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부글부글 끓는 늪.
[육감]이 늪지대의 기현상에 반응해서 경고음을 연신 울려 댔다.
응. 그렇게 안 울어 대도 위험한 거 알아.
나는 오른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늪을 바라봤다.
‘튜토리얼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회귀 전 지식을 차분하게 되살펴 보았다.
하지만 튜토리얼에서 ‘늪지의 마왕’이라는 괴물을 목격했다는 건 들어 보지 못했다.
나는 생각을 달리했다.
1주 차에 보스 다섯을 사냥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
시스템 음성으로 보건대, 늪지의 마왕이 출현하는 조건은 두 가지다.
-1주 차에 보스 다섯 이상 사냥.
-늪지에서 한 시간 이상 머무를 것.
첫 번째 조건이야 어찌 충족시킨다고 해도, 먼저 늪지를 들렀거나, 혹은 다른 지역에 머무르느라 1주 차를 넘겨 버리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아직도 탑에 숨겨진 요소가 남아 있었을 줄이야.
“잘됐군.”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늪지의 마왕. 강해 보이는 이름이잖아?
사냥하면 어떤 정수를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무엇이 잘되었다는 말이더냐.
“아, 우리 여신님은 퀘스트 창이 안 보이겠구나.”
나는 시스템 화면을 닉스에게 공유했다.
-늪지의 마왕? 계약자의 수준으로는 마의 정점에 도달한 존재를 이길 수 없도다!
“저거, 말만 마왕이지 별거 아닐 거야.”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바벨탑은 각 층마다 억제력이 존재한다.
밸런스 붕괴급 괴물이 나오지 못한다는 것.
막 나타난 퀘스트, ‘늪지의 마왕’도 이름만 그럴싸한 괴물일 거다.
-본녀가 믿을 건 계약자뿐이니 무리하지 말거라.
“걱정해 주는 거야?”
-여의 계약자가 허무하게 죽으면 안 되니까 하는 말이니라.
하긴, 닉스의 유일한 희망이 나일 테니 신경 쓰일 만도 했다.
걱정하지 마. 정말로 위험하면 바로 도망칠 거야.
보글거리던 늪이 5미터 정도로 솟구쳤다.
점액질 사이로 드러나는 눈, 코, 입.
텅 비어 있는 동공 사이로, 초록빛이 번들거린다.
늪을 이루던 진흙이 머리와 양팔, 그리고 가슴팍을 형성했다.
[늪지의 마왕]
정수리 위에 떠오른 붉은 글자.
아무래도, 저게 온전한 모습인 듯했다.
-므오오오오!!
늪지의 마왕은 쩍 벌어진 입으로 괴성을 내질렀다.
[만마전의 존재를 마주했습니다.]
[당신의 수준으로 감당치 못할 존재입니다.]
[공포 상태에 빠집니다. 두려움에 적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냉혈이 발동됩니다. 공포 일부를 제어합니다.]
“헉.”
숨이 콱 막혔다.
[늪지의 마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상태 이상이 둘이나 걸렸다.
-계약……. 의식을…… 말거라!
닉스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냉혈보다 높은 등급의 스킬이라서, 늪지의 마왕이 일으킨 두려움을 완전히 누르지 못했다.
손과 발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저 혐오스러운 존재한테서 등을 돌리고 도망치고 싶지만, [냉혈] 덕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빌어먹을 정신 공격.’
냉혈 스킬 덕에 쌓아 놓은 정신 내성으로도 저항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가 진흙을 대충 빚어 놓은 것처럼 생긴 괴물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방증이다.
나는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용맹을 사용합니다.]
[공포 상태가 해제됩니다.]
목걸이에 박힌 붉은 보석이 강한 빛을 흩뿌렸다.
내 정신을 옭아매던 공포가 사그라졌다.
‘역시 정신 계열 디버프 무효화 스킬이야.’
후우, 이제 숨 좀 돌리겠네.
아레스한테 고마워해야겠는걸.
-정신을 차린 것이더냐?
“응. 아티팩트 덕에.”
-다행이니라.
안도감으로 물든 닉스의 목소리.
“여신님, 걱정했었어?”
-무슨 말이더냐. 이 정도도 못 이겨 내면 여의 계약자라고 할 수 없느니라.
“예예.”
난 또렷해진 눈동자로 늪지의 마왕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플레이어, 그 용기에 경의를 표하마.」
[늪지의 영역이 선포되었습니다.]
[사용자는 늪지의 마왕입니다.]
[반경 100미터가 전장으로 선언됩니다.]
[전장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중앙으로 강제 이동됩니다.]
[둘 중 한 명이 쓰러지거나 패배를 인정하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호, 그래도 양심은 있구먼.
플레이어가 패배를 선언하면 살려는 보내 준다니.
히든 퀘스트라서일까.
아니면 난이도가 살인적으로 높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죽지는 않겠다.
“널 쓰러트리지 않고 여기서 나갈 생각은 없다.”
「좋은 각오다.」
늪지의 마왕은 바닥을 미끄러지면서 이동했다.
