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네스는 혈산군처럼 활동 영역이 고정된 보스 몬스터다.
호수 중심부.
[미드론 상회]가 있는 섬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저쪽에서 여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역시, 이쪽이었군.”
난 두 눈에 힘을 팍 주고 호수를 살펴보았다.
물가에 아른거리는 커다란 그림자.
거대 뱀, 네스다.
몸길이는 약 20미터.
아나콘다보다도 기다란 몸뚱이가 수면 아래를 유유히 돌아다닌다.
[독수리의 눈을 사용합니다.]
[상대가 당신보다 조금 더 강합니다.]
네스의 몸뚱이에 감도는 붉은색 아우라.
혈산군이나 늪지의 마왕 때보다는 색이 훨씬 옅었다.
네스가 둘보다 약하다기보다는, 그만큼 내가 강해졌다는 의미!
-계약자여, 승산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느냐?
“바알 때보다는 나아.”
-참으로 믿음직스럽구나.
“내 목숨을 반쯤은 걸어야 한다는 말인데?”
-…….
늪지의 마왕이나 바알을 상대할 땐 질척이긴 해도 땅이었지.
거대 뱀을 사냥하려면 호수로 가야 한다.
[대지모신의 가호]도 무효화가 될뿐더러, [아가미] 스킬이 있어도 물의 저항력을 완화시키는 정도다.
수중전이라는 페널티를 모두 감수하고 사냥해야 한다는 것.
“말했잖아, 여신님 힘을 일깨우는 건 쉽지 않을 거라고.”
-저 뱀이 그렇게나 강적이었구나.
“승산이 없으면 시작도 안 했겠지만 말이야.”
-오오. 역시 여의 계약자니라!
네스의 동선을 확인한 후, 상인들을 만나러 갔다.
엘프, 드워프, 그리고 노움.
세 상인은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웃었다.
“어서 오게, 손님!”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겠습니다.”
“워, 월석, 더 사시려고요?”
자본주의에 입각한 훌륭한 반응이군.
-그대는 참으로 인기가 많구나.
여신님, 이런 반응은 인기 있는 게 아니라 호구를 발견했다는 겁니다.
효용성이 거의 없는 월석을 32개나 사 갔으니, 상인들이 호구 취급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엘프 상인 앞에 섰다.
“고객님, 특별히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축복받은 물푸레나무 잎 있습니까?”
“물고기 사냥을 하시나 보군요.”
“뭐, 그렇죠.”
정확히는 뱀이지만.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
엘프는 푸른색을 띤 잎을 내밀었다.
[축복받은 물푸레나무 잎사귀]
등급: 노멀
분류: 소모품
물속에서 움직일 때 물의 저항력을 30% 감소시켜 준다.
수면 위로 올라오면 잎사귀의 마법력이 바닥난다.
*지속 시간: 60분
*레인보우 아일랜드에서만 사용 가능.
“잎사귀는 개당 20포인트입니다, 고객님.”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엘프.
사실 저 잎사귀는 과거에 구매했던 월석처럼 인기가 없는 소모품이다.
꽤 길어 보이는 지속 시간.
자세히 보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잎사귀의 효과가 사라진다.
설명에서는 60분 동안 유지된다고 해도, 실제로는 1분에서 2분 정도만 써먹을 수 있는 거다.
전형적인 미끼 상품.
혹은 함정 카드다.
엘프가 저런 눈빛으로 보는 것도 당연하지.
‘나한테는 다르지만.’
폭군 메기의 정수에서 [아가미] 스킬을 얻어 냈다.
물 안에서 숨을 쉴 수 있기에, 잎사귀의 효능을 극대화할 수 있다.
[아가미]가 없었으면 10개 이상 구매해야겠지.
그렇게 해도, 네스와 전투를 벌일 때 상당히 불리했을 거다.
-플랜 B가 이 잎사귀를 여러 개 구매하는 것이었더냐?
난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꾸했다.
“세 개 주세요.”
난 미련 없이 포인트를 지불했다.
“미드론 상회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봐, 손님. 저번에도 보니 맨손이더만 무기는 필요 없나?”
“워, 월석 말고 다른 잡, 화도 있어요.”
두 상인의 눈동자에서는 탐욕이 뚝뚝 흘러내렸다.
무기나 방어구야, 튜토리얼에서 흡수한 정수 덕에 필요가 없었다.
나는 노움 상인 앞에 섰다.
“뭐, 뭘로, 드릴까요?”
“워터마크 세 개만 주시죠.”
