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성역 - 올림포스]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머무는 천공의 영역이다.
푸른 벌판 위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가득했다.
도리스 양식(고대 그리스 건축방식)으로 지어진 건축물.
모두 올림포스에 속해 있는 성좌들을 기리는 신전들이다.
올빼미.
토기.
삼지창.
백조 등.
신전 앞에는 올림포스 소속 성좌들의 신명(神名)과 관련된 동상들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중, 글라디우스 동상이 세워진 신전에서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이 녀석은 내 거야!”
소란의 진원지는 황금 투구를 쓴 사내였다.
투구 사이로 흘러내리듯 보이는 금발.
황금색 머리카락 사이로 구릿빛 피부가 보인다.
신왕 제우스의 적자이자 올림포스의 전쟁신, 아레스다.
홍옥을 녹인 것처럼 새빨간 아레스의 눈동자가 손에 들린 수정구를 노려보았다.
구슬 안에 비친 플레이어.
유진호였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이 유진호 플레이어에게 수호성을 제안합니다.』
『튜토리얼을 진행 중인 플레이어에게는 수호성 제안이 불가능합니다.』
『탑 시스템이 규칙 위반을 확인했습니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의 메시지가 차단됩니다.』
수정구를 잡고 좌우로 흔드는 아레스.
“아오, 왜 안 되는 건데!”
아레스는 조급한 마음에 연신 후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탑 시스템은 칼같이 아레스의 메시지를 연속적으로 차단했다.
‘저 녀석을 거둘 수 있다면……!’
수호성의 계약.
성좌는 플레이어와 계약을 맺을 수 있다.
수호성 계약을 맺은 플레이어가 활약할수록, 해당 성좌의 힘과 권위가 강해진다.
그렇기에.
여러 성좌들은 뛰어난 플레이어를 물색했다.
아레스도 마찬가지다.
『하늘의 악이 유진호 플레이어에게 관심을 드러냅니다.』
『하늘의 악이 무공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플레이어는 자신과 계약하는 게 옳다고 주장합니다.』
하늘의 악(天魔).
신왕 제우스에 버금가는 ‘그 존재’가 진호에게 관심을 지속적으로 내비쳤다.
아레스는 분노를 꾹 눌렀다.
신왕 제우스의 적자인 그마저도, ‘하늘의 악’한테는 한 수 접어야 했다.
아레스가 ‘하늘의 악’에게 진호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고민하던 중.
“형님, 뭐가 그렇게 시끄러워요?”
앳된 목소리가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아레스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고는 본능적으로 수정구를 등 뒤에 감췄다.
“막내야, 내 너에게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형님 신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서 찾아왔죠.”
아레스의 등 뒤에 나타난 건 10대 소년의 티가 조금 남아 있는 청년이었다.
깃털 장식 달린 투구.
양발에 착용한 샌들에도 하얀 깃털이 달려 있다.
올림포스의 전령신, 헤르메스.
그는 묘한 눈빛으로 아레스를 바라보았다.
“정말이다. 아무 일도 없다.”
아레스는 짐짓 태연한 척 두 번이나 강조했다.
다른 신들이라면 몰라도 헤르메스가 진호에 대해 알게 되면 골치 아파진다.
그가 왜 전령신이라고 불리겠는가?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속담이 헤르메스에게 딱 알맞았다.
“흐응. 난 또 재밌는 일이 생긴 줄 알았죠.”
헤르메스는 의외로 방금 전 소란을 집요하게 캐묻지 않았다.
한시름 놓는 아레스.
그는 몰랐다. 헤르메스가 구슬 속에 비친 진호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이야, 형님이 또 재밌는 걸 알아오셨네.’
헤르메스는 웃음을 삼킨 채, 아레스의 신전에서 벗어났다.
* * *
혈산군한테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취했다.
숲에서 볼일도 끝…….
‘이 아니라, 아직 하나가 남아 있구나.’
난 회귀 전의 지식을 떠올렸다.
하이 랭커 안토니오.
브라질 출신의 플레이어로, 그림자를 다루는 녀석이다.
군주급 다음으로 일컬어지는 하이 랭커.
인성에는 문제가 아주 많았지만, 그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였다.
