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대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스 몬스터 - 혈산군을 사냥했습니다.]
[뛰어난 업적을 세웠습니다. 유진호 플레이어의 이름이 탑에 기록됩니다.]
뒤로 꺾인 호랑이의 머리.
난 지친 몸을 이끌고 놈의 사체 쪽으로 다가갔다.
“더럽게 힘들었네.”
혈산군의 사체는 만신창이였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는 훈장이다.
[대지모신의 가호]가 아니었으면, 먼저 지치는 건 나였을지도 모른다.
[혈산군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희귀]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근력 + 6]
[체력 + 3]
[맷집 + 3]
[스킬 - 육감이 추가됩니다.]
[육감]
등급: ★★★
분류: 패시브
마나 파동이나 살기, 혹은 투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범위: 30미터
“히익?!!”
요상한 감탄사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왔다.
미친, 포식으로 육감을 얻을 수가 있다고?!
‘육감을 얻으려면 온갖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보스 몬스터 200회 이상 사냥.
-마나가 풍부한 지대에서 1주일 이상 머무르기.
-오감 중 하나를 제한하고 전투 벌이기.
…….
그 외에도 몇 가지 조건을 더 충족시켜야 육감 스킬을 얻을 수 있다.
회귀 전의 난 육감을 습득하기까지 7년이나 걸렸다.
지금의 나라면?
육감 스킬을 정석적인 방법으로 얻으려면 2년 정도 걸리지 않았을까.
“그걸 이렇게 얻네.”
수년이라는 시간을 단 3일로 압축시켰다.
정말이지, [포식]의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데,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빅 배트의 ‘초음파’가 포식 능력과 공명합니다.]
[육감의 감도가 더 강화됩니다. 마력 파장을 소리로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육감 감지 범위가 50미터로 늘어납니다.]
“헐.”
이제는 비명도 안 나왔다.
바벨탑에서 정해진 방법대로 얻어낸 [육감]은 다른 정수에 반응하지 않았다.
혈산군의 정수를 포식해서 얻은 스킬은 달랐다.
포식한 정수들끼리 연계되는 【시너지】 효과가 적용된 것이다!
잠깐, [육감]이 빅 배트의 정수에 반응했다면…….
‘다른 감각 관련 정수를 얻으면 육감 스킬도 강화된다는 거잖아.’
한 줄기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탑의 보상이나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면서 얻는 스킬은 [포식]으로 획득한 스킬과 연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동일 스킬이라도 [포식]으로 얻게 되면 연계가 가능했다.
회귀 전에는 알지 못했던 지식.
‘이제는 정말 한 놈도 놓치지 않을 거야.’
버릴 정수는 아무것도 없다!
난 다시 한번 확신했다.
* * *
적막한 동굴.
나는 [초음파]로 내부 구조를 읽어 냈다.
길이는 약 50미터.
동굴 주인인 혈산군 말고는 아무도 없었는지,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여기 있군.”
난 동굴 끝에서 책 두 권을 발견했다.
[혈조공(血爪功)]
[삼재기공(三才氣功)]
한자로 써진 제목.
탑 시스템 덕에 곧바로 읽을 수 있었다.
동시 통역도 해 주는데, 글자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나는 두 서적의 정보를 확인했다.
[혈조공]
등급: ★
분류: 액티브
성취: 1성[0%]
호랑이의 움직임을 본떠서 만든 조법이다. 총 4초식으로 되어 있다.
*전개 시 내공 스텟 필요.
[삼재기공]
등급: ★
분류: 액티브
성취: 1성[0%]
천지인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심법이다. 사용 시 몸에 내공을 쌓을 수 있다.
*습득 시 내공 스텟 추가.
“이거다.”
입가 위로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두 무공이 너무 뛰어나서냐고?
설마 그러겠나.
혈조공과 삼재심법은 무공을 분류하는 기준으로 보면, 삼류에 속한다.
가장 밑바닥. 무공을 처음 익히는 초보자에게나 권할 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내가 웃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내공 스텟을 만들 수 있어.’
달맞이 동굴에서 내공 관련 영약인 ‘달맞이 돌’을 32개나 만들었다.
