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다리를 노리고 오느니라.
-머리. 조금 위이니라.
-우측으로 틀어야 하느니라.
-이번 공격은 페이크!
나는 판단을 멈춘 채, 닉스의 말대로 움직였다.
원래는 보이지 않는 공격을 [육감]으로 읽어 내서 피해야 했다.
한데, 닉스가 지도해 준 덕에 워터 볼 회피 난이도가 급격하게 하락했다.
“고마워, 여신님.”
-후훗, 여의 위대함을 이제야 알아보느냐?
“예이. 물론입죠.”
네스가 뱉어 낸 물 덩어리가 옆을 스치는 순간에도, 평온하게 대꾸했다.
급격하게 좁혀진 거리.
네스는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물을 압축한답시고 가글을 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접근하는 건 위험하지 않겠느냐?
“아냐. 지금이 딱 좋아.”
난 불뚝 나온 네스의 배를 가리켰다.
“물을 다 뱉기 전까지는 마음대로 못 움직이거든.”
네스의 공격, [워터 볼]은 양면의 칼날처럼 리스크를 동반하는 스킬이다.
한번 물을 들이마시면 배 속을 어느 정도 비울 때까지 움직임에 제약이 걸린다.
풍선에 물을 가득 넣으면 무거워지잖아?
저 뱀 새끼는 물풍선 같은 신세인 거다.
나는 물장구를 치면서 네스의 목 뒤로 돌아섰다.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는 네스.
-정면이니라!
[육감이 살기를 감지합니다.]
닉스의 목소리와 육감의 경고가 동시에 들렸다.
이번에는 회피가 불가능했다.
너무 거리를 좁힌 탓에 물 덩어리의 궤도에서 벗어날 만큼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워터마크를 사용합니다.]
[지정한 위치에 사각형 판이 생성됩니다.]
머리 위에 생성된 반투명한 판.
1제곱미터 크기, 두 발이 쏙 들어갈 만한 사이즈다.
제자리에서 반 바퀴를 돌아서 정수리를 호수 바닥 쪽으로 향하게 하곤, 곧장 워터마크를 박찼다.
한 끗 차이로 빗나가는 워터 볼.
아래에 있던 네스의 몸뚱이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과연. 이런 수를 준비해 두었구나!
[아가미]가 없었다면, 워터마크와 축복받은 물푸레나무 잎사귀를 왕창 사 놨을 거다.
그게 플랜 B, 돈지랄이다.
‘안 그래도 돼서 다행이야.’
[아가미] 덕분에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인 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불룩 솟아오른 네스의 배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난 [워터마크]를 추가로 깔았다.
어렵게 접근한 건 이 기회를 잡기 위해서다.
[탐욕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스아아앗!
검붉은 기운이 반투명한 판을 휘감는다.
침식 효과로 강화된 판.
한바탕 춤을 춰도 멀쩡하겠어.
난 발판을 밟고는 혈조공의 준비자세를 취했다.
무공의 위력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신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앞서 물고기들을 사냥할 때 혈조공의 위력이 반감된 것도 그 이유.
하지만.
‘발판이 있으면 어떨까?’
1제곱미터.
혈조공을 펼치기에는 좁은 공간이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단전에 깃든 내공이 혈조공의 구결에 맞춰서 혈도로 퍼져 나갔다.
푸아아악!
견고한 네스의 비늘이 종이처럼 찢겨 나간다.
처음 입혔던 상처보다 한층 깊은 공격.
[날카로운 손톱]과 혈조공의 궁합은 최상이었다.
쉬잇! 쉬쉬싯!!!
네스의 아가리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이 튀어나왔다.
몸을 좌우로 꿈틀거리는 게, 꽤나 아픈 모양.
하지만.
들이마신 물을 다 뱉을 때까지는 나를 조이거나 하지 못한다.
-연사이니라. 머리, 그리고 배.
양동이라.
머리 좀 굴렸는데?
[마나 업소브를 사용합니다.]
머리로 날아오는 건 살짝 젖히는 걸로 충분했다.
복부를 노리는 건 마나 업소브로 흡수.
재사용 시간 때문에 자주 사용할 수 없지만, 회피가 어려울 때는 적격이었다.
“그렇게 해서 날 떨쳐 낼 수 있다고 생각하냐?”
