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27화 (27/300)

27화

호수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 되어 있었다.

레인보우 아일랜드에서 네 번째로 맞이하는 밤.

사냥을 마친 플레이어들은 호수 주변에 삼삼오오 자리를 잡았다.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가득한 피로감.

‘사냥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탑의 초대장을 받은 플레이어라곤 해도, 원래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던 현대인들이다.

손발을 움직여서 괴물을 사냥한다?

바벨탑에서 나오는 여러 재화만 아니었다면, 플레이어가 이렇게 인기 있을 리도 없다.

호수 부근으로 가자, 쉬고 있던 플레이어들의 이목이 쏠렸다.

“저 사람, 혹시 유진호 아니야?”

“그 튜토리얼 랭킹 1위?”

“맞네. 맞아. 보스만 넷인가를 사냥했던걸.”

“혈산군도 잡았네. 미친.”

“근데 왜 저렇게 벌거벗고 다녀? 노출증이라도 있나.”

“…….”

마지막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자.

혹시 몰라서 [가시 갑피]로 전신을 둘렀는데, 그래도 이상하게 보이나 보다.

난 호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계약자여, 여의 힘이 숨겨진 곳은 저쪽이니라.

시커먼 연기가 뭉클거리면서 한 쪽을 가리켰다.

호수 안쪽.

네스의 영역이다.

“아, 거기로는 바로 못 가.”

-무슨 연유가 있는 것이더냐?

“말했잖아. 그냥 가면 물고기 밥 된다니까.”

수중전은 불리하다.

물 안에서 전투를 벌이면 내 능력의 30%나 발휘할 수 있을 거다.

평범한 물고기 괴물이라면 모를까.

호수 지역의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기에는 턱도 없다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정수를 포식할 거야.”

늘 하던 대로 말이야.

호수에 사는 괴물은 [철붕어]와 [폭군 메기].

둘 중 하나는 수중전에 도움이 되는 정수를 주지 않을까?

-그대는 그 물고기들이 무슨 정수를 줄지 알고 있는 것이더냐.

“아니. 몰라.”

회귀 전의 난 호숫가 근처에 다가갈 엄두도 못 냈다.

철붕어와 폭군 메기의 정수를 포식해도 ‘물’과 관련된 힘이 반드시 나올 거라는 보장은 없다.

-걱정이 되는구나.

“에이, 뭐 플랜 B는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쇼.”

난 손을 휘휘 저었다.

[포식] 능력만 믿는 게 아니라는 말씀.

하지만 그 전에 물고기 괴물의 정수부터 먹어 봐야겠지.

“낚시를 하려면 포인트를 잘 정해야 해.”

물 안은 호수 괴물들의 무대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필패.

허우적대다가 괴물 여러 마리한테 집단으로 뜯길 거다.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다는 것도 큰 페널티다.

호흡을 최대한 참는다고 해도 몇 분이 고작.

수면과 가까워야 머리라도 내밀어서 뻐금거리며 산소라도 들이마실 수 있다.

물고기가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의 수위.

동시에 너무 깊지 않은 곳.

20분 정도 호숫가를 돌았을 때, 적절한 깊이를 발견했다.

이 정도면 한번 해볼 만하겠어.

“유진호 플레이어!”

호수를 빤히 바라보던 중,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더라.”

“오지원입니다. 황무지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이요.”

풀 플레이트로 전신을 무장한 사내.

오지원은 얼굴 가리개를 올리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 표정, 회귀 전에 많이 봤었다.

‘선망의 눈빛.’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의 정점.

군주가 되었을 때, 뭇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과 표정이다.

생각해 보니 탑의 침식이 시작되면서 지구가 무너질 때, 위기에서 구해 낸 사람들도 저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괜히 입맛이 쓰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나는 상념을 털어 냈다.

과거로 돌아온 이상.

그 비극이 반복되는 일은 없을 거다.

“활약상이 엄청나시던데요. 압도적인 1위라니!”

“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알아보는 거지?”

불현듯이 떠오른 의문.

내 머리 위에 [유진호]라는 팻말을 걸어 두고 다닌 것도 아닌데, 여러 플레이어가 호숫가로 오자마자 나를 알아봤다.

“아, 하하. 그게 말입니다. 소문이 났어요.”

“무슨 소문?”

“회색 갑피를 두른 채 반나체로 돌아다니는 게 유진호다, 라고요.”

“…….”

소문의 진원지가 누구인지는 안 봐도 훤했다.

중급 포션으로 끝낼 게 아니라 죽여 버렸어야 했나?

“박종원이라는 녀석의 짓이군.”

“예. 1위를 견제해야 한다고 소문을 내던데요.”

이번 튜토리얼에는 화랑과 불사조 외에도 여러 길드의 투자를 받은 유망주들이 섞여 있다.

박종원은 유망주들을 선동, 날 견제하려고 열심히 소문을 냈다고 한다.

“저희는 거절했죠.”

“목숨 아까운 줄은 아네.”

