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나는 서쪽으로 내달렸다.
삼림지대.
울창한 나무로 가득한 곳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계약자여, 무슨 일이더냐?
“분노 유인원. 숲에서 나오는 보스 몬스터를 잡아야 해.”
-여(余)를 만난 곳이 숲 아니었더냐?
“그랬지.”
-계약자의 성격상 그 괴물을 놓치고 갔을 리는 없을 터인데. 다른 연유가 있나 보구나.
오, 예리한데?
닉스의 말대로, 분노 유인원을 사냥하지 못한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튜토리얼 첫날.
화랑 길드의 유망주인 박종원의 팀이 분노 유인원을 사냥했다.
레인보우 아일랜드의 보스 몬스터들은 한 번 사냥하면 1주일이 지나야 나타난다.
“딱 30분 남았네.”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되는 것이더냐?
“그 녀석의 정수는 영영 못 먹는 거지.”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인보우 아일랜드는 튜토리얼 기간 이후 다시는 찾아올 수 없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분노 유인원의 정수를 포식해야 한다.
-계약자여, 그 눈빛은 좀 무섭구나.
“내 눈빛이 어때서?”
-여가 볼 때에는 시선만으로 능히 생물을 죽일 것 같으니라.
“우리 여신님, 농담이 갈수록 늘어나네.”
-농담이 아닌데…….
칭얼거리는 여신님의 말을 뒤로한 채, 속도를 올렸다.
[민첩한 뒷발]을 다리 근육에 무리 주지 않는 선에서 연속 사용.
순식간에 삼림 지역으로 진입했다.
“얼마 남았어?”
-14분이니라.
“그 정도면 충분해.”
분노 유인원의 출몰 지역은 삼림지역 남부.
혈산군이나 탈론 플레임처럼 고정된 위치에서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럼 이 숲을 하릴없이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이더냐?
“대략적인 포인트 정도는 있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간간이 보이는 플레이어들.
처음 숲에 들어왔던 때와 달리, 꽤 많은 플레이어가 삼림지대에 진출한 상황이다.
개중에는 분노 유인원을 노리는 플레이어 팀도 있을 터.
“이번은 시간 싸움이야.”
-여도 눈을 뜨고 유인원을 찾아보겠노라.
닉스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글쎄.
여신님이 돕는다고 해도 [초음파]의 효율보다는 떨어질 것 같은데.
이럴 땐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니겠나?
“여신님, 고마워.”
-고마운 줄 알면 하루 빨리 네스라는 놈을 쓰러트리거라.
살짝 떨리는 닉스의 목소리.
어럽쇼.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겠지?
닉스의 묘한 반응을 더 파 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안 좋았다.
곧장 삼림 지역 남쪽으로 이동.
이번에는 [민첩한 뒷발]을 수직으로 사용, 나무 위로 올라탔다.
-근방이 모두 내려다보이는구나.
“직접 발품 파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나아.”
긴장을 유지한 채, 분노 유인원이 재생성되는 시간을 기다렸다.
3, 2, 1.
“지금.”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리고는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였다.
이미 경쟁자들이 숲에 바글바글한 상황.
한순간의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지 모른다.
“저기 있다.”
-4시 방향이니라!
거의 동시에 튀어나온 목소리.
분노 유인원을 인지하자마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민첩한 뒷발을 사용합니다.]
퍼엉!
나무를 지지대 삼아서 도약, 분노 유인원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 인근에 있던 팀이 분노 유인원을 발견하더니 전투태세를 갖췄다.
안 돼. 분노 유인원은 내 먹이야!
“하아아아아!!!”
[포효를 사용합니다.]
[반경 20미터 안에 있는 존재는 근력과 민첩이 10% 감소합니다.]
[지속 시간은 20초입니다.]
내 고함 소리가 삼림지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김정호는 갓 20레벨이 된 플레이어다.
유력 길드의 지원을 받은 건 아니지만, 나름 실력이 있어서 튜토리얼 상위권에 들어왔다.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면 5위까지는 노려볼 만해.”