15일에 한 번이라는 흡수 제약이 있는 영약.
삼류 무공이라도, 내공을 쌓을 수만 있다면 환영이다.
도리어 고유 성질이 없는 심법, ‘삼재기공’이라서 다행이지.
향후 탑을 오르면서 상위 심법을 익히면 내공을 저항 없이 녹여 낼 수 있거든.
‘만약에 도가 쪽 심법이 나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도가 계열 심법은 정순한 자연지기만을 받아들인다.
일체의 편법이 통하지 않는 고리타분한 심법.
여러 종의 정수를 흡수하여 장점만 취하는 [포식]하곤 성격이 안 맞는다.
내공이 반발한다고 해야 할까.
‘혈조공도 나쁘지 않아.’
조법(爪法)은 손으로 펼치는 무공의 일종이다.
주먹을 다루는 권법(拳法)이나 손바닥으로 전개하는 장법(掌法)과 달리, 맹수의 손짓을 흉내 내면서 탄생한 무공.
[포식]으로 여러 괴물들의 장점만을 흡수한 나와 궁합이 잘 맞았다.
‘2025년쯤이면 박투 관련 무공 취급이 별로였지?’
무공 자체의 평도 안 좋았지만.
권‧장‧각‧조법 등.
병장기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육체로만 펼치는 무공은 더더욱 박한 평가를 받았다.
무공의 인식이 바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터.
잠깐, 바벨탑에서 풀린 비급들을 싸게 살 수도 있겠는걸?
‘튜토리얼이 끝나면 알아봐야지.’
나는 상념을 지워 내고 비급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혈조공의 요체가 담긴 책.
내용을 다 읽는 순간, 종이가 푸스스- 무너지면서 가루로 화했다.
[혈조공을 습득했습니다.]
[삼재기공을 습득했습니다.]
[기공의 효과로 내공 스텟이 생성됩니다.]
그와 동시에, 무공 지식이 하나둘 떠올랐다.
혈조공의 각 초식.
삼재기공을 운용하는 혈도들의 위치까지.
전에는 ‘몰랐던’ 무공 개념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후.”
짧은 한숨이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스킬북으로 얻은 스킬은 반복적으로 사용, 숙련도를 쌓아야 한다.
방금 익힌 혈조공과 삼재기공도 마찬가지.
혈조공이 지닌 위력을 제대로 살리려면 반복적으로 운용해서 숙련도(성취)를 올려야 한다.
‘그럴 만한 내공이 있어야 혈조공을 펼치지.’
난 쓴웃음을 지었다.
[내공: 1]
삼류 무공 하나 제대로 펼치기 어려운 양이다.
[용의 심장] 덕분으로 넘쳐나는 마력과는 정반대다.
흐흐흐,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한 게 있으니!
달맞이 돌 하나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으스 아헤으 아아야이.(어서 자세를 잡아야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물고 있던 푸른 돌멩이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달맞이 돌을 섭취했습니다.]
[돌에 스며든 힘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나를 운용하면 ‘마력’ 스텟이 늘고, 심법으로 기운을 유도하면 ‘내공’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삼재기공]을 운용했다.
달맞이 돌의 기운이 삼재기공의 구결에 따라 여러 혈도를 돌아다닌다.
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느낌.
청량한 기(氣)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몸을 일깨운다.
[삼재기공의 성취가 12% 상승합니다.]
[삼재기공의 성취가…….]
연신 시스템 알람이 울어 댔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달맞이 돌에 뭉친 힘을 삼재기공의 구결에 따라 운용하는 데 집중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대주천을 마친 달맞이 돌의 기운이 단전에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후아-!
만족스러운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래서 경력 있는 신입이 좋다니까.”
[내공: 0.1 → 22.8]
내공이 달맞이 돌 하나로 22 스텟이나 올랐다.
4레벨에 해당하는 능력치를 얻은 셈!
‘내공은 보너스 스텟으로 강화할 수 없잖아.’
오직 내공심법으로만 올리는 게 가능한 능력치!
그렇기에, 미래에서 무공 사용자들이 달맞이 돌에 환장했던 거다.
이 정도 내공이면 혈조공 쯤이야, 4초식 전부를 펼쳐도 남는 양이다.
