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만마전에서 가장 드높은 옥좌.
바알은 검은 옥좌에 앉은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전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로브로 전신을 감싼 존재.
바벨탑의 관리자는 공손한 자세를 취하면서 고개를 올렸다.
“오염된 옥좌의 주인이시여.”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냐, 관리자?”
“그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위대한 성좌여.”
껄껄-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바알.
그가 거하는 대전, [만마의 궁]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관리자야, 나한테 책임을 물려고 여기 온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너희들의 힘만으로는 탑을 만들지도 못했을 거잖아.”
손을 까딱이는 바알.
대전에 휘몰아친 강풍이 관리자의 로브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니까 로브 안에 얼굴을 쏙 감춰 놨지.”
바알은 다시 한번 낄낄거렸다.
탑을 세운 이들.
고신족.
시대의 흐름에 밀려난 이들은 정체를 감추고 현시대의 신들에게 접근했다.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시련의 공간을 만들고, 필멸자들이 오르는 과정을 지켜보자고.
이 시점에서야, 성좌들도 관리자의 정체를 알았지만 탑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묵인하는 중이다.
“올림포스와 앙겔로스, 그 외에도 여러 사회에서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킥킥, 알았어. 그만큼 영성을 지불하면 되잖아.”
영성.
성좌가 탑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화폐 단위다.
슈아아악!
바알의 손에 맺힌 검붉은 기류가 관리자에게로 흡수되었다.
[바알이 시스템에 영성을 지불했습니다.]
[이번 난입의 페널티로 탑 시스템에 접근하는 것을 90일 동안 금합니다.]
[페널티 기간 중에 탑의 운영에 관여하려 할 경우, 추가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홱 돌려서 나가는 관리자.
바알은 권태로운 눈빛을 지우고 관리자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보라색 머리의 관리자라고 하면, 그 녀석인가?’
마법의 신 루리엔.
탑을 세우는 데 관여했던 핵심 인물이다.
그녀가 나서야 할 만큼, 이번 사태가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하나, 바알은 입가에 함박웃음을 띠었다.
‘그 꼬맹이 말을 듣길 잘했어.’
헤르메스.
올림포스의 전령신이 찾아온 것은 불과 몇 시간 전이다.
-튜토리얼 한국 채널에서 아레스와 하늘의 악이 주목하는 플레이어가 있다.
헤르메스가 전한 말이다.
아레스야 올림포스의 양아치로 악명이 자자했지만, ‘하늘의 악’ 성좌는 달랐다.
만마전의 주인인 바알이나 신왕 제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력한 성좌.
바알은 흥미가 생겼다.
‘하늘의 악’이 관심을 가지는 플레이어!
성좌에게 엄청난 가치를 지닌 영성을 지불하면서 튜토리얼에 간섭한 것도 흥미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막대한 영성을 지불했지만, 바알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 덕에 재미있는 필멸자를 발견했다.
‘유진호.’
바알은 그 이름을 곱씹었다.
슈아아악!
검붉은 기운이 다시 한번 바알의 손에 아른거렸다.
“재미있는 걸 보여 주었으니, 나도 선물을 해야겠지?”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영성을 추가로 지불하여 유진호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강화하려 합니다.]
[탑의 시스템이 정당한지를 고려합니다.]
[강화된 퀘스트 난이도를 고려할 때, 합당한 보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의 제안을 수용합니다.]
검붉은 기류가 허공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주 재밌겠어, 킬킬.”
바알의 샛노란 눈동자 위로 기이한 빛이 번들거렸다.
* * *
늪에 누운 채로 숨을 헐떡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탑 시스템이 보상 산정을 마쳤습니다.]
[강화된 보상이 지급됩니다.]
▶ 히든 퀘스트 - 늪지의 위협을 통과했습니다.
▶ 보상: 탐식의 입
[탐식의 입]
등급: 레전드
분류: 반지
칠죄종 중 탐식을 주관하는 악마, 바알의 힘이 깃든 반지입니다.
어떤 것이든 포악하게 잡아먹습니다.
*맷집 + 30
*마력 + 20
*성장형 아티팩트
*[마나 업소브] 스킬 내장.
[마나 업소브]
등급: ★★★★
분류: 액티브
마력으로 된 투사체 공격을 흡수한다.
사용자의 마력 수치를 넘어선 공격은 일부만 흡수할 수 있다.
“와.”
그림자 보주에 이은 두 번째 레전드 등급이다.
마찬가지로 성장형!
성유물까지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엄청난 보상이었다.