“에, 에이, 저희를 도와주신 분한테 칼날을 들이밀 만큼 염치없진 않습니다.”

나는 오지원의 말에 픽, 하고 웃었다.

“견제라고는 해도. 따로 본 사람은 없었어.”

“유진호 플레이어 혼자 탈론 플레임에 혈산군까지 잡으셨잖아요.”

“그야…….”

“누가 1대1로 혈산군한테 도전하겠습니까?”

혈산군은 튜토리얼 마지막 날까지 레벨을 올려도 단독사냥이 거의 불가능한 강력한 보스 몬스터다.

잡아도 무공 비급이나 하나 주고 말이야.

고난이도에 비해 보상도 안 좋은 편이라, 공략집에서는 혈산군을 피해가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이번 회차 플레이어들은 유진호 플레이어가 1위라고 이미 생각하던걸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예. 전 대신 2위를 노리고 있습니다.”

하핫, 하고 멋쩍게 웃는 오지원.

말 나온 김에 튜토리얼 랭킹이나 확인해 볼까.

[당신은 현재 0층, 레인보우 아일랜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필드 보스

거대 뱀 네시 - 생존

늑대왕 서린 - 사망(사냥한 플레이어: 유진호)

딥 슬라임 - 사망(사냥한 플레이어: 유진호)

분노 유인원 – 사망(사냥한 플레이어: 박종원)

혈산군 - 사망(사냥한 플레이어: 유진호)

탈론 플레임 - 사망(사냥한 플레이어: 유진호)

…….

*포인트 획득

1위 - 유진호(1,501점)

2위 - 오지원(539점)

3위 - 박종원(472점)

4위 - 정신호(468점)

5위 - 이도영(453점)

“2위네?”

“조금만 마음 놓아도 따라잡힐 차이입니다. 더 노력해야죠.”

딥 슬라임한테 잡아먹혔을 운명을 바꾼 결과인가.

생각보다 높은 점수를 획득하면서 이번 회차 선두에 섰다.

먼 미래에서도 얼마나 두각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회귀하고 나서 처음으로 만든 유의미한 변화이기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근데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호숫가에 오는 게 대수인가.”

“편히 쉬려고 오신 것 같지가 않아서요.”

예리하기는.

딥 슬라임 상대로 고전하던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감이 좋았다.

“낚시하러 왔다.”

“낚시……요?”

“어. 저기에 낚을 애들 있네.”

나는 호수를 가리켰다.

물 곳곳에 비치는 시커먼 음영.

레인보우 아일랜드에서 가장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물고기들이다.

“저걸 어떻게…… 낚싯대가 못 버틸 건데요.”

“괜찮아. 튼튼한 걸 쓸 거라.”

낚싯대 겸 찌.

그건 바로 내 몸뚱이다.

* * *

호수에 몸을 담그는 건 두 번째다.

밤이라서 그런지 꽤 차갑다.

그래도 건식 사우나보다는 낫지.

화산 지대에서 돌아온 후에 호수에 들어오니, 열탕과 냉탕을 오가는 기분이다.

호수 지역의 물고기들은 주행성이다.

하지만 잠을 자고 있을 뿐, 외부의 자극에 둔감한 것은 아니다.

미드론 상회를 찾아갈 때도 물고기들을 깨우지 않을까 긴장했었지.

이번에는 반대로 잠든 놈들을 깨워야 한다.

“무운을 빕니다.”

등 뒤로, 오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걱정된다나.

이번 낚시(?)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도와준다고 저렇게 있는 거다.

참, 오지랖도 넓은 녀석 같으니라고.

[두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습니다.]

[대지모신의 가호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발이 닿지 않는 곳까지 나아오자, 가호 하나가 힘을 잃었다.

레인보우 아일랜드를 돌아다닐 때는 상시 작용 버프나 마찬가지여서 잊고 있었네.

-호오, 그대는 가이아한테도 가호를 받은 것이더냐?

그러고 보니 닉스는 가이아와 동급의 신이었지.

“아니, 정수 먹으니까 생기더라고.”

-필멸자가 신의 정수를 먹다니. 하긴…… 그대는 신력도 다룰 수 있으니 무리가 아니구나.

“내가 좀 잘났잖아.”

닉스한테 대꾸하고는 팔과 다리로 물을 밀어냈다.

고요한 호수 한가운데서 철퍽거리는 발장구 소리가 퍼졌다.

꿈틀, 잠들었던 괴물 하나가 몸을 움찔거렸다.

철붕어.

비늘이 쇠처럼 단단한 종으로, 호수에서 가장 흔한 괴물이다.

막 깨어난 철붕어가 나를 노려보았다.

-오는 건 한 마리다.

“잘됐어.”

어그로를 잘못 끌어서 철붕어 다수가 몰려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소음이 적당했나 보다.

철붕어는 지느러미를 좌우로 펼치더니, 물을 세게 밀었다.

촤악!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가시멧돼지나 뿔토끼의 돌진을 보는 듯했다.

여기가 지상이었으면 충분히 반응할 수 있겠지만.

