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혈산군의 위치는 늘 고정되어 있다.
숲 안쪽에 있는 커다란 동굴.
햇빛을 기준 잡아서 방향만 잘 잡고 가면 헤맬 일이 없다.
지면 위로 솟구친 침엽수들을 지나치다 보니, 높다란 절벽이 보였다.
그 아래에 자리를 잡은 커다란 동굴.
혈산군의 거처다.
“빙고.”
난 빙그레 웃으면서 동굴로 다가갔다.
암흑으로 뒤덮인 동굴.
가까이 가자, 붉은 눈동자 한 쌍이 어둠 사이에서 번쩍였다.
“어흥!”
쩌렁쩌렁한 포효.
늑대왕 서린처럼 ‘스킬’은 아니었지만.
포효소리에 담긴 포식자의 살기가 온몸을 자극했다.
삐쭉삐쭉 서는 솜털.
땀 한 방울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호랑이 한 마리가 느긋하게 동굴 밖으로 나왔다.
지프 차량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몸뚱이.
이빨과 발톱에서는 섬뜩한 예기가 흘렀고, 털가죽 위로 그어진 새빨간 줄무늬는 피를 연상시켰다.
혈산군.
숲의 지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독수리의 눈을 사용합니다.]
[상대가 당신보다 월등하게 강합니다.]
시야를 가득 메운 붉은 색상.
[포식]으로 스텟을 끌어올렸음에도, 혈산군한테는 미치지 못했다.
난 히죽 웃었다.
혈산군이 나보다 강한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 괴물은 늑대왕 서린이나 딥 슬라임, 혹은 탈론 플레임 같은 보스 몬스터들하고는 격이 달랐다.
압도적인 스펙.
그리고 다양한 공격 패턴.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놓았다가는 죽을 거다.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이 느낌이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긴장감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감각이다.
회귀 전.
전장에 섰을 때는 늘 적당한 긴장을 유지해야 했다.
혈산군을 마주하니, 그때가 떠올랐다.
진한 미소가 입가를 물들였다.
혈산군은 붉은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내 전신을 훑었다.
-인간, 겁도 없이 내 잠을 깨웠구나.
“지금이 몇 시인데 동굴에서 퍼질러 자고 있냐?”
-겁을 상실하였구나.
“축생 주제에 여유 부리기는.”
오른손을 들어서 까딱였다.
“덤벼. 강자의 여유 같은 거 흉내 내지 말고.”
어흐응-!!
혈산군은 짙은 살기를 방출하면서 정면으로 돌진했다.
이거…… 좀 과하게 성질을 긁었나?
탈론 플레임의 돌진이 떠오르는 엄청난 속도.
박력은 그 이상이었다.
덤프트럭이 풀 액셀을 밟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느낌.
아니.
저놈의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덤프트럭을 받아 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둘의 거리가 10미터까지 좁혀졌을 때, 혈산군이 지면을 박찼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드는 혈산군.
통나무 두께의 앞발이 내 머리로 날아든다.
저걸 그대로 맞으면 어깨 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난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사선으로 휘둘러진 앞발이 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여기서 끝이 아니야.’
오른 다리를 대각선으로 뻗고는, 몸의 축을 우측으로 돌렸다.
후웅!
바람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연이어 왼발을 휘두른 혈산군.
한 치 차이로 스쳐 지나간 앞발이 공기를 뒤흔들면서 고막을 어지럽혔다.
훤히 드러난 혈산군의 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돌진을 흘려낸 덕에 약점을 포착할 수 있었다.
‘아직도 아니야.’
난 혈산군에게 공격하는 대신, 몸을 한 번 더 틀었다.
철썩!
등 뒤에 달린 혈산군의 꼬리가 아래로 내려오더니 채찍처럼 바닥을 후려쳤다.
원래는 날 노렸겠지만, 세 번째 공격까지 예측하고 한 치 차이로 흘려보냈다.
타타탕- 꼬리에 맞은 돌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겼다.
[가시 갑피를 사용합니다.]
내 맷집 스텟이 늘었다지만, 맨몸으로 맞을 필요는 없잖아.
갑피 주위로 돋아난 가시가 혈산군의 피부를 긁었다.
단단하고 질긴 털과 피부.
찌이익, 소리가 났지만 긁힌 부위가 살짝 붉어졌을 뿐 실질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다.
