’
네스.
단순히 커다란 뱀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뒷설정이 있는 모양이다.
-그 뱀이 무슨 정수를 주었기에, 그리도 놀랐느냐?
“엄청난 거.”
나는 히죽거리면서 대꾸했다.
진짜 좋은 건데, 말로 설명을 할 수가 없네.
『하늘의 악이 당신의 무공 운용능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올림포스의 전쟁 신이 하늘의 악을 노려봅니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가호를 내려준 것에 만족해합니다.』
『올림포스의 전쟁 신이…….』
여태 지켜보던 성좌들이 메시지를 보냈다.
허 참.
튜토리얼을 일일이 지켜보는 성좌는 흔치가 않은데.
다들 한가한가 보다.
-계약자여, 저 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거라.
아이고.
우리 여신님은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한대.
“아직은 계약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마.”
-그 조건부를 의미하는 단어가 여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하는 것을 모르더냐?
『올림포스의 전쟁 신은 플레이어에게 어울리는 신이 자신뿐이라며 으스댑니다.』
『하늘의 악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올림포스의 전쟁 신을 보며 조소합니다.』
이 양반들, 시끄러운 거 보소.
나는 성좌들의 메시지를 한쪽으로 치운 후, 상처 회복에 집중했다.
포식으로 네스의 사체를 먹어치운 덕에 소모된 체력을 다수 회복했다.
거기에 [재생] 스킬을 사용하니, 네스의 이빨이 박힌 부위도 금세 아물었다.
“이제 갈까?”
-그러자꾸나.
나는 호수 밑바닥으로 향했다.
* * *
[현재 당신의 위치는 밤의 전당입니다.]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처음으로 밤의 전당을 발견했습니다.]
[체력과 마나가 2 상승합니다.]
호수 바닥에 있는 동굴.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은 물기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장소였는데.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계약자여, 무슨 생각을 하느냐?
“어, 아무것도.”
-음흉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리 이야기하면 설득력이 없느니라.
“내 얼굴 보고 왜 그러냐?”
-흐음, 거울이 있으면 보여 주고 싶은 상이니라.
아니.
내 표정이 어때서 그러는 건데?!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회귀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저벅- 저벅-.
〔밤의 전당〕의 너비는 약 50미터.
난 공동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플레이어에게서 네스의 피가 감지됩니다.]
[밤의 전당의 가디언, 네스를 쓰러트린 자에게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원하는 아이템 종류를 말하면 밤의 전당에서 적합한 장비를 선사할 것입니다.]
[아이템에는 밤의 축복이 스며듭니다.]
과연.
회귀 전에 들었던 것과 동일했다.
‘선택형 보상.’
밤의 전당에 들어서면 밤의 축복이 가미된 [유니크] 등급 아티팩트를 보상으로 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원하는 파츠를 고를 수 있다는 것!
-장비 선택이 왜 중요한 것이더냐?
“나처럼 무기가 필요 없는 사람한테 무기를 줘 봐.”
-그럼 참으로 억울하겠구나.
“밖에서 팔아도 되지만 귀찮잖아.”
-그대는 방어구도 필요가 없어 보인다만.
“장신구를 달라고 하면 되지.”
나는 오른손으로 귀를 툭툭 건드렸다.
“귀걸이를 받고 싶다.”
[밤의 전당이 플레이어의 의사를 확인했습니다.]
[밤의 축복이 깃든 장비, 밤의 장막이 주어집니다.]
[밤의 장막]
등급: 유니크
분류: 귀걸이
밤의 축복이 깃든 귀걸이입니다.
어둠으로 물든 곳에서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민첩 + 15
*마력 + 10
*[밤의 걸음] 스킬 내장
[밤의 걸음]
등급: ★★★
분류: 액티브
빛이 없는 곳에서 존재감을 최대한으로 낮춘다.
흑요석이 박힌 귀걸이가 손에 쥐어졌다.
“오, 좋은데?”
나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여가 보기엔 그대의 성향과 안 맞아 보인다만…….
“왜?”
-숨어서 다니는 것보다 정면 돌파를 즐기지 않느냐.
“에이, 필요할 때는 숨어 다녀.”
이 여신님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내가 회귀 전에 [시간] 관련 신화의 정수들을 어떻게 취했는지를 알았으면 저리 말 못 했을 거다.
탑 곳곳에 있는 여러 험지에 몰래 침입.
몇 날 며칠을 숨죽인 채 기다리다가 성유물을 훔치기도 했다.
힘으로 돌파할 때는 과감하게.
인내심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그 자리에서 배변까지 해결하며 기회를 노렸다.
괜히 그때 생각하니 눈물 나네.
난 [밤의 장막]을 한쪽 귀에 달았다.
“여신님, 어때?”
-솔직하게 말하면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로구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내 귀에 어울리는가 말고.”
-그럼 뭘 물은 것이더냐?
“이 동굴에서 여신님 기운이 느껴지는지 묻는 거잖아.”
-아아! 그렇구나. 조금만 기다려보아라.
검은 연기가 꿈틀거렸다.
사방으로 퍼지는 시커먼 입자.
화아악-!
〔밤의 전당〕이 닉스가 퍼트린 검은 입자에 반응했다.
-맞도다! 여의 힘은 이곳에 담겨 있느니라!
정답이군.
