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빌어먹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는 어둠으로 휩싸인 길을 건너다가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육감이 아니었으면 저승 문턱을 3번은 밟았을걸?
‘안토니오. 운 좋은 새끼.’
회귀 전에 그림자 보주를 손에 넣었던 안토니오를 떠올렸다.
그 녀석은 고유 능력 덕에 함정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고 했었지?
함정이 하나라도 발동했으면 죽었을 텐데.
나처럼 고생 좀 했어야지!
“휴, 됐다.”
짧은 한숨과 함께 분노를 날려 보냈다.
고생한 보람이 있으니까.
나는 통로 끝에 있는 구슬을 들어 올렸다.
[그림자 보주]
등급: 레전드
분류: 보주
근원에 가까운 어둠을 담아 낸 보주입니다.
사용 시 그림자에 마나를 부여해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습니다.
*마력 + 50
*성장형 아티팩트
*[그림자 조종] 스킬 내장
[그림자 조종]
등급: ★★★★★
분류: 액티브
자신 / 상대의 그림자에 마력을 부여, 원하는 형태를 만든다.
공격이나 방어, 어느 쪽으로든 사용할 수 있다.
타인의 그림자를 사용할 경우에는 위력이 1/5로 감소한다.
와.
나는 입을 벌린 채, [그림자 보주]의 정보를 연신 확인했다.
“미쳤네.”
저 통로를 돌파한다고 쇼를 한 보람이 있다.
아니, 이 정도면 보람이라는 단어로 일축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림자 보주]는 그런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보상이었다.
레전드 등급!
탑 저층에서는 얻는 게 거의 불가능한 고등급 아티팩트다.
스텟 증가 폭도 엄청나지만, 더 놀라운 건 그림자 보주가 성장형이라는 거지.
정해진 조건을 충족시키면 더 강해지는 아티팩트.
안토니오 녀석이 그림자 능력을 발전시킨 것도, 본인의 능력이 아니라 보주를 강화시킨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보주를 자기 이마에 박았구나.’
안토니오의 기묘한 패션(?)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양손을 자유롭게 두면서 ‘그림자’ 능력을 전개하려고 머리를 굴린 거였다.
‘뭐, 그것도 회귀 전의 이야기야.’
걱정 마라. 이제는 그 아티팩트가 내 손에 들어왔으니.
브라질의 폭군으로 군림했던 안토니오가 나타나지도, 이마에 구슬을 박는 일도 없어질 거다.
한데 달짝지근한 향기가 [그림자 보주]에서 흘러나왔다.
“이 향은…….”
난 말끝을 흐렸다.
우투리의 정수가 깃들어 있던 바위를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
설마 하는 마음에 [포식] 능력으로 그림자 보주를 훑었다.
[???의 정수를 발견했습니다.]
[정수 등급: 신화]
허허.
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림자 보주의 등급은 [레전드].
하나, 그 안에 깃든 정수는 신화의 자락에 닿았다.
그렇다는 건.
‘이 아이템이 성유물이란 거야.’
성유물.
특정 신의 흔적이나 힘이 담겨 있는 아티팩트를 말한다.
신화 등급.
회귀 전의 나조차도 거의 먹지 못했던 최고 등급 정수!
그나마 포식했던 것도 [회귀]라는 도박수를 발동시키기 위해 집어먹은 게 대부분이다.
‘튜토리얼도 안 끝났는데 두 번째 신화급 정수라.’
운이 좋군.
난 미소를 머금었다.
슈아악! 구슬 안을 메웠던 어둠이 조금씩 연해진다.
가이아의 정수에 비해서는 적은 양.
뭐, 운이 좋으면 가호 하나 더 얻는 거지.
성좌와 계약도 안 했는데 가호를 둘이나 가진 플레이어가 있다?
이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 난리가 날 거다.
능력 많은 사람은 늘 피곤하다니까.
‘자, 보주에 있는 정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 먹어 치워 주마.’
꿈틀.
그림자 보주에 담긴 어둠이 거세게 반항했다.
내가 말이에요. 대지모신의 정수도 흡수한 경험이 있거든?
그땐 레벨도 1이었지만, 지금은 훨씬 성장했단 말이야.
어떤 신의 성유물인지는 몰라도 [포식] 능력에서 벗어나진 못할 거다!
챙그랑, 기다란 금이 보주의 표면에 새겨졌다.
[포식] 능력이 발동되면서 내구도가 소모되기 시작한 거다.
좋아.
입질이 온다, 와.
접촉면을 타고 스며드는 정수를 만끽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때.
-누구인가?
아름다운 음색이 귓가에 감돌았다.
나는 [포식]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초음파로 주위를 훑어봤지만 복도 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건가.”