스케이트보드를 타듯 [탐욕의 가호]로 강화한 발판 위에 서서 공세를 이어 갔다.
뱀의 피부 위에 상처가 하나둘 늘어난다.
상흔에서 흘러나온 피는 어느새 인근의 물을 모두 초록색으로 물들였다.
[육감이 살기를 감지합니다.]
뒷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스산한 감각.
닉스의 경고음은 없었는데?
난 의아함을 느꼈지만, 육감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발판을 차면서 뒤로 물러서는 순간.
쇄애애액!
네스의 몸통이 채찍처럼 휘어지면서 내가 있던 공간을 후려쳤다.
발을 빼긴 했지만, 20미터에 달하는 거대 뱀의 공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복부에 전해지는 강렬한 충격.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52% 감소합니다.]
“커흑.”
한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
철붕어의 정수를 흡수해서 강화한 갑피의 내구도가 일격에 반이나 소모되었다.
-계약자여!
닉스의 걱정 어린 음성.
괜찮다고 말해 줄 여유가 없었다.
네스의 배 속에 삼킨 물이 소모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는데.
무슨 수로 움직인 거지?
“아.”
내 시선이 네스의 상처로 향했다.
뱃가죽에 생긴 상처.
놈은 그 틈으로 빨아들인 물을 내보내면서 둔해진 몸을 원래대로 돌렸다.
공격을 맞는 중에 용케 저런 것까지 생각했군.
‘제법이야.’
뱀 새끼. 머리 좀 굴렸어?
물을 모두 빼낸 네스가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한 방 먹였다고 자신만만하긴.
-위험하도다!
괜찮아.
이 정도쯤은 위기도 아니야.
“하아아아!!”
다시 한번 포효를 사용, 네스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발아래에 있는 물에 [탐욕의 가호]를 전개.
발을 차면서 재차 회피했다.
서거걱!
날선 손톱이 바닥을 스쳐 지나가는 네스의 몸뚱이에 상흔을 새겨 주었다.
이쪽도 한 방 먹었지만.
단기간에 줄 수 있는 최대의 피해를 네스에게 선사했다.
조금 둔해진 네스의 움직임.
난 [탐욕의 가호]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돌진 공격을 회피, 상처를 하나씩 늘렸다.
* * *
[축복받은 물푸레나무의 잎사귀를 사용합니다.]
[저항력 및 부력이 30% 감소합니다.]
전투 개시 후, 어느새 2시간이 지났다.
난 마지막 잎사귀를 물었다.
-조마조마해서 지켜볼 수가 없구나.
닉스가 한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치라도 어긋나면 패배로 직결되는 상황.
후, 피가 마르는 느낌이군.
불의의 공격을 허용한 후로는 단 한 번도 맞지 않았다.
반면 직진 공격만 주야장천 한 네스의 몸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전신을 뒤덮은 자상.
피를 많이 흘려서일까.
움직이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래도 승리가 목전이니라.
“아직 아냐.”
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네스가 궁지에 몰리면 사용하는 필살기.
그 기술이 나올 때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쉬이이잇!
네스의 눈동자에 감돌던 살기가 일순간 증폭되었다.
“온다.”
난 기다리고 있던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스네이크 토네이도]
제자리에서 몸을 회전시키는 네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호수 한가운데에 와류(渦流)를 만들었다.
콰아아아-!
거센 물길에 저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 몸뚱이는 네스가 만든 물의 흐름에 거스르지 못했다.
-발판을 사용하거라!
애처로운 목소리로 외치는 닉스.
아냐. 이거야말로, 기다리고 있던 거라고.
정확히 말하면 놈이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을 대비했지.
‘뭐, 예상이야 했으니까.’
입가에 감도는 쓴웃음.
네스는 궁지에 몰리면 높은 확률로 [스네이크 토네이도]를 사용한다.
정석적인 공략법은 스네이크 토네이도를 사용할 때 냉기 계열 공격으로 발동 자체를 막는 거지만.
난 그런 수단이 없었다.
그렇다면.
놈이 스네이크 토네이도를 사용할 때 승부수를 던지는 수밖에!
소용돌이에 휘말린 몸이 마구 흔들렸다.
아오.
더럽게 어지럽다.