난 [탐식의 입]의 정보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마나 업소브. 유용한 내장 스킬이야.’
각도만 잘 맞으면 투사체 공격을 흡수할 수 있다.
화살이나 총탄처럼 실체가 있는 건 안 되지만, 마법은 각도만 잘 맞추면 충분히 무효화할 수 있다는 거다.
[마나 업소브]로 투사체를 흡수하기만 하면 마나 회복도 가능하고.
지금이야, [용의 심장] 덕에 마나가 넘쳐나지만 더 높은 등급의 정수를 얻으면 소모량도 늘어날 것이다.
미래를 생각하면 더더욱 가치가 높은 내장 스킬이다.
바알 상대한다고 목숨 걸 만했는데?
성장형인데 시작점이 레전드이니 말 다 했지.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왜 그리 웃느냐?
“보상이 생각보다 좋아서.”
유니크보다 한 단계 위인 레전드.
조건만 맞추면 에픽이나 초월 등급 아티팩트까지 성장할 수 있다.
초월 급 아이템은 회귀 전, 그러니까 세계가 멸망하던 때에도 희소성 있는 장비였다.
[탐식의 입]이 어느 등급까지 성장할지는 모르지만, 튜토리얼에서 얻기에 과분한 아티팩트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노란색으로 빛나는 반지를 오른손 약지에 끼웠다.
곧바로 적용되는 스텟 보너스.
[마나 업소브] 스킬은 실전에서 사용해 봐야 작동 방식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늪지의 마왕을 쓰러트렸을 때는 어떤 보상이 나왔으려나.’
〔잊힌 신전〕 때와 마찬가지로 유니크 아이템을 주지 않았을까.
1회차 때에는 없는 지식이다 보니 짐작만 할 뿐이다.
-만족하나 보구나.
“응. 덕분에 여신님과의 약속도 더 빨리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약속은 되었느니라.
“무슨 소리야?”
-여와의 계약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지 말라는 것이다.
어럽쇼.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내가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려는 이유가 계약 때문이라고 여긴 듯했다.
“그게 아니라…….”
닉스에게 대꾸하려는 찰나.
손에 낀 반지에서 으스스한 기운이 솟구쳤다.
[탐식의 입에 깃든 성좌의 기운이 착용자에게 반응합니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당신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어럽쇼?
반지에서 솟구친 검붉은 기운은 곧장 내 피부로 스며들었다.
막대한 에너지.
과거 아테네에서 가이아의 정수를 마주했던 때와 비슷했다.
[성좌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내려준 가호가 스며듭니다.]
[마력이 20 늘어납니다.]
[칠죄종 - 탐욕의 가호]
등급: EX
분류: 액티브
가호 랭크: 1
칠죄종 중 탐욕을 주관하는 마신, 바알.
탐욕의 가호는 어떤 도구나 물질이든 침식할 수 있다.
잠깐. 성좌의 가호라굽쇼?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건데!”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의 가호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성좌를 수호성으로 선택해야 얻을 수 있는 강력한 권능.
내가 [대지모신의 가호]를 얻은 거야 포식이라는 변수가 있어서 가능한 거였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성좌가 직접 가호를 준 거라서 페널티나 위험 부담도 전혀 없었다.
“히야, 엄청나네.”
바알한테서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수호성 계약을 맺지도 않았는데 가호를 받을 줄이야.
내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계약자여, 그 불쾌한 힘은 무엇이더냐?
“아, 아까 치고받았던 성좌가 선물이라고 제힘을 나누어 줬네.”
-여도 아직 계약자에게 주지 못한 가호라니. 다른 성좌가 감히 선수를 쳤다는 것이더냐!
으음, 난 이미 [대지모신의 가호]도 있는데요.
상태 창 좀 제대로 보지.
-계약자여, 설마 여 말고 저 진흙 덩어리와 계약하려는 마음이 생긴 것은 아니더냐?
“에이, 순번은 지켜야지.”
우리 여신님.
바벨탑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보니, 유일한 끈인 날 잡으려고 애를 태우셨다.
“아마, 바알이 이걸 준 건 수호성 계약을 맺자는 걸 거야.”
-수호성 계약?
“응. 보통은 수호성 계약 체결 후에 가호를 내려주는데…….”
나는 말끝을 흐렸다.
바알이라는 녀석, 내 활약상을 보고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렇다면 저 진흙 덩어리가 수호성 제안을 하면 받아들일 것이더냐?
“설마. 나한테는 여신님밖에 없는걸.”
-계약자여!
감동한 기색을 띤 닉스.