튜토리얼 랭킹을 노리려면 보스 몬스터를 반드시 사냥해야 한다.
괴물을 반복적으로 사냥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점수를 적게 준다.
한 마리당 0.5
그러다가 더 지나면 0.3으로 줄어든다.
점수 경쟁을 하려면 보스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는 구조.
그렇기에, 김정호는 팀을 이끌고 분노 유인원을 레이드하러 온 것이었다.
“대장, 괜찮겠죠?”
“걱정하지 마. 박종원이라는 녀석이 1일 차에 사냥했잖아.”
“그건 딥 슬라임도 마찬가지였잖아요.”
“타이밍 계산을 잘못했어.”
김정호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젖어들었다.
딥 슬라임은 분노 유인원보다 난이도가 낮았다.
물리 공격만으로는 쓰러트리기 까다롭지만, 속성 공격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명확한 보스 몬스터.
하지만.
김정호의 팀이 움직였을 땐 이미 딥 슬라임이 다른 플레이어에게 사냥당한 후였다.
“이번에는 안 놓친다.”
의욕을 불태우는 김정호.
“우리도 팀장 덕 좀 봐야죠.”
팀원들은 그를 따라 의욕적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시간 됐어요.”
“저, 저기. 분노 유인원 아니야?”
“나이스!”
막 재생성된 분노 유인원이 김정호 팀 앞에 나타났다.
“크흥, 크흥.”
분노 유인원은 김정호 팀을 보자마자 짙은 살의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모두들 공격 패턴은 숙지했지?”
“알죠. 첫 공격은 무조건 정면. 그다음은 불 공격.”
“방어 마법 전개 잊지 말고.”
김정호 팀은 분노 유인원 공략을 다시 한번 숙지했다.
정면충돌만 조심하면 두려울 게 없는 보스 몬스터.
탱킹 담당인 김정호가 정면으로 나서는 순간.
“하아아아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김정호 팀의 고막을 강타했다.
[포효에 노출되었습니다.]
[근력과 민첩이 10% 감소합니다. 20초 동안 지속됩니다.]
“으으윽, 몸이?!”
“누가 수작질을 부린 거야!”
당황하는 김정호 팀.
분노 유인원도 능력치가 감소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지라 지체 없이 김정호의 앞으로 돌진했다.
‘위, 위험해!’
분노 유인원은 보스 몬스터 중 약한 편이지만, 공격력 하나만큼은 엄청났다.
뒤늦게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분노 유인원이 휘두른 몽둥이가 한발 빠르게 김정호의 정수리를 향해 쏟아졌다.
흑백으로 된 기억들이 김정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주마등이라는 건가?’
한순간의 실수가 낳은 결과.
갑자기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앞에 두고, 김정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때.
“멍 때리기는.”
정수리 위에서 제3자의 음성이 들렸다.
회색 갑피를 감싼 괴인.
진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분노 유인원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
[탐욕의 가호]
검붉은 색으로 물든 손톱이 분노 유인원의 어깨에 파고든다.
쿵, 김정호의 머리로 날아들던 몽둥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푸아아악!
잘린 단면 사이에서 솟구치는 붉은 피.
진호의 일격은 분노 유인원의 오른팔을 도려내 버렸다.
“크흐흐흥!”
분노 유인원의 숨을 들이마셨다.
두 번째 공격 패턴.
불꽃 숨결이 진호에게로 쏟아졌다.
“위험해!”
김정호가 마른 비명을 토했다.
저 불꽃은 돌진 공격보다 훨씬 위험했다.
방어구 하나 없이 불꽃에 정면으로 부딪치면 숯덩이가 될 게 뻔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여유롭게 웃는 진호.
동시에,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으스스한 빛을 내뿜는 반지.
[마나 업소브]
새빨간 장막이 앞을 휘감더니, 분노 유인원의 불꽃을 집어삼켰다.
“어?”
김정호의 입에서 맥 빠진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분노 유인원의 화염.
상극인 물 속성 방어막이 아니면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공격이다.