정확히 말하면 놈의 실력보다는 변화무쌍한 그림자의 움직임이 사기였지.
‘그림자에 마력을 부여, 마음대로 움직이는 능력.’
본인의 그림자나 타인의 그림자에 마력을 불어넣어서 유형화시킨다.
공방일체형의 기술.
그뿐이랴?
타인의 그림자를 조종, 빙의로 상대를 지배해서 인형처럼 다루기도 했다.
-내 그림자 능력? 사실은 고유 능력이 아니라고.
-어둠의 보주. 내 이마에 박힌 거 보이지? 이걸로 그림자를 조종하는 거다.
-레인보우 아일랜드 숲. 거기서 가장 큰 나무에 가 보면 밑에 시커먼 어둠이 있거든.
-그 안으로 들어가니 보주를 얻을 수 있었지.
-내 힘의 비밀을 왜 알려 주냐고? 이미 실험을 해 봤는데 나 말고는 아무도 못 들어가더라고. 어둠 관련 고유 능력이 없으면 못 들어가나 봐.
-나랑 비슷한 능력을 가진 부하 몇이 들어갔지만, 거긴 함정이 가득해서 대부분 나자빠졌고.
-그래도 끝까지 간 녀석이 있었는데, 이미 보주는 없더라고.
-킥킥, 믿기 싫으면 다들 도전해보던가.
-그림자라는 게 말이야. 이름 없는 신의 능력이라던데.
빌어먹을 놈.
나는 그림자 능력의 주인, 안토니오를 떠올리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안토니오는 하이 랭커이면서, 동시에 브라질 갱단의 수장이었다.
탑의 동기화율이 올라갈수록 플레이어가 현실에서 쓸 수 있는 힘도 올라간다.
녀석은 그림자의 힘으로 남미의 암흑가 대부분을 휘어잡았다.
세계가 탑에 집어삼켜진 후에는 어떻게 되었냐고?
‘배후성인 로키를 따라 신들의 세계로 갔지.’
그림자 보주의 습득 과정을 밝힌 것도, 이미 검증을 해 두었기 때문일 거다.
걱정 마라, 이번에는 그럴 일이 없을 테니.
‘안토니오가 각성하는 건 앞으로 1년 후. 운이 좋았어.’
미래의 쓰레기 하나도 치우고, 쓸 만한 특수 능력도 얻고.
이런 걸 보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고 하던가?
첫 계획에서는 튜토리얼 2주 차에 도전하려고 생각했던 과업.
하지만 내 능력치는 이미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특히, 확신을 가지게 해 준 것은 혈산군의 정수였다.
‘육감만 있으면 함정은 어떻게든 피할 수 있어.’
안토니오는 고유 능력 덕분에 함정에 걸리지 않고 유유히 어둠의 보주를 손에 넣었다고 했다.
반면, 난 어둠 관련 특성이나 스킬이 전무했다.
어둠 속에서 함정이 튀어나오면 반응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지.
그런데 이젠 육감 덕에 감지를 못한 공격도 읽어 낼 수 있다.
‘숲에 온 김에 어둠의 보주도 손에 넣는다.’
그림자 능력.
[포식]에 비해서는 한 수 모자라지만, 공방일체라서 사용하기에 따라 활용도가 천차만별이다.
안토니오 같은 쓰레기한테 쥐여 주기에는 너무 과분한 능력이지 않아?
그러니 내가 손에 넣어야지.
“숲에서 가장 큰 나무라.”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다른 나무보다 네다섯 배 정도 큰 나무.
하늘을 찌를 것처럼 우뚝 솟은 커다란 나무가 눈에 보였으니까.
‘멀지 않군.’
난 느긋하게 나무로 다가갔다.
과연.
안토니오의 말대로 뿌리 쪽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신경을 쓰지 않고 보면 단순한 나무의 음영으로 보이겠지만, 다시 보니 그림자가 기묘한 형태로 꿈틀거렸다.
손가락에 힘을 줘서 어둠이 일렁이는 곳으로 댄 순간.
쩌엉- 반탄력과 함께 손이 반대방향으로 꺾였다.
“어우.”
내가 쓴 힘만큼 반대로 되돌려 버리는 구조.
