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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24화 (24/300)

24화

바알.

72 마신의 수장이자, 이만만 악마 군세를 지휘하는 악마.

만마전의 가장 높은 곳에 선 존재.

전염의 군주.

탐식(貪食)의 주관자.

거짓된 풍요의 왕.

그 외에도 흉흉한 신화를 여럿 가진 악마들의 왕이다.

‘형이 왜 여기서 나와?’

[냉혈이 발동됩니다. 평정심을 유지합니다.]

[냉혈이 발동…….]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냉혈.

늪지의 마왕, 아니 그 껍질에 빙의한 바알은 존재감만으로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설마하니 저 진흙 덩어리를 만드는 데 바알이 관여했을 줄이야.

바벨탑을 세운 건 고신족들이지만, 탑을 이루는 요소 곳곳에는 현세대의 성좌들이 여럿 개입해 있다.

땅으로 추락해 버린 옛 성좌들.

별과 별 사이에 새겨 놓은 영광은 신기루처럼 허망한 것이 되었고, 옛 신들이 이룩했던 권능 대부분이 사라졌다.

한 세계를 빚어내는 일.

고신들이 지닌 힘만으로는 불가능했기에, 옛 신명을 감춘 채 ‘관리자’라는 이름으로 성좌들에게 접근했다.

바알이 관여한 것도 탑을 만드는 데 소모한 본인의 ‘지분’이 있어서 가능한 거겠지.

-저 존재감. 진흙에 깃든 존재가 완전히 달라졌도다.

“그럴 만해. 성좌가 들어왔거든.”

-성좌라고 하면, 여와 같은 신의 영역에 이른 존재 아니더냐?

“뭐, 모든 성좌가 신은 아니다만 비슷하지.”

-계약자여, 어서 물러나라. 네 힘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적이니라!

“아니야.”

꿀꺽.

난 침을 삼켰다.

“오히려 좋아.”

바알.

성좌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

그런 존재가 퀘스트에 관여한 만큼, 쓰러트리기만 하면 보상도 엄청날 것이다.

「너, 웃고 있네?」

그 말에 볼을 어루만져 보니, 내 입가 끝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

“당신을 쓰러트리면 그만큼 보상을 받을 것 같아서.”

「크크, 역시 재미있어.」

늪지의 마왕.

아니, 그 껍데기를 쓴 바알의 입가도 호선을 그리면서 위로 올라갔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퀘스트에 관여합니다.]

[패배를 인정해도, 전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강제 전투.

이제는 중도 포기가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 같은 건 없었어.”

나는 호기롭게 앞으로 나아갔다.

바알을 상대로 탐색전을 벌일 여유 같은 건 없다.

[독수리의 눈을 사용합니다.]

[상대가 당신보다 조금 더 강합니다.]

현격하게 줄어든 마력 양.

바알이 진흙 덩어리에 빙의했어도, 소모된 마력이 회복되지는 않았다.

다행이야.

소모된 마력이 100%로 차올랐으면 이길 가능성 자체가 없거든.

탑 시스템 일부가 무효화되었다고 해도, 나름의 밸런스 패치는 해 줬나 보다.

촤락!

진흙으로 된 촉수 다발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늪지의 마왕이 전개했던 것보다 훨씬 가늘고, 숫자는 10배로 늘었다.

‘빨라.’

진흙의 중량을 줄인 만큼 속도가 늘어났다.

그럼 위력이 약해졌느냐?

아니었다.

늪지의 마왕보다 훨씬 뛰어난 마력 제어 능력을 십분 활용, 공격에 소모되는 마력 양은 줄이고 위력을 증폭시켰다.

-위험하도다. 모두 피하는 건 불가능해.

“알고 있어.”

[가시 갑피를 사용합니다.]

허리를 낮게 숙인 채, 가시 갑피를 믿고 전진했다.

하나하나 쳐 냈다가는 단전에 남은 내공이 먼저 고갈될 거다.

차악! 착!

사방에서 날아든 채찍이 몸을 두들긴다.

빠르게 소모되는 갑피 내구도.

모든 충격을 흡수해 주지는 못하기에, 채찍에 맞을 때마다 뼈가 아려왔다.

-계약자여! 위험하다!

“줄 건 줘.”

[초음파를 사용합니다.]

육감과 초음파를 병행.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0이 되는 것만 피해서 몸을 움직였다.

한번 파괴되면 재사용까지 1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급소를 가리고 있는 갑피가 박살 나면, 그때는 정말 위험했다.

쏟아지는 채찍을 일일이 보면서 피하는 건 불가능.

제2의 눈인 초음파와 육감을 동시에 사용하면 채찍의 궤적 정도는 읽어 낼 수 있다.

매 맞는 것도 재주야, 재주!

‘생각 같아서는 도약해서 거리를 좁히고 싶지만…….’