“그, 그건, 개당, 30 포인트예요.”
[워터마크]
등급: 노멀
분류: 소모품
물 안에서 발을 디딜 수 있는 고정 형태의 판을 만든다.
*지속 시간: 60분
*레인보우 아일랜드에서만 사용 가능.
딱지 크기의 판.
물속에서 작동시키면 1제곱미터 넓이의 발판이 된다.
중심을 겨우 잡을 정도의 너비.
이건 네스와의 전투 중, 급박한 상황을 대비한 보험이다.
“볼 일이 있으면 또 봅시다.”
미련 가득한 드워프의 눈빛을 뒤로 한 채, 호수로 다시 진입했다.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튜토리얼 스테이지의 졸업 과제를 해결하는 것뿐.
-계약자여, 힘을 내거라! 여가 응원하겠노라!
“예예. 감사합니다.”
닉스의 응원을 한 귀로 흘리면서 호수 안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육감이 살기를 감지합니다.]
솜털이 삐쭉 서는 느낌.
붉은 눈동자가 물 깊은 곳에서 번쩍였다.
호수의 지배자, 네스가 침입자를 인지한 것이다.
나는 막 구매한 잎사귀를 입에 물었다.
[축복받은 물푸레나무의 잎사귀를 사용합니다.]
[저항력 및 부력이 30% 감소합니다.]
좋아.
효과 확실하네.
[아가미]와 중첩되면서 물의 저항력을 50%나 반감시켰다.
“와라, 뱀 새끼야.”
붉은 빛이 시시각각 나를 향해 다가왔다.
* * *
거대 뱀 네스는 아나콘다와 흡사하게 생긴 괴물이다.
주 공격 패턴은 물기와 조이기.
다행인 점은 독사가 아니라는 것 정도이려나.
쉬쉿- 쉬이잇!
아가리를 크게 벌린 뱀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계약자여, 뱀이 온다!
비명을 지르듯 경고하는 닉스.
나는 이미 전투 준비를 마친 지 오래였다.
“하아아아!!”
[포효를 사용합니다.]
네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역시.
늪지의 마왕은 격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포효의 효과가 나지 않았지만, 뱀 새끼한테는 제대로 먹혔다.
나는 평형 자세로 발을 오므리면서 물을 밀어냈다.
한 치 차이로 빗나가는 네스의 돌진.
[날카로운 손톱을 사용합니다.]
[탐욕의 가호로 손톱을 강화합니다.]
드드드드!
검붉은 마력이 날선 손톱을 휘감는다.
나는 [탐욕의 가호]로 침식한 손톱을 휘둘렀다.
아래쪽을 지나가던 네스의 기다란 몸뚱이가 손톱에 걸렸다.
푹!
탐욕의 가호로 한 단계 세진 손톱이 비늘을 어렵지 않게 헤집었다.
깨진 비늘 사이로 새어 나오는 초록색 피.
쉬이이잇!
네스가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요동치는 호수.
비늘 안쪽으로 파고든 손톱이 네스의 몸부림에 조금씩 밀려났다.
“어딜 도망가?”
[괴력을 사용합니다.]
나는 왼손으로 네스의 몸뚱이를 마저 붙들었다.
첫 공격에 괴력을 안 쓴 건, 과한 힘에 튕겨 나가지 않을까 해서다.
오른손으로 걸어 놨으니, 괴력 좀 쓴다고 밀리진 않겠지.
쉬이이잇!
네스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300%로 강화된 근력으로 몸에 구멍을 내 주니, 꽤 시원한 모양이다.
콰직!
클라이밍을 하듯, 양손으로 놈을 붙들고는 몸을 밀착했다.
네스의 굵기는 커다란 나무보다도 커서 양팔을 뻗었는데도 품에 안 들어왔다.
쉬이이잇!
몸을 털기를 포기한 네스.
이번에는 제자리에서 똬리를 틀더니 나를 휘감으려고 했다.
-뱀이 그대를 조이려 하느니라!
“알고 있어.”
기다란 몸뚱이가 나를 휘감기 직전.
[민첩한 뒷발을 사용합니다.]
그 몸을 발판 삼아서 세게 걷어찼다.
순식간에 벌어지는 거리.
똬리를 튼 네스는 붉은 눈으로 나를 포착하더니 다시금 몸을 풀려고 안간힘을 썼다.
[에너지 볼트를 사용합니다.]
[과충전을 완료했습니다.]
한계까지 충전된 푸른 구체가 정면으로 쏘아졌다.