하반신이 없는 게 아니라, 애초에 슬라임처럼 부정형 괴물이라서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회귀 전의 지식이 통하지 않는 괴물.
[독수리의 눈]으로 확인해 보니, 혈산군보다 한층 더 짙은 붉은 아우라가 솟구쳤다.
-저 괴물, 그대가 말한 대로 마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약하구나.
“그렇지?”
-하지만 계약자보다는 훨씬 강하느니라.
썩어도 준치라고.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늪지의 마왕’과 내 전투력 차이를 금방 간파했다.
“말했잖아. 질 싸움은 안 한다고.”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에너지 볼트를 사용합니다.]
늪도마뱀 때처럼 거리를 벌린 채로 과충전을 시작하려는 순간.
-어림없다.
늪지의 마왕이 오른팔을 휘둘렀다.
츄라라락! 점액질로 된 팔이 채찍 형태로 쭉 늘어났다.
단번에 좁혀진 거리.
30미터라는 거리가 무색해졌다.
나는 급히 에너지 볼트를 방출했다.
에너지 볼트는 길게 늘어난 늪지의 마왕의 팔을 꿰뚫었다.
조금 느려진 채찍.
뒷걸음질 쳐서 늪지의 마왕의 공격을 회피했다.
두근- [육감]이 반응했다.
늪지의 마왕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2격.
쭉 늘린 왼팔이 바닥을 쓸면서 옆구리 쪽으로 날아들었다.
-위험하도다!
“알고 있어.”
30미터가 최대 사거리가 아니었군.
지면에서 살짝 떨어진 각도로 날아드는 채찍.
길이를 보니 50미터까지는 유효사거리라고 봐도 무방했다.
회피하는 건 불가.
나는 채찍이 몸에 닿기 전, 재빨리 에너지 볼트를 완성했다.
콰아앙- 짧은 폭발음과 함께 피격 부위가 그을었다.
오른팔과 마찬가지로 조금 느려진 채찍.
[가시 갑피를 사용합니다.]
오른팔과 옆구리에 갑피를 생성.
채찍을 받아 냈다.
“크읏.”
갑피를 사용했음에도, 채찍에 실린 힘을 모두 흡수하지는 못했다.
난 다리에 힘을 주면서 넘어지지 않게 버텨 냈다.
[갑피의 내구도가 37% 소모되었습니다.]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충격 대부분은 갑피가 막아주었고, 90대에 이르는 근력으로 늪지의 마왕의 공격을 버텨냈다.
-계약자여!
“아냐. 계산대로야.”
[날카로운 발톱을 사용합니다.]
푸른 기운이 쭉 튀어나온 손톱 위에 아른거린다.
마나를 부여해서 강화된 손톱.
나는 손가락 마디마디를 굽혔다.
맹수가 사냥감을 덮칠 때의 자세, 혈조공의 준비태세다.
단전 안에 자리를 잡은 내공이 꿈틀거린다.
혈도를 타고 전신으로 움직이는 내공.
촤아악!
나는 쭉 늘어나 있는 마왕의 왼팔을 노렸다.
에너지 볼트로는 표면을 조금 그을리는 데 그쳤지만, [날카로운 손톱]으로 펼친 무공은 점액질로 된 팔을 몇 갈래로 찢어발겼다.
철퍽, 철퍽.
잘려나간 진흙이 아래로 추락했다.
몸을 구성하던 마력이 내공에 부딪치면서 소멸해 버린 것이다.
[독수리의 눈을 사용합니다.]
[상대가 당신보다 월등하게 강합니다.]
늪지의 마왕의 정수리 위로 솟구치는 붉은 아우라.
“예상대로군.”
나는 웃음을 지었다.
팔 일부를 잘라 낸 직후에 보니, 붉은 기운이 처음보다 약간 줄어들었다.
-무엇이 예상대로라는 것이더냐?
“마왕이라는 작자. 진흙이 본체가 아니야.”
-아, 그렇구나!
닉스가 내 말을 곧바로 이해하더니 감탄사를 터트렸다.
-한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었느냐.
“관찰을 잘하면 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유심히 관찰하지 않았으면 못 알아챘을 정도의 차이.
저런 식으로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괴물들은 마력으로 육체를 구성한다.
그러니까 놈의 마력을 소진시켜야 쓰러트릴 수 있다는 것!
몸뚱이를 구성하는 진흙을 부수거나, 아니면 공격을 유도하거나.
어느 쪽이든, 늪지의 마왕을 쓰러트리려면 인내가 필요했다.
‘괜찮아. 참는 건 내 특기니까.’
어떤 강적을 마주쳐도 마지막에 두 발을 딛고 섰던 것은 나였다.
회귀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될 거다.
* * *
촤라락!
쭉 늘어난 진흙이 양옆으로 파고들었다.
제법 빠른 속도지만 [육감]이 한발 빠르게 공격을 알려 주었다.
나는 채찍이 날아드는 것에 시선 하나 안 주고 지면을 박찼다.
[민첩한 뒷발을 사용합니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도약 한 번에 채찍을 흘려보내고 늪지의 마왕 앞에 도달했다.