튜토리얼 공략의 상식!
하지만 진호는 그 상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숴 버렸다.
“바쁘니까 짧게 끝내자.”
직진 코스로 분노 유인원의 앞에 도달한 진호.
쭉 튀어나온 손톱이 허공에 무수한 궤적을 그린다.
짐승의 움직임에서 따온 무공, 혈조공의 초식이 연이어 펼쳐졌다.
“크후후훙!”
분노 유인원은 하나 남은 팔을 성난 기세로 휘둘렀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뻗은 공격은 진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되레 무리하게 팔을 휘두르느라 빈틈을 더 드러내서 상처만 더 늘었다.
후방에 있던 김정호의 팀원들이 병장기를 쥐었다.
“우리도 돕겠…….”
“뒈지기 싫으면 거기서 가만히 있어.”
한기 가득한 목소리가 김정호 팀원들의 움직임을 붙들어 놓았다.
공중으로 비산하는 핏방울.
분노 유인원은 재생성된 지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진호.
이내 분노 유인원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김정호 팀은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참, 이 녀석의 권리는 나한테 있는 거 맞지?”
서로를 멀뚱거리는 눈으로 보는 김정호 팀.
‘인정 안 하면 우리도 저렇게 찢어 버릴 것 같은데.’
‘탑에서는 플레이어 범죄도 많으니까. 어떻게 범인을 찾겠어?’
‘난 저 눈빛 못 보겠어. 너무 무섭잖아.’
김정호 팀은 눈빛으로 의견을 빠르게 교환했다.
신호라도 교환한 듯, 동시다발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는 팀.
진호는 활짝 웃었다.
“말귀가 통하는 친구들이네.”
우드드득!
가루로 화하는 분노 유인원의 사체.
진호의 고유 능력, [포식]이 발동한 것이다.
“운이 좋았네.”
누구의 운이 좋다는 걸까.
진호는 으스스한 말을 중얼거린 후, 전장을 벗어났다.
“저 사람, 유진호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요. 눈빛이 아주 그냥…….”
“소유권을 요구했으면 살인멸구라도 할 눈빛이었어요.”
하얗게 질린 팀원들.
특히 진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김정호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튜토리얼 랭킹은 무슨.’
아서라.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김정호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다.
* * *
[버서크]
등급: ★★
분류: 액티브
광기에 몸을 맡긴다. 상처를 입어도 몸이 경직되지 않고 두려움이 사라진다.
대신 지속 시간 동안 이성을 잃는다.
*근력 30% 증가
*맷집 60% 감소
*지속 시간: 60초
*사용 후 3분 동안 모든 능력치 20% 감소.
버서크.
분노 유인원의 정수에서 추출한 스킬이다.
난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대로네.”
-너무 위험부담이 큰 스킬 아니더냐?
“응.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형 스킬이야.”
-방어력이 줄어들뿐더러, 지속 시간 후에도 페널티가 심하니라.
“풀리기 전에 적의 숨통을 끊어놓으란 말이지.”
모 아니면 도.
상대를 죽이거나, 아니면 내가 죽거나.
버서크처럼 리스크가 큰 스킬은 확실하게 승부를 걸 때만 써야 한다.
네스를 상대하기 전에 괜찮은 스킬을 얻었는걸?
-흐응.
“여신님, 못마땅한 게 있으면 말을 해. 끙끙거리지 말고.”
-여는 그대가 버서크를 사용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니라.
하기야.
도박에 가까운 스킬을 사용한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방증이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그래도 여와 약속하여라. 너무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노라고 말이야.
“날 걱정해 주는 거야?”
-설마 그러겠느냐. 여는 그저 계약자가 사라지면 염원을 달성할 방법이 없어져서 그러는 거니라.
“예예.”
난 건성으로 대꾸했다.
분노 유인원의 정수도 얻었겠다.
레인보우 아일랜드의 보스 몬스터 중, 남은 건 네스뿐이다.
거대 뱀은 어떤 정수를 줄까?
난 혀로 입술을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