[민첩한 뒷발]을 사용하는 것도 위험했다.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스킬의 특성상 정면 돌진을 해야 하는데, 그걸 바알이 가만둘 리가 없다.

내 움직임이 읽히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거든.

늪지의 마왕이야, 내 궤도를 읽어낼 만큼의 능력이 없었기에 [민첩한 뒷발]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그렇지만.

바알은 호락호락한 적이 아니었다.

회귀 전의 나라고 해도 바알과 일전을 벌이면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역병 파리]

돌연 시커먼 안개가 눈앞을 물들였다.

안개처럼 보이는 건 무수한 숫자의 파리였다.

나는 숨을 꾹 참았다.

저 파리 떼가 있는 데서 호흡을 하면 공기에 섞여서 몸속으로 파고들 게 분명했다.

입을 틀어막으니, 파리들은 깨어진 갑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바알의 권능을 지닌 파리들.

[오염의 독이 스며듭니다.]

[타락의 독이 스며듭니다.]

…….

내 피부를 물어뜯자, 여러 가지 독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오른팔은 탈 것처럼 뜨거운데, 왼팔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진다.

제멋대로 날뛰는 감각.

어질어질하다.

하지만 [냉혈] 덕에 고통 가운데서도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대로는 그대의 몸이 버티지 못한다.

“그건 저 녀석도 마찬가지야.”

진흙 덩어리에 스며든 마력은 꽤 줄어 있었다.

채찍 수십 개.

그리고 파리 떼를 연거푸 다루면서 힘을 꽤 소진한 상태다.

‘지금이다.’

[민첩한 뒷발을 사용합니다.]

발로 지면을 찼다.

이번에는 직진 코스가 아니다.

하늘 위로 도약, 45도로 치솟은 몸이 진흙으로 된 머리로 향했다.

늪지의 마왕, 아니 그 껍데기를 쓴 바알의 신장은 약 5미터.

[민첩한 뒷발]을 대각선으로 전개해서 놈의 머리 위로 올라탔다.

[날카로운 손톱을 사용합니다.]

[혈조공을 사용합니다.]

1초식, 맹호혈조.

내공이 더해진 조법이 바알의 정수리를 헤집었다.

사방으로 튀는 진흙.

바알의 잔여 마력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재미있는 짓을.」

투툭, 길게 늘어뜨렸던 촉수 다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멀리 뻗은 촉수를 회수하는 것보다, 그 근간인 마력만 빨아들인 거다.

동시에 정수리 위로 가시가 솟구쳤다.

푸욱!

충격을 받아서 약해진 갑피가 우수수 깨어져 나갔다.

살을 뚫고 들어온 가시.

갖가지 저주와 독이 상처 사이로 파고든다.

위이이잉!

역병 파리들도 한발 늦게 나한테 몰려들었다.

누적되는 독과 저주.

감각이 마비되면서 팔과 다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조차 인지가 안 됐다.

지금 멈추면 죽는다.

난 팔과 다리의 감각이 뒤집어졌음에도, 회귀 전의 경험대로 육신을 움직였다.

정신을 잃는 순간 끝이다.

팔과 다리를 멈추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계에 이른 몸뚱이와 정신을 채찍질하며, 쉴 새 없이 혈조공을 펼쳤다.

-계약자여!

닉스가 옆에서 뭐라고 떠들어 댔지만,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1초.

모공 하나하나를 다 열어 두고 독을 쑤셔 넣으면 이러지 않을까?

소주를 병 채로 네 병 연속으로 넘긴 것처럼 어지러워서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하겠고 뼈 마디마디가 시려 왔으며 피부가 간지러웠다.

그럼에도 나는 기계적으로 혈조공을 펼쳤다.

[내공이 부족합니다.]

[혈조공을 무리하게 펼치면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여태 잘 관리했던 내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빌어먹을.

아직 부족하다.

난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괴력을 사용합니다.]

콰앙! 쾅!

300%로 증폭된 힘으로 푹 파인 바알의 정수리를 연신 쳤다.

잠력을 끌어내기에 연속 사용 시에는 반작용이 있지만.

그걸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난 주먹이 부러져라 연속으로 괴력을 사용했다.

3번째 주먹을 날렸을 때.

오른팔에서 뚝- 소리가 났다.

거듭되는 혹사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상황.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어느 순간.

발목을 붙들었던 점액질의 힘이 약해졌다.

그와 동시에, 언덕처럼 쌓였던 진흙 덩어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끝……났나.”

일그러진 시야가 조금씩 돌아온다.

바알이 빙의했던 진흙 덩어리를 쓰러트리자, 몸을 좀먹었던 저주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독과 저주의 후유증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재생을 사용합니다.]

[부상이 심해서 재생의 효율이 37% 감소합니다.]

우욱, 뜨거운 것이 속에서 올라왔다.