옅은 찰과상이 고작이라.
-감히 내게 상처를 입히다니!
“네놈이 먼저 들이대서 그런 거잖아.”
이 정도면 혈산군의 스펙이 어느 정도 파악되었다.
힘이나 민첩, 그리고 반응속도.
내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못 이길 상대는 아니었다.
[민첩한 뒷발을 사용합니다.]
곧장 바닥을 차면서 거리를 벌렸다.
뒤이어 급하게 달려오는 혈산군.
[맹렬한 돌진]
혈산군의 전신이 붉게 물들었다.
방금 전에 달려들어서 다음 움직임까지 버퍼링이 생겼을 텐데도, 스킬 사용으로 극복했다.
-인간, 도망 못 친다.
“도망? 그런 재미없는 짓을 왜 하냐.”
나는 연속적으로 [민첩한 뒷발]을 사용했다.
터질 것처럼 팽창하는 허벅지.
두 번 연속 전개하자 혹사당한 근육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꾹 참았다.
뒤를 쫓는 붉은 궤적.
혈산군은 스킬을 유지한 채로 바짝 붙었다.
내 발이 땅에 닿는 순간.
혈산군의 전신을 휘감던 붉은 궤적도 사그라졌다.
[맹렬한 돌진]의 사거리는 100미터.
사용 직후, 격한 기력소모로 혈산군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페널티가 있다.
내 노림수도 그거였고.
‘예상대로 움직여 주니 고맙네.’
혈산군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날카로운 손톱을 사용합니다.]
[괴력을 사용합니다.]
서걱!
푸른빛을 휘감은 손톱이 털가죽을 마구 헤집었다.
나는 300% 증폭된 힘으로 혈산군의 앞다리를 찢어발겼다.
“크허헝!”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 소리.
기다란 상흔이 혈산군의 팔뚝 위에 새겨졌다.
드득, 손톱이 뼈에 걸렸다.
여기서 힘을 더 주면 앞다리 하나를 완전히 잘라 버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러다가는 내가 죽어.’
난 욕심 부리지 않고 뒤로 빠졌다.
한발 늦게 휘둘러진 왼발.
바람이 쪼개지는 소리가 다시 한번 고막을 진동시켰다.
저걸 맞았으면 일격에 승부가 났겠지.
-인간. 감히!
진득한 살기가 혈산군의 눈동자를 뒤덮었다.
“왜. 좀 아팠나 봐?”
벌써부터 울상 짓기는.
난 이제 시작인데 말이야.
앞으로 더 아플 테니 눈물 꾹 참아 봐라.
* * *
잠자는 호랑이 콧털을 건든다는 속담이 있다.
아니, 호랑이가 아니라 사자였던가?
아무튼, 옛 성현들의 말씀 중에 틀린 게 없다는 걸 체감하는 중이다.
“어흐흥!”
혈산군의 앞발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친 것에 불과한데도 골이 살짝 울렸다.
압도적인 스펙 차이!
전투 초기에 혈산군의 앞발 하나에 상처를 입혔지만, 몰리는 건 나였다.
-인간! 인간!
“그만 좀 불러라.”
-도망가지 마라! 맞서 싸워!
혈산군의 눈가를 뒤덮은 살기가 더 진해졌다.
얌마, 두 눈에 쌍심지 켜고 그렇게 말하면 더 도망가고 싶어지잖아.
콰앙-! 바닥을 파헤치면서 생긴 고랑이 하나둘 늘어났다.
혈산군의 작품.
발톱에 실린 힘이 원체 대단하다보니, 바위도 못 버티고 쪼개졌다.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풀면, 푹 파이는 건 바위나 땅이 아니라 내 몸뚱이겠지.
[에너지 볼트]
손바닥에 맺힌 푸른 구체가 정면으로 쏘아졌다.
퉁, 에너지 볼트는 두꺼운 혈산군의 털가죽을 찢어 내지는 못하고 표피를 조금 그을리고 말았다.
‘놈이 빈틈을 드러낼 때까지는 거리를 벌려야 해.’
혈산군은 늑대왕 서린이나 딥 슬라임처럼 단순하지 않다.
무공을 익힌 것처럼, 모든 움직임에 허초와 살초가 섞여 있다.
신체능력도 나보다 월등하게 위여서, 어쭙잖게 빈틈을 노렸다가는 역공당하기 십상!