발 디딜 곳 없는 물가라서 몸을 바동거리는 게 전부였다.

‘예상한 일이야.’

난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살짝 낮춘 채, 수중에서 자세를 잡았다.

근력 수치가 높다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지금처럼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근력이 90이라고 해도, 실제로 쓸 수 있는 건 20이나 30 정도다.

사람이 발을 딛고 선 거랑 물에 떠 있을 때 쓸 수 있는 힘이 다른 거랑 마찬가지다.

‘그래도 버티는 것쯤은.’

퍼엉-!

정면으로 달려든 철붕어가 내 복부를 들이받았다.

[갑피의 내구도가 37% 소모되었습니다.]

돌진 한 번에 갑피가 1/3 이상 박살 날 줄이야.

표면에 난 가시도 철붕어의 단단한 피부를 뚫지 못하고 모두 부서져 버렸다.

“유진호 플레이어!”

살짝 울리는 오지원의 목소리.

물 안에 있다 보니 제대로 들리지가 않는다.

자식, 당황하기는.

말했잖아. 내가 바로 찌이자, 낚싯대라고!

-후훗, 저치는 그대를 향한 믿음이 부족한 모양이로다.

그러게 말이야.

내 힘을 보여 줘야지.

[괴력을 사용합니다.]

물속처럼 자세를 못 잡는 상황에서는 혈조공보다 괴력의 효율이 더 좋았다.

나는 철붕어를 안은 채, 양손으로 몸통을 짓눌렀다.

이렇게 품 안으로 들어오면 힘을 주기가 훨씬 쉬워지지 않겠어?

‘뭉개 주마.’

방어력이 뛰어난 철붕어.

놈을 쓰러트리려면 비늘에 생채기를 내는 것보다 이게 더 효과적이었다.

철붕어의 눈동자가 툭 튀어나왔다.

외형은 멀쩡하지만, 내부 장기가 슬슬 짓눌리기 시작했을 거다.

몸을 좌우로 틀더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호숫가를 돌면서 적당히 낮은 수위를 찾은 게 이 이유다.

철붕어 녀석은 불리해지면 잠수하거든.

깊이 들어가면 위험하다.

당황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힘을 주면서 철붕어의 몸뚱이를 눌렀다.

2분, 그리고 3분.

시간이 지날수록 철붕어의 움직임이 둔해진다.

작은 문제가 있다면.

‘더럽게 힘드네!’

나도 체력이 슬슬 빠져간다는 거다.

억지로 벌이는 수중전.

[대지모신의 가호]도 빠진 상태다.

튜토리얼 스테이지를 진행하면서 늘 도움을 받았던 [대지모신의 가호]이기에, 유독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거의 다 왔어!

철붕어의 기력이 떨어진 게 느껴진다.

마침내.

콰득! 비늘이 확 주저앉으면서 철붕어의 내부가 드러났다.

곤죽이 되어 버린 내장.

[경험치 5.4%를 획득했습니다.]

초점 풀린 동공이 나를 원망스럽다는 식으로 바라봤다.

어쩌겠냐.

밖에서 싸웠으면 더 빠르고 안락하게 숨통을 끊어 줬을 텐데.

철붕어의 정수를 포식하자, 툭 튀어나온 동공이 가루로 화했다.

“후아.”

철붕어 하나를 사냥하는 데 예상보다 힘을 많이 뺐다.

나는 호숫가로 돌아왔다.

“대, 대단하십니다.”

“대단하기는. 한 놈 잡는 데 4분 넘게 걸렸어.”

“철붕어를 그런 식으로 사냥하는 분은 당신 말고 없을 겁니다.”

“그건 좀 욕 같은데?”

“아…… 참, 그러고 보니 옷가지가 다 찢어졌는데 괜찮으십니까.”

응?

오지원의 말을 듣고 보니, 허한 느낌이 들었다.

철붕어한테 달라붙는 동안 겨우 걸쳐져 있던 옷이 모두 찢어져 버렸다.

끙- 나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가시 갑피]로 몸 전체를 감싸서 민망한 상황에 처할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좀 찝찝하잖아.’

옷이 찢어지는 건 예상 안 했단 말이야.

여분을 챙겨 왔을 리 없다.

“저, 유진호 헌터. 예비로 챙겨 온 거라도 드릴까요?”

“예비?”

“네. 제 덩치가 있다 보니 좀 크겠지만 걸칠 만은 할 겁니다.”

나는 감격한 눈빛으로 오지원을 바라보았다.

“야, 너 의리가 좀 있구나?”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옷 정도야 싸죠.”

자식, 의도한 건 아니지만 살려 준 보람이 있네!

“잠깐. 옷은 나중에 줘.”

“예?”

“호수를 들락날락하면 금방 찢어질 거야.”

호수 안의 괴물들은 하나같이 녹록한 상대가 아니다.

옷가지를 챙겨 입는 건 호숫가에 머무르는 괴물들의 정수를 모조리 포식한 뒤다.

나는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면서 의욕을 불태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