목구멍 너머로 올라온 것을 게워내고 보니, 시커먼 피였다.

이대로는 죽는다.

바알의 독이 침범한 탓에 온갖 장기와 뼈, 근육, 그리고 피부가 모두 상해 버렸다.

당장이라도 지면에 머리를 처박은 채, 잠을 자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조금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정신을 차리거라. 그대는 여와 계약하지 않았더냐!

벼락같은 음성이 귓가를 강타했다.

거참, 여신님 고맙수다.

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준 덕에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잠이 들었으면 그대로 황천행이었겠지.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박종원 일행한테서 양도받은 중급 포션.

개당 5천만 원이나 되는 물건이지만, 아낄 때가 아니었다.

목숨보다는 싸게 먹히는 가격.

뚜껑을 딴 후, 내용물을 목구멍 너머로 들이부었다.

‘포션으로는 부족해.’

나는 [재생]으로 중급 포션의 기운이 더 활발하게 돌도록 촉진시켰다.

두 병, 세 병.

포션으로 샤워를 하듯 전신에 뿌리고는 [재생] 능력도 사용했다.

[대지모신의 가호가 적용됩니다.]

[다른 성좌의 독을 감지했습니다. 대지모신의 가호 효과가 2배로 증폭됩니다.]

밟고 있는 늪도 땅으로 인정이 되는 건지, 대지모신의 가호가 치유 효과를 증폭시켜 주었다.

-오, 오오. 그 많은 상처가 낫고 있도다.

뽕!

마지막 포션을 전신에 뿌리자, 떨리던 몸이 진정세로 돌아섰다.

“하아.”

고통에 겨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포션과 [재생]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한 결과, 무너져 가는 몸을 겨우 살려 낼 수 있었다.

‘최소한도로 말이야.’

나는 진흙 덩어리, 다른 말로 늪지의 마왕의 사체 위에 드러누웠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가락.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전신에 스며든 바알의 독기가 온몸을 망가트렸을뿐더러, 내공도 바닥이 나 버렸다.

살아남은 게 기적이구먼.

-참으로 무모하구나. 마지막에 힘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죽는 건 그대였노라.

“알고 있어.”

난 힘을 쥐어짜서 겨우 대꾸했다.

-그대가 떠나가면 여는 다시 잠에 들 것이 뻔한데, 어이하여 그리 무모하게 싸운 것이더냐.

“운이 따라 줬거든. 여신님이 함께 해 준 덕인가.”

-흥, 그렇다면 여에게 감사하여라.

사실 닉스의 존재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말을 하니, 여신님의 화가 조금 누그러진 것 같다.

바알은 늪지의 마왕하고는 차원이 다른 적이었다.

내가 돌진을 선택한 것도 가장 승률이 높은 방법이었을 뿐.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바알을 상대로 간을 봤다가는 필패니까.’

늪지의 마왕을 상대할 때처럼 거리를 두었다면, 바알의 저주에 당해서 힘 하나 못 쓰고 늪지대 속으로 삼켜졌을걸?

여태껏 마력을 소모시킨 걸 믿고 단기 결전으로 승부를 내야 했다.

화랑 길드 유망주들에게 감사해야겠어.

그 녀석들이 아니었으면 바알의 빙의체를 죽인 보람도 없이, 늪지에 머리를 처박고 죽었을 테니.

[탑에서 보상을 산정 중입니다.]

[성좌 ‘오염된 왕좌의 주인’의 개입으로 인해 난이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난이도에 걸맞은 보상 산정에 시간이 걸립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허허.

시스템이 이렇게 깨방정을 떠는 건 처음 본다.

회귀 전이나, 현생에서나.

‘탑 시스템을 제어하는 건 고신족들이니까.’

관리자.

신명(神名)을 잃고 쇠락해 버린 이들은 전면에 나설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검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관리자라는 이명으로 활동했다.

탑 지분을 명분 삼아 시스템에 이상을 일으킨 바알.

그걸 제지해야 하는 동시에, 나한테 적합한 보상을 챙겨 줘야 한다.

바벨탑이 정해 놓은 법칙!

이번 튜토리얼 스테이지를 담당하는 고신족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지금쯤 꽤나 골머리를 썩고 있을 거다.

“보상은 알아서 잘 주겠지.”

철푸덕.

나는 팔과 다리를 쭉 뻗은 채, 진흙에 몸을 뉘였다.

지금은 흙의 질척거리는 감각마저 반가웠다.

“여신님, 부탁 하나만 하자.”

-말하거라.

“누구 오면 바로 깨워 줘.”

-경계는 맡기거라. 그 누구도 여의 시선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니라.

회귀 전의 지식에도 없던 히든 보스.

추가로 ‘오염된 왕좌의 주인’까지 난입하였으니 탑의 관리자가 어떤 보상을 줄지 기대하면서 휴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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