그럼, 춤 한번 춰 볼까?
손가락 마디마디를 살짝 굽혔다.
맹수가 발톱을 치켜세운 것과 흡사한 형태.
혈조공의 준비 자세다.
[혈조공을 사용합니다.]
굽힌 손이 허공을 갈랐다.
혈조공의 첫 초식, 맹호혈조(猛虎血爪)다.
파파팟!
내공을 사용해서인지, 공기가 진동하면서 매서운 소리가 퍼져 나갔다.
“아, 이게 아니지.”
나는 출수했던 손을 거뒀다.
무공만 펼치면 쓰나?
내 진정한 힘은 [포식]으로 흡수한 여러 종들의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다.
[날카로운 손톱을 사용합니다.]
20센티 정도 튀어나온 손톱으로 재차 맹호혈조를 펼쳤다.
공기를 울리는 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혈조공은 짐승의 움직임, 정확히는 호랑이가 앞발을 휘두르는 데서 따온 동작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무공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인 짐승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 더 위력적이라는 것!
나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로 혈조공의 전 초식을 반복적으로 펼쳤다.
[혈조공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혈조공의 성취가 2성으로 올라갑니다.]
쯧- 나는 혀를 찼다.
‘고작 2성이라니.’
회귀 전에는 여러 무공을 익혔다.
혈조공?
삼류 무공에 담긴 심득 정도는 이미 완벽하게 이해한 지 오래다.
다만, 그 무공을 펼치는 내 몸뚱이는 그렇지 않았다.
심(心)과 기(氣)와 체(體)가 일치를 해야 하는데, 내 몸은 이제 갓 무공을 익힌 애송이거든.
초식의 이해도.
내공 운용.
두 가지가 완벽해도 몸이 따라와 주지 못하니까 무공 성취가 2성에서 멈춘 것이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난 손을 말아 쥐었다가 폈다.
회귀 전과 비교하면, 이미 1년 이상을 아꼈다.
레인보우 아일랜드에 서식하는 괴물들의 정수를 여럿 흡수했고.
내공 스텟도 전보다 훨씬 빠른 시점에서 획득했다.
그뿐이랴.
달맞이 돌을 대량으로 획득, 주기적으로 내공을 늘릴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힘을 쌓으면, 목표했던 고신들보다 강해지는 것도 마냥 꿈이 아니었다.
혈산군을 쓰러트린 보상도 얻었겠다.
다음 사냥감을 찾아서 움직이려고 할 때.
『‘하늘의 악(惡)’이 당신의 천부적인 재능에 감탄합니다.』
메시지 하나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시스템 음성과는 다른 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경건해지는 기분이다.
이 메시지를 보낸 존재는…….
“성좌?”
『하늘의 악은 당신의 말이 옳다고 긍정합니다.』
성좌(星座).
별의 궤적을 이어서 스스로의 이름을 하늘 위에 기록한 존재다.
데바.
올림포스.
아스가르드.
그 외에도 여러 신족들이 성좌로서 군림하며 플레이어들을 굽어살폈다.
오직 그들의 유흥을 위해서.
실제로 바벨탑이 지구를 침식했을 때, 성좌들은 계약을 한 일부 사람들만 그들의 세계로 초대했다.
성좌에게 초대를 받지 못한 이들은?
‘다 죽었지.’
회귀 전에 몇 번이고 봤던 참상이 절로 떠올랐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
성좌들도 결국은 방관자일 뿐이다.
하나 지금은 화를 터트릴 때가 아니다.
성좌들의 관심을 받게 되면 탑 등반 과정에서 여러 이득이 생긴다.
저 신이라는 작자들이 말이야, 고고한 척은 엄청 하면서도 막상 눈에 차는 플레이어가 있으면 후원을 엄청 하거든.
튜토리얼에서 성좌의 관심을 끌었다는 건, 그만큼 내 행보가 파격적이라는 걸 방증했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이 하늘의 악을 노려봅니다.』
『올림포스의 전쟁신은 당신의 수호성이 될 존재는 자신뿐이라며 크게 소리 지릅니다.』
잠깐, 당신은 왜 여기서 또 튀어나오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