무작정 힘으로 돌파하려고 하면 역으로 당했을 거다.
뭐, 그 정도는 예상했어.
이번에는 어둠 표면을 쓰다듬듯 부드럽게 댔다.
검은 막 너머로 은은하게 전해지는 반탄력.
이 정도면 해볼 만하군.
나는 제우스 신전에서 흡수한 신력을 끌어올렸다.
[신력: 1]
마력이나 내공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기운.
좁쌀만 한 크기지만, 나는 그 신력을 손바닥 표면에 코팅하듯 감쌌다.
회귀 전에도 다뤄 본 요령이 있거든.
[시간]과 관련된 신화들을 직렬로 연결해서 발동시킨 것도, 신력을 다룰 줄 알기에 가능한 거였다.
오히려 신력이 크지 않아서 컨트롤하기가 쉬웠다.
손 위로 둘러진 신력이 나무 아래에 진 어둠에 반응한다.
지이이잉!
파문을 일으키면서 거세게 요동치는 어둠.
예상대로다.
‘놈이 다룬 그림자의 힘이 사실은 신력의 일종이라니.’
안토니오가 떠벌거렸던 말.
저 어둠을 갈라 낼 힌트는 그 안에 있다.
이름 없는 신의 힘.
즉, 숨겨진 공간으로 진입하는 걸 막아서는 건 ‘신력’이다.
신력은 마나, 내공, 에테르, 혹은 정신력 등 모든 ‘무형’의 에너지를 상회하는 힘이다.
해당 신력과 속성이 안 맞으면 튜토리얼에 진입한 플레이어가 뚫어 낼 방도가 없다는 말!
난 그 발언을 역이용했다.
‘조금의 신력만 있어도 뚫을 수 있다는 거다.’
이름 없는 신.
다르게 말하면, 숨겨진 공간으로 진입하는 길을 막고 있는 건 의지가 섞여 있지 않다는 뜻이다.
형상화된 어둠에 깃든 신력이 내 힘보다 훨씬 강하지만, 없애는 게 아닌 길을 내는 것쯤은 좁쌀 크기의 신력으로도 충분했다.
‘길을 만든다.’
좌아아악!
어둠이 반으로 갈리면서 내부 구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선형으로 된 계단.
안토니오 녀석이 말한 대로다.
‘아슬아슬하군.’
응축시킨 신력이 어둠의 반발력에 조금씩 소모된다.
남은 신력을 쥐어짜 내서 어둠을 바짝 밀어낸 후, [민첩한 뒷발]을 사용해서 틈새 사이로 뛰어들었다.
* * *
[현재 당신의 위치는 ???의 통로입니다.]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처음으로 ???의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체력과 맷집이 3 상승합니다.]
쿵! 내가 발을 들이민 것과 동시에 갈라졌던 어둠이 복원되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저기에 발이 끼었을 터.
그럼 바로 발목이 두 동강 났겠지.
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장소의 이름이 물음표로 표기되어 있다, 라.’
역시나.
이름 없는 신이라고 하더니, 성좌의 호칭 대신 물음표가 나타났다.
그림자의 주인이라는 신.
혹시 고신족들처럼 관리자인 걸까?
‘안토니오 녀석이 거기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이름 없는 신의 정체가 뭔지 알면서도 침묵한 건지.
아니면 몰라서 말을 못 한 건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다.
뭐, 어느 쪽이든 안토니오가 다룬 ‘그림자’ 능력의 핵심인 그림자 보주만 얻으면 된다.
“아무것도 안 보이네.”
혹시 하는 마음에 에너지 볼트를 사용했다.
원래대로라면 푸른 구체가 어둠을 몰아냈겠지만, 그 빛마저도 통로에 깃든 어둠에 삼켜졌다.
역시나 평범하지는 않은 곳이구먼.
[초음파를 사용합니다.]
[반경 100미터 안의 지형 구조를 읽어 냅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통로.
미로 형식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난 [가시 갑피]를 전신에 두른 채, 천천히 전진했다.
10미터 정도 걸었을 때.
두근- 육감의 경고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난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수아앙!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커다란 칼날.
본능에 몸을 맡기지 않았으면 큰 상처를 입을 뻔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건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
나는 통로 끝을 향해 다시금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