-본녀의 성유물을 잡고 뭘 하는 것이냐고 물은 것이니라.
우웅!
그림자 보주가 품고 있는 어둠이 거세게 일렁였다.
아, 나한테 말을 건 게…… 성유물이었어?
* * *
그림자 보주의 ‘정수’가 꿈틀거린다.
신력.
아마도, 성유물의 주인인 [???]라는 존재의 기운이겠지.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안토니오 녀석은 이런 말을 안 했어.’
계획에 없는 변수.
그렇지만.
‘오히려 좋아.’
진한 미소가 입가를 물들였다.
성좌의 기운을 포식할 기회는 흔치 않거든.
“이름 없는 성좌 양반. 만나서 반가웠고, 잘 가십쇼.”
난 다시 한번 [포식]을 발동시켰다.
저적! 저저적!
그림자 보주에 새겨진 균열이 더욱 커졌다.
-무, 무슨 짓이더냐. 필멸자여!
“보주에 있는 기운을 좋은 곳에 쓰겠다는 거지.”
-참으로 무례하구나.
“웬 무례?”
-여(余)가 누구인지 알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더냐!
“이름 가려져 있는 거 보면 고신족 나부랭이나 되겠지.”
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바벨탑을 세운 존재.
고신족들은 탑이 세계와 동기화를 마치기 전까진 진명을 델 수 없다.
별들 위에 신명(神名)을 기록한 성좌와 달리, 쇠락하면서 권능과 이름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이 신도 마찬가지야.’
[???]로 표기된 이름.
회귀 전에도 본 적 없는 표기이긴 하다.
고신족들은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관리자]라는 명칭만 사용했다.
저렇게 [???]로 가리지는 않았단 말이야.
하나 나는 그림자 보주의 주인이 고신족이라고 확신했다.
‘아니면 이름을 가릴 리가 없으니까.’
전면으로 나설 수 없는 고신족.
성유물 하나 정도는 꿀꺽해도 대응할 수가 없을 거다.
-고신족? 그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더냐.
“당신처럼 이름 없는 신.”
-무례하구나. 여는 닉스라는 이름을 어엿하게 가지고 있노라.
어?
난 포식 사용을 중단했다.
“당신, 누구야.”
-말하지 않았더냐. 닉스라고.
내 이마 위로 三 자 주름이 생겼다.
자신의 진명을 스스럼없이 밝힌 고신족.
회귀 전의 상식을 무너트리는 일이다.
“고신족인데 어떻게 신명을 내뱉고도 무사한 거지?”
-필멸자여, 여는 그대가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구나.
평행선을 걷고 있는 대화.
그러고 보니 방금 전의 이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말이야.
‘닉스는…… 올림포스 쪽 아니던가?’
닉스(Nyx), 혹은 녹스(Nox).
올림포스 신족의 먼 조상으로, 어둠을 주관하는 태고신이다.
가이아처럼 ‘개념신’에 가까운 존재이며, 강대한 힘 자체로 해석될 뿐 신화에서 의사를 지닌 인격신의 면모를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어둠의 신.”
-호호, 이제야 본녀를 알아보는구나.
와, 설마 했는데 그 닉스일 줄이야.
닉스는 히페리온이나 훔바바 같은 고신족들과 같은 격으로 둘 수 없는 신이다.
어둠 그 자체로서, 올림포스에서는 가이아와 버금가는 존재.
‘그거였구나!’
마침내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다.
저 여신의 이름이 [???]로 가려져 있는 이유를 말이야.
그때, 생각 하나가 뇌리에 번뜩였다.
‘이 상황, 이용할 수 있겠어.’
히죽.
나는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려는 것을 억지로 붙들었다.
* * *
개념신.
말 그대로 빛이나 어둠, 혼돈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주관하는 신이다.
너무나도 강대한 힘을 지녔기에 세상만사에 관여하지 않고 잠들어버린 존재.
‘왕급 성좌들도 눈치를 봐야 할 정도지.’
신화의 기록을 보면 올림포스의 신왕, 제우스조차도 닉스의 개입을 두려워해서 물러난 적이 있다고 한다.
고신족들은 그 점을 파고들었다.
-잠든 개념신들의 개념과 힘을 탑에 묶어 두자.
현세대의 신들은 눈치를 봐야 할 이들이 줄어드니 좋았고.
고신족들은 탑을 구축할 ‘개념’을 얻을 수 있었다.
닉스의 이름이 [???]로 떠 있는 건 전 세대의 신들과 현세대의 신들의 합작이라는 말!
“저, 여신님.”
-여를 부르는 음성에서 존경심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허 참. 누가 여신 아니랄까, 까다로운 거 보소.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닐걸?”