「거리를 좁히면 달라질 것 같으냐.」
“어.”
「후회할 것이다.」
기계처럼 말하는 늪지의 마왕.
흙으로 된 가슴 부분에서 가시 수십 개가 솟구쳤다.
마력으로 굳힌 진흙.
가시멧돼지가 두른 가시에 뒤지지 않는 날카로움을 지녔다.
[혈조공을 사용합니다.]
양손이 궤적을 그리면서 가시들 사이로 파고든다.
마나 부여로 강화된 손톱.
거기에 내공이 더해지자, 마력이 깃든 가시라고 해도 버텨 내지 못했다.
“아직 끝이 아니야.”
난 혈조공의 초식을 빠르게 이어갔다.
호랑이가 먹이의 피부와 살, 그리고 뼈를 분쇄하듯.
맹수의 움직임을 본떠 만든 혈조공은 늪지의 마왕이 드러낸 틈을 놓치지 않고 쉴 새 없이 진흙을 파헤쳤다.
철퍽! 철퍽!
마왕의 몸을 구성하던 진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허튼짓을 하는구나.」
내 손톱에 찢겨 나갔던 진흙이 다시금 늪지의 마왕에게로 흡수되었다.
시간을 역행하는 모습.
무슨 짓을 해도 쓰러트릴 수 없는 무적의 존재를 보는 기분이다.
‘혈조공 효과 확실하네.’
나는 [독수리의 눈]으로 늪지의 마왕의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거리를 좁혀서 혈조공을 펼치니, 보유 마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역시.
신체 능력을 극대화시키기에는 무공이 최고라니까?
「이것도 받아 보아라.」
[오염된 흙]
검은색을 띤 진흙이 마왕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게, 닿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웩. 더럽게 토를 하냐?”
발을 뒤로 퉁기면서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직후에 쏟아지는 채찍.
이번에는 쳐 내거나 막을 수 없다.
[가시 갑피]를 양팔에 전개.
X 자로 교차하면서 채찍을 막아 냈다.
양어깨에 전해지는 충격이 상당했지만, 이를 악물면서 버텼다.
[대지모신의 가호가 적용됩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이 빠르게 해소되었다.
나는 곧바로 손을 뻗어서 채찍 형태로 된 진흙을 잘라 냈다.
‘혈산군 때보다 수월하게 쓰러트릴 수 있겠어.’
[독수리의 눈]으로 볼 때는 늪지의 마왕이 혈산군보다 위험도가 더 높았다.
이론상으로야 그렇지만, 실전은 달랐다.
혈산군은 뛰어난 전투 기술과 기동력으로 나를 계속 몰아붙였지만.
늪지의 마왕은 보유 마력과 스펙만 높을 뿐, 실제로는 전투 내내 나한테 끌려다녔다.
지닌 마력이 원체 방대하다 보니 연신 공격을 퍼부어도 쓰러지지 않는 것뿐.
혈산군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여유로웠다.
‘평범한 플레이어였다면 반대였겠지.’
진흙으로 형태를 부여, 여러 방식으로 공격하는 늪지의 마왕.
100미터라는 제약까지 걸어서 원거리 위주의 타격으로 승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저 몸뚱이도 불사는 아니다.
내공을 실은 공격을 계속 펼치다 보면 육체를 구성하는 마력이 금세 소모가 될 거다.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그러게.”
2시간이 넘게 이어진 접전.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놈은 보유 마력 상당수를 소모했다.
나는 [대지모신의 가호]와 [용의 심장] 덕분에 체력과 마나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고, 내공도 삼재기공으로 달맞이 돌을 흡수한 덕에 버틸 만했다.
-해낸 건가?
여신님, 부탁이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때, 늪지의 마왕이 움직임을 멈췄다.
『늪지의 마왕을 빚어낸 성좌가 전투에 관심을 가집니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당신을 살핍니다.』
잠깐,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라면…….
‘그 작자잖아.’
식은땀 한 방울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이름이 왜 여기서 언급되는 걸까.
늪지의 마왕이 ‘오염된 왕좌의 주인’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발생하지 말아야 할 변수.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누구더냐?
나는 여신님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긴장한 기색으로 늪지의 마왕을 바라봤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가집니다.』
『이번 퀘스트에 관여합니다.』
『탑 시스템이 오류를 인식, 오염된 왕좌의 주인이 간섭하는 것을 금합니다.』
『늪지의 마왕을 빚어낸 근원이 오염된 왕좌의 주인에게 반응합니다. 시스템 일부가 무효화됩니다.』
콰아아아아!
검붉은 마력이 늪지의 마왕의 몸뚱이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오염’이라는 기원이 깃든 불길한 마력.
검은 마력이 물에 닿자, 거미줄처럼 여러 갈래로 퍼지면서 인근의 공간을 장악했다.
「거기 너, 재밌어 보이잖아.」
늪지의 마왕.
아니, 그 안에 깃든 성좌가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오염된 왕좌의 주인.
만마전을 다스리는 절대자, 바알이 튜토리얼에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