하긴, 공동의 명칭부터 〔밤의 전당〕 아니던가.
노골적으로 힌트를 주는데 못 맞히는 게 이상했지.
호수 바닥을 헤맬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귀걸이가 나랑은 안 어울린다고?”
침묵하는 닉스.
-흐, 흐음, 여는 이곳에 있는 기운을 흡수하겠노라. 집중해야 하니 여에게 말을 걸지 말거라.
잠시 후.
닉스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쭈.
이 발언은 절대로 잊지 않아 주마.
우우우웅!
닉스의 말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공동의 기운이 검은 안개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한 점으로 뭉쳐진 암흑.
암흑은 이내 꿈틀거리면서 사람의 형태로 변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내린 아름다운 여인.
여인은 붉은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더니, 이내 나를 직시했다.
【이런 모습으로 다시 보니 반갑구나, 계약자여.】
잠깐만요.
네가, 아니 당신이 방금 전까지 떠들었던 닉스가 맞으신가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함.
[육감]이 쉴 새 없이 경고음을 울렸다.
흑발의 여인.
아니, 여신은 고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꿀꺽.
난 침을 삼켰다.
마주하는 순간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처럼 경외심이 드는 모습.
[사용자의 감정이 크게 요동칩니다.]
[냉혈 스킬이 발동됩니다. 냉정한 마음이 유지됩니다.]
…….
냉혈이 거듭해서 발동될 만큼, 여신의 존재감은 내 심령을 옥죄어왔다.
밤의 여신.
닉스의 진면목을 마주하는 순간,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검은 머리의 여신은 의아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색이 안 좋구나. 혹, 아까 입은 부상 때문에 그러느냐?】
“아니. 여신님이 너무 아름다워서.”
빈말이 아니었다.
눈이 부실 만큼의 존재감만큼이나, 현신(現身)한 닉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사탕발림은 되었느니라.】
“진심인데?”
닉스는 두 눈을 끔뻑였다.
잠시 후.
【후, 후후훗, 패션 감각은 영 아니지만 눈이 트여 있구나.】
닉스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근데 왜 나를 안 보고 말해요?
“이렇게 보니까 여신님이라는 실감이 확 나네.”
【정말 그러느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왜 하겠어.”
진심이었다.
[냉혈]의 도움이 없었으면 당장 이마를 땅에 붙인 채, 닉스를 경배했을지도 모른다.
늪지에서 바알이 빙의를 했을 때도 이 정도 압박감을 주지는 않았다.
과연.
가이아보다도 한 세대 위인 개념신은 달라도 달랐다.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잖아.’
닉스의 존재감은 봉인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밤의 전당에 온 걸로 힘을 다 되찾은 건가?
내 예상과는 다른 전개다.
-밤의 여신의 힘을 되찾을 때까지 돕는 것.
닉스와 나눈 계약이다.
벌써 계약을 완료해 버리면 곤란한데.
‘계약을 완료한 대가로 보상을 챙기는 건 차선이야.’
밤의 여신 닉스.
그녀와 파트너로 다니다 보면 얻을 수 있는 게 훨씬 많을 거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꾹 누른 채, 입을 열었다.
“여신님, 컨디션은 좀 괜찮아?”
【그렇지는 않구나.】
“내가 볼 땐 멀쩡해 보이는데.”
【이 공동이 여의 기운을 옭아매고 있노라.】
손을 좌우로 흔드는 닉스.
시커먼 연기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여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이 장소뿐이니라.】
닉스는 불만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밤의 전당〕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닉스의 개념인 ‘밤’을 봉인해 둔 듯했다.
“봉인을 풀 수는 없는 거고?”
【그러하니라. 그대와 동행하면서 여의 격을 회복해야 할 것 같으니라.】
휴, 다행이다.
나와 닉스의 동맹 관계는 조금 더 이어질 운명이었나 보다.
슈우우욱!
검은 안개가 닉스의 전신을 휘감았다.
시커먼 어둠이 걷힌 후.
“여신……님?”
내 앞에는 흑발의 여신을 3등신 캐릭터로 만든 것 같은 인형(?)이 나타났다.
-후후훗, 그렇도다. 바로 여이니라.
“왜 이렇게 작아진 거냐.”
-밖에서는 현신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느니라.
“그래서 사이즈를 줄이셨다?”
-후훗, 이 공간에서 나름의 격을 회복하였으니 작은 상태로 유지가 가능하니라.
골반에 손을 얹은 채로 어깨를 활짝 펴는 닉스.
사이즈가 작다 보니, 요염하기보다는 귀엽게 느껴졌다.
“전의 그 안개보다는 낫네.”
-약간이지만 힘도 쓸 수 있느니라.
“뭔데?”
-비밀이니라.
오호.
닉스의 새로운 능력이라.
예상하지 못한 희소식에 미소가 지어졌다.
-참, 그러고 보니 그대와의 계약을 이행해야겠구나.
“무슨 계약?”
-그대를 강하게 해 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아, 그랬지.
원래는 신의 ‘가호’를 염두해서 건 계약이었는데.
방금 전 닉스의 존재감이 원체 거대하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렸다.
-손을 내밀어 보아라.
“자, 여기.”
닉스는 인형처럼 앙증맞은 손으로 나를 잡았다.
그 순간.
“어어?”
바알이 가호를 내려 주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막대한 힘이 손등을 타고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