그런 의미에서 마나 사슴의 [에너지 볼트]는 적정거리를 유지하면서 견제하기에 좋은 스킬이었다.
“어흥! 어흥!”
거센 분노를 터트리는 혈산군.
오른쪽 앞다리가 다친 탓에 조금 절면서도, 여전히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놈의 다리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예의 주시하지 않았더라면 피할 틈도 없이 당했을 거다.
[가시 갑피]가 연신 달려드는 혈산군의 피부에 생채기를 하나둘 새겼다.
의도했다기보다는, 혈산군의 속도가 원체 빠른 탓에 가시에게 몸을 들이민 꼴이지만.
[날카로운 손톱을 사용합니다.]
놈이 앞발을 크게 휘두른 직후.
스치듯이 지나치면서 혈산군의 옆구리에 기다란 자상을 새겨 주었다.
“크헝!”
몸뚱이를 홱 트는 혈산군.
그와 동시에, 등 뒤에 달린 꼬리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내 복부를 후려쳤다.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63% 감소했습니다.]
움푹 파인 갑피.
갑피만으로는 꼬리에 실린 힘을 모두 해소하지 못한 듯, 20미터 뒤로 튕겨 났다.
“컥!”
한 줄기 비명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더럽게 아프다.
[가시 갑피]를 사용했는데도, 꼬리에 맞았다고 숨이 안 쉬어졌다.
갑피의 내구도를 반 이상이나 깎는 공격.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처음 받아 보는 충격이다.
“끄윽, 흑.”
나는 연신 헐떡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습니다. 대지모신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상처 및 소모된 체력이 빠르게 회복됩니다.]
[대지모신의 가호]가 흐트러진 숨을 빠르게 안정시켜 주었다.
역시 신의 가호!
“크허헝!”
혈산군이 짓쳐들어올 즈음,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복부가 뻐근한 건 여전했지만.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전혀 없었다.
한 치 차이로 몸을 던지면서 혈산군의 돌진을 회피.
[에너지 볼트를 사용합니다.]
2초 동안 마나를 충전한 뒤에 구체를 발사했다.
슈아악!
에너지 볼트가 방금 전에 만든 상처로 파고들었다.
쭉 찢어진 상처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카우우!”
혈산군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냈다.
뛰어난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을 지닌 건, 가죽뿐이거든.
무리하면서 기다란 상처를 낸 보람이 있군.
‘이번 승부. 끈기의 승부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혈산군과의 전투는 그 뒤로도 수십 분이나 이어졌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놈의 몸뚱이에 새겨진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죽어라. 인간!
혈산군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갑피의 내구도가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대폭 깎인 내구도.
혈산군의 발톱에 살짝 걸린 건데도, 피격 부위가 무수한 균열로 뒤덮였다.
하여간,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니까.
깨어진 갑피 사이로, 발톱이 내 살갗을 찢어발겼다.
푸학- 내 어깨와 팔뚝, 그리고 몸통에도 상흔이 생겼다.
칼에 베인 것처럼 예리한 상처.
난 고통을 참으면서 혈산군과 공방을 이어 갔다.
“크릉…….”
전투를 시작한 지 1시간 정도가 경과했을 때, 혈산군은 지친 기색으로 숨을 헐떡였다.
피로 젖은 가죽.
[날카로운 손톱]과 [에너지 볼트]로 만든 상처에서 붉은 액체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반면 내 상태는 비교적 멀쩡했다.
온몸을 땀으로 적신 것 빼고는 말이다.
혈산군이 낸 상처는 [대지모신의 가호] 덕분에 대부분 아물었다.
[갑피]로 최대한 보호한 덕에 치명상을 면한 덕분이다.
‘회귀하기 전처럼 되지는 않네.’
1시간 이상 전투를 지속하다 보니, 집중력이 고갈되었다.
회귀 전에는 몇 날 며칠을 치고받고 해도 멀쩡했는데 말이야.
이 부분은 정신력만으로 극복이 안 되는 모양이다.
-인……간.
“뭣 하러 힘들게 말하냐. 이제 좀 쉬어라.”
비틀거리는 혈산군.
이제는 달려들 힘도 잃어버린 듯했다.
난 [에너지 볼트]에 마나를 과충전했다.
최대치까지 커진 푸른 구체.
그 끝을 혈산군의 정수리에 겨눈 채로 방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