뭐…… 닉스가 아니어도 수호성 계약을 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수호성 계약은 스포츠로 치면 후원 기업 같은 거다.
평소에는 활동에 도움이 될 만한 지원을 여럿 받지만, 해당 성좌의 명령대로 행동해야 할 때가 간간이 생긴다.
꽤 강력한 제약.
회귀 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나한테는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탑이 세계 침식을 시작하면 더더욱 말이야.’
성좌들은 지구의 존망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수호성 계약을 맺은 플레이어들을 다른 세계로 이적해 주겠다는 제안을 해 버리니.
회귀 전에도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 세계의 멸망을 피해 이상향으로 떠났다.
난 그런 미래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받은 걸 안 쓰겠다는 건 아니고.
‘잘 써먹겠습니다, 성좌 나으리.’
나는 히죽 웃으면서 [탐욕의 가호]를 시험해 보았다.
무엇이든 침식하는 능력.
늪에 손을 뻗고 [탐욕]의 힘을 전개하자, 검붉은 마력이 핏줄처럼 퍼져 나갔다.
“오?”
침식된 진흙 덩어리가 내 살과 근육처럼 인식된다.
나는 추가 마력을 불어넣었다.
끓어오르는 늪 일부.
늪지의 마왕처럼 솟구친 진흙이 길게 늘어나면서 촉수의 형태를 띠었다.
시험 삼아 촉수를 휘둘렀다.
근처에 있는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면서 부러졌다.
“이런 거였군.”
난 [탐욕]의 마력을 거두었다.
주저앉는 진흙.
바알이 선사한 [탐욕의 가호]는 내 마력으로 물질의 성질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강화시키거나, 혹은 형태를 바꾸거나.
대신 마력 소모가 심했다.
‘가성비가 좀 안 좋네.’
진흙 채찍을 휘두르는 데 소모된 마력이면, 에너지 볼트 10발을 전개할 수 있다.
[대지모신의 가호]에 비해 활용 범위가 넓은 만큼, 마력 소모량도 월등했다.
지금은 발동 속도도 느린 편이고.
[탐욕의 가호]이 지닌 힘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꽤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것 같다.
‘침식이면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으려나?’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종류를 불문하고 침식하는 게 가능하다면…… 내 육체도 강화할 수 있지 않을까?
[날카로운 손톱을 사용합니다.]
검붉은 기운이 20센티 길이로 튀어나온 손톱 위에 드리운다.
꿈틀- 꿈틀-.
탐욕의 힘이 손톱에 스며들더니, 예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이게 되잖아?”
진흙처럼 형태를 마음대로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절삭력이 한 단계 강해져서 2성급 스킬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
[날카로운 손톱 - 침식]
등급: ★★
분류: 액티브
손톱의 절삭력과 경도를 강화한다. 마력을 부여하면 추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탐욕의 가호]의 침식을 받은 상태. 등급이 한 단계 올라 있다.
-검붉은 기운은 그 성좌의 가호인 것이더냐?
“응.”
-참으로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닉스가 싫다고 해도, 전투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수단은 뭐든 사용할 생각이다.
[가시 갑피]에도 [탐욕의 가호]를 사용했다.
내구도 및 가시의 날이 더 위협적으로 변했다.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용의 심장] 효과가 적용되는데도 마나가 조금씩 소모되었다.
‘잘됐군.’
마나는 어차피 넘쳐났으니, [탐욕의 가호]를 활용하는 게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신의 가호를 둘이나 지닌 플레이어가 있을까?
회귀 전후를 통틀어도 나 말고는 없을 거다.
“아. 까먹을 뻔했네.”
바알이 보상을 퍼 줬다고 해서, 근본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내 근본은 포식.
엉덩이 아래에는 힘겹게 쓰러트린 바알, 아니 놈이 빙의했던 ‘늪지의 마왕’의 사체가 흘러내리는 중이다.
[탐식의 입]나 바알의 가호.
모두 튜토리얼에서 얻을 수 없는 값진 보상이지만, 내 만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흐흐, 넌 뭘 줄 거냐?”
진흙 덩어리에 손바닥을 뻗고는 [포식]을 사용했다.
늪에 가득했던 물기가 증발하면서 언덕 높이로 쌓인 흙더미가 가루로 변했다.
마침내.
[포식]으로 늪의 마왕의 정수를 완전히 흡수하자 반경 100미터 부근이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
이 근방을 뒤덮은 늪 자체가 ‘늪지의 마왕’이었나 보다.
[늪의 마왕의 정수를 포식했습니다.]
[포식한 정수: 100%]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