노리는 건 손톱이 낸 상처.
치익- 네스의 비늘이 에너지 볼트의 충격량을 대부분 흡수했다.
하지만 깨진 비늘 사이로 에너지 일부가 스며드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쉬이이잇!
비명을 지르는 네스.
-과연. 그대의 공격이 효과가 있도다.
“흥분하지 마. 이제 시작이니까.”
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 거대 뱀이 호들갑을 떨고 있어도, 실제로 입은 피해는 미미했다.
반면에 이쪽은 뱀의 조이기에 휘말리면 죽은 목숨이거든.
이 얼마나 불합리한 싸움이야?
-계약자여,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왜?”
-지금 웃고 있느니라.
닉스의 말을 듣고 보니, 입술 끝이 살짝 위로 올라와 있었다.
한 치라도 어긋나면 죽을 수 있다는 긴장감.
도박사가 판돈을 모두 걸고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
난 이 긴장감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런 걸 안 즐겼으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으니까.”
-그대는 목숨을 걸었던 적이 많았던 것이더냐?
슬쩍 웃는 걸로 닉스의 말을 흘렸다.
회귀를 했다는 걸 이야기해 줄 수는 없으니, 그저 긍정하는 수밖에.
쉬잇! 쉬이이잇!
동여맸던 몸을 다 풀어낸 네스가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네스의 속도가 느려졌다고 해서 위험도가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이 더 위험해.’
놈의 머리끝이 좌우로 흔들렸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놓치지 않고 물어 버리겠다는 것이군.
한번 물리거나 조이기를 당하면 끝이다.
나는 도움닫기를 하듯, 양다리를 바짝 붙였다.
[탐욕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물을 침식하는 바알의 권능.
난 발끝에 닿은 물을 [탐욕]으로 붙든 후, 그대로 박찼다.
쿠션을 밟고 도약하는 감각.
푹신해서 제 속도를 낼 수는 없지만.
네스의 돌진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쯤은 가능했다.
[에너지 볼트를 사용합니다.]
네스가 몸을 트는 동안, 최대로 충전된 에너지 볼트를 한방 더 먹여 주었다.
쉬이이잇!
제자리에서 한껏 입을 벌리는 네스.
[워터 볼]
들이마신 물을 응축해서 고압력으로 내뱉는 기술이다.
쏘는 방향만 알 뿐, 눈에 보이지 않아서 피하기가 어려운 공격.
뭐,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말이야.
[육감이 살기를 감지합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짜릿한 감각.
-계약자여, 뭉쳐진 물이 정면으로 날아들고 있느니라!
나는 대각선으로 헤엄쳤다.
보이지 않는 공격.
워터 볼이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 만든 파동만이 유일한 흔적이었다.
잠깐만.
“여신님 눈에는 저게 보여?”
-후훗, 여의 눈을 피해 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도다.
오호라. 우리 여신님, 생각보다 쓸 만하잖아!
네스가 [워터 볼]을 사용하면 회피만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작전을 바꿔야지!
“저 뱀 새끼가 물 뱉을 때마다 이야기해 줄 수 있어?”
-그쯤이야 어렵지 않노라.
“각도, 그리고 노리는 위치도 말해 줘.”
-계약자여, 여를 믿거라.
좋아.
닉스가 처음으로 밥값을 해 주는군.
-정면이니라.
나는 물을 차면서 워터 볼을 회피, 네스한테 다가갔다.
-괴물에게 아무 대책 없이 다가가도 되는 것이더냐?
“저 녀석, 못 움직여.”
워터 볼을 사용하려면 물이 필요하다.
부풀어 오른 네스의 배.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안 보일 만큼 미세한 변화지만, 아까보다 확실하게 차올랐다.
“배 속에 물을 담아 두고 쏘는 거거든.”
-과연 여의 계약자로다.
상대의 정보를 미리 안다는 게 이래서 중요한 거다.
거대 뱀 네스의 정보는 이미 전 회차 플레이어들 덕에 밝혀진 상황.
내가 ‘회귀자’가 아니라고 해도 알 수 있는 정보들이다.
그 덕에, 네스 공략법을 짜는 건 쉬웠다.
움직임이 봉쇄된 네스.
닉스 덕에 워터 볼의 궤적을 읽을 수 있다면.
무방비 상태인 뱀 새끼한테 한 방 먹일 기회를 쉽게 만들 수 있을 거다.
나는 연신 물을 밀어내면서 네스와의 거리를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