-필멸자여,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여신님, 한번 권능을 일으켜 봐.”
잠시간의 침묵.
나는 팔짱을 낀 채, 닉스의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상하구나. 여의 힘이 어이하여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것이더냐?
“왜긴. 여신님이 잠든 동안 누가 수작질을 벌인 거지.”
닉스의 힘은 바벨탑을 구성하는 ‘개념’으로 소모되고 있을 거다.
정신이야, 내가 [그림자 보주]를 자극한 덕에 깨어난 것 같지만 말이야.
굳이 표현하면…….
가위에 눌려 있다고 해야겠네.
의식은 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
현재 닉스가 처한 상황이다.
난 회귀 전의 지식을 짧게 정리해서 설명해 주었다.
-……고얀 것들이로구나.
“여신님이 귀여워했던 티탄들도 연관된 일이야.”
-믿을 수가 없도다.
부정 그리고 분노.
두 가지 감정이 닉스의 사념에서 느껴졌다.
예상대로다. 닉스는 바벨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잠든 사람 인감이랑 신분증 훔쳐서 대출받은 거랑 같으니까.’
고신족과 현세대 신들이 힘을 합쳐서 사기극을 벌인 셈.
좋아. 밑밥은 다 깔렸어.
“여신님, 제안 하나 할까?”
-무엇이더냐, 필멸자여.
“나랑 계약하자.”
-계약이라고?
“응. 여신님도 당하기만 해서는 마음이 불편할 것 같은데.”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구나.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내가 여신님의 힘을 되찾아 줄게.”
-필멸자에게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응. 나는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니까. 더 강해질 수 있어.”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게 확실하겠지.
나는 좁쌀만 한 크기의 신력을 다시 한번 일으켰다.
-그 기운은……! 어이하여 필멸자가 신에게만 허락된 힘을 다룰 수 있느냐.
“반신 같은 거 아니니까 의심하지 마.”
-알고 있도다. 그대의 영혼에서는 신의 향이 나지 않으니.
“지금이야 필멸자 레벨이지만 금방 강해질 거야.”
닉스는 잠시 침묵했다.
필멸자인 내가 신력을 자유자재로 다룬 걸 보더니 꽤 충격받은 모양이다.
이 여신님, 리액션이 꽤 후하구먼.
-그대의 말이 허언으로 느껴지지는 않는구나.
좋아. 반쯤 넘어왔다.
“그러면 계약 내용을 정하자.”
-플레이어 유진호와 밤의 여신 닉스는 서로를 동등한 격으로 인정한다.
-닉스는 힘이 닿는 한 유진호가 강해질 수 있게 돕는다.
-유진호는 닉스를 구속에서 풀어줘야 한다.
닉스는 내가 읊은 계약 조건을 몇 번이고 읽으면서 곱씹었다.
-한낱 필멸자를 여와 동등한 격으로 인정해야 하다니.
“싫으면 말고.”
-그런 건 아니니라.
이 여신님, 태세 전환 속도 보소.
‘좋아. 거의 넘어왔어.’
난 웃음을 꾹 참았다.
실은 계약 같은 거 안 해도 닉스가 손해 볼 건 없다.
고신족들과 현세대의 신들이 수작질을 벌였지만, 내가 닉스의 의식을 일깨운 시점에서 반쯤 파훼된 거나 마찬가지다.
한 500년만 있으면 어둠의 격을 되찾을걸?
나한테는 긴 시간이지만, 저 여신님한테는 그리 긴 세월도 아닐 거다.
일종의 사기 계약이라는 거지.
-좋다. 유진호, 그대와 계약을 맺도록 하겠도다.
닉스는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한낱 필멸자가 아닌, 동등한 계약자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와 영혼의 계약을 선언했습니다.]
[상호 간의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영혼에 새겨진 계약은 반드시 수행해야 합니다.]
[계약 매개체인 성유물, 그림자 보주가 파괴됩니다.]
보이지 않는 끈이 둘의 영혼을 묶었다.
파스스-.
산산조각 나는 그림자 보주.
구슬 안에 깃든 정수는 계약이 맺어지는 것과 동시에 소멸해 버렸다.
아쉽지는 않았다.
내 옆에는 정수보다 더 대단한 걸 줄 수 있는 여신이 있으니까!
“여신님, 계약 맺은 김에 나 좀 도와줘.”
-무엇이더냐, 계약자여.
“가호 좀 내려 주시죠.”
-어렵지 않은 일이니라. 조금만 기다려 보아라.
닉스의 가호라.
안토니오 녀석이 다루었던 그림자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1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도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야, 우리 여신님, 얼마나 대단한 걸 주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계약자여.
“응?”
-아주 작은 문제가 있느니라.
닉스가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