세탁기에 들어간 의류가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그 순간, [육감]이 발동했다.
쉬이이잇!
육감의 경고와 함께 들이닥치는 네스.
이건 알아도 피할 수 없었다.
쩍 벌어진 거대 뱀의 입이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콰앙! 빠져나갈 틈도 없이 놈의 아가리 안에 들어갔다.
어깨와 허벅지에 파고드는 이빨.
치악력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가시 갑피가 한 번에 부서졌다.
화끈한 고통.
-계약자여!!
닉스의 비명이 귀를 울렸다.
[워터마크를 사용합니다.]
[지정한 위치에 사각형 판이 생성됩니다.]
세 번째 워터마크를 사용한 장소는 네스의 혀 위였다.
이걸 위해 마지막까지 안 쓰고 있었거든!
쉬이이잇?
네스의 음색 사이로 당황이라는 감정이 새어 나왔다.
놈의 사냥 방식은 아나콘다와 동일하다.
목구멍으로 사냥감을 삼킨 후, 위장에 넣고 으스러트려서 먹는 것.
저 안으로 넘어가지만 않으면 내 승리다!
[산성 피를 사용합니다.]
딥 슬라임의 정수에서 추출한 능력.
산성 피가 처음으로 발현되었다.
치이이익!
이빨이 낸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피.
붉은 액체는 네스의 목구멍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쉬이이이이!!!
비명을 지르는 네스.
근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생각보다 이빨이 세게 박혀서일까, 출혈이 과해서 어지러웠다.
워터마크를 밟고 선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후들거렸다.
어럽쇼.
좀 위험한데?
-어서 빨리 중심을 잡거라.
그게 말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피가 많이 흐른 덕에 [산성 피]의 효과가 극대화되었지만, 역으로 나도 중심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절체절명의 위기.
그 순간, 흡혈 모기한테서 포식했던 정수가 떠올랐다.
밑져야 본전!
[괴력을 사용합니다.]
날선 손톱으로 네스의 입천장을 베었다.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
[흡혈을 사용합니다.]
입을 한껏 벌린 채로 초록색 피를 받아먹었다.
와.
비린 맛이 입가를 맴돌았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지만, 억지로 입을 벌리고 네스의 피를 섭취했다.
[대상의 피에 스며든 생명력을 흡수합니다.]
꿀꺽, 꿀꺽.
몬스터의 피로 수혈을 하게 될 줄이야.
아이러니하구먼.
쉬이이잇…….
네스의 움직임이 빠르게 둔해졌다.
목구멍을 벌려 놓고 산성 액체를 들이부은 꼴.
여태 낸 상처에 이어 속까지 망가져 버리니 버틸 리 만무했다.
[보스 몬스터 - 거대 뱀 네스를 사냥했습니다.]
[뛰어난 업적을 세웠습니다. 유진호 플레이어의 이름이 탑에 기록됩니다.]
[튜토리얼 종료 시 보상이 추가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움직임을 멈춘 네스.
마침내.
놈의 숨통이 끊어졌다.
-계약자여, 드디어 해냈구나!
검은 안개가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군.
“뱀 새끼, 속을 지졌는데도 더럽게 오래 버티네.”
-여는 그대가 승리할 것을 믿었느니라.
“암요, 그러시겠죠.”
날 믿은 것치고는 엄청 불안해하던데 말입니다.
-설마 여의 말을 못 믿는 것이더냐?
“티 났어?”
-으으…….
분한 기색으로 신음을 흘리는 닉스.
“그래도 고마워. 덕분에 저 괴물을 쉽게 사냥했어.”
-흥, 위로하지 말거라.
“진심인데?”
닉스가 [워터 볼]의 위치를 예측해 주지 않았더라면 시간이 꽤 끌렸을 것이다.
[대지모신의 가호]의 효과를 볼 수 없기에, 체력을 더 소모한 채로 물렸다면 위험했을 거다.
“모두 여신님 덕분이야.”
-후, 후후훗! 그 말, 참으로 듣기 좋구나!
뿌듯함으로 가득 찬 닉스의 음색.
참 알기 쉬운 여신님이다.
나는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죽은 네스를 어루만졌다.
[거대 뱀 네스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네스의 정수를 집어삼키는 순간.
“이, 이건?!”
내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