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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18화 (18/300)

18화

혈산군의 위치는 늘 고정되어 있다.

숲 안쪽에 있는 커다란 동굴.

햇빛을 기준 잡아서 방향만 잘 잡고 가면 헤맬 일이 없다.

지면 위로 솟구친 침엽수들을 지나치다 보니, 높다란 절벽이 보였다.

그 아래에 자리를 잡은 커다란 동굴.

혈산군의 거처다.

“빙고.”

난 빙그레 웃으면서 동굴로 다가갔다.

암흑으로 뒤덮인 동굴.

가까이 가자, 붉은 눈동자 한 쌍이 어둠 사이에서 번쩍였다.

“어흥!”

쩌렁쩌렁한 포효.

늑대왕 서린처럼 ‘스킬’은 아니었지만.

포효소리에 담긴 포식자의 살기가 온몸을 자극했다.

삐쭉삐쭉 서는 솜털.

땀 한 방울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호랑이 한 마리가 느긋하게 동굴 밖으로 나왔다.

지프 차량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몸뚱이.

이빨과 발톱에서는 섬뜩한 예기가 흘렀고, 털가죽 위로 그어진 새빨간 줄무늬는 피를 연상시켰다.

혈산군.

숲의 지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독수리의 눈을 사용합니다.]

[상대가 당신보다 월등하게 강합니다.]

시야를 가득 메운 붉은 색상.

[포식]으로 스텟을 끌어올렸음에도, 혈산군한테는 미치지 못했다.

난 히죽 웃었다.

혈산군이 나보다 강한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 괴물은 늑대왕 서린이나 딥 슬라임, 혹은 탈론 플레임 같은 보스 몬스터들하고는 격이 달랐다.

압도적인 스펙.

그리고 다양한 공격 패턴.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놓았다가는 죽을 거다.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이 느낌이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긴장감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감각이다.

회귀 전.

전장에 섰을 때는 늘 적당한 긴장을 유지해야 했다.

혈산군을 마주하니, 그때가 떠올랐다.

진한 미소가 입가를 물들였다.

혈산군은 붉은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내 전신을 훑었다.

-인간, 겁도 없이 내 잠을 깨웠구나.

“지금이 몇 시인데 동굴에서 퍼질러 자고 있냐?”

-겁을 상실하였구나.

“축생 주제에 여유 부리기는.”

오른손을 들어서 까딱였다.

“덤벼. 강자의 여유 같은 거 흉내 내지 말고.”

어흐응-!!

혈산군은 짙은 살기를 방출하면서 정면으로 돌진했다.

이거…… 좀 과하게 성질을 긁었나?

탈론 플레임의 돌진이 떠오르는 엄청난 속도.

박력은 그 이상이었다.

덤프트럭이 풀 액셀을 밟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느낌.

아니.

저놈의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덤프트럭을 받아 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둘의 거리가 10미터까지 좁혀졌을 때, 혈산군이 지면을 박찼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드는 혈산군.

통나무 두께의 앞발이 내 머리로 날아든다.

저걸 그대로 맞으면 어깨 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난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사선으로 휘둘러진 앞발이 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여기서 끝이 아니야.’

오른 다리를 대각선으로 뻗고는, 몸의 축을 우측으로 돌렸다.

후웅!

바람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연이어 왼발을 휘두른 혈산군.

한 치 차이로 스쳐 지나간 앞발이 공기를 뒤흔들면서 고막을 어지럽혔다.

훤히 드러난 혈산군의 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돌진을 흘려낸 덕에 약점을 포착할 수 있었다.

‘아직도 아니야.’

난 혈산군에게 공격하는 대신, 몸을 한 번 더 틀었다.

철썩!

등 뒤에 달린 혈산군의 꼬리가 아래로 내려오더니 채찍처럼 바닥을 후려쳤다.

원래는 날 노렸겠지만, 세 번째 공격까지 예측하고 한 치 차이로 흘려보냈다.

타타탕- 꼬리에 맞은 돌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겼다.

[가시 갑피를 사용합니다.]

내 맷집 스텟이 늘었다지만, 맨몸으로 맞을 필요는 없잖아.

갑피 주위로 돋아난 가시가 혈산군의 피부를 긁었다.

단단하고 질긴 털과 피부.

찌이익, 소리가 났지만 긁힌 부위가 살짝 붉어졌을 뿐 실질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다.

옅은 찰과상이 고작이라.

-감히 내게 상처를 입히다니!

“네놈이 먼저 들이대서 그런 거잖아.”

이 정도면 혈산군의 스펙이 어느 정도 파악되었다.

힘이나 민첩, 그리고 반응속도.

내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못 이길 상대는 아니었다.

[민첩한 뒷발을 사용합니다.]

곧장 바닥을 차면서 거리를 벌렸다.

뒤이어 급하게 달려오는 혈산군.

[맹렬한 돌진]

혈산군의 전신이 붉게 물들었다.

방금 전에 달려들어서 다음 움직임까지 버퍼링이 생겼을 텐데도, 스킬 사용으로 극복했다.

-인간, 도망 못 친다.

“도망? 그런 재미없는 짓을 왜 하냐.”

나는 연속적으로 [민첩한 뒷발]을 사용했다.

터질 것처럼 팽창하는 허벅지.

두 번 연속 전개하자 혹사당한 근육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꾹 참았다.

뒤를 쫓는 붉은 궤적.

혈산군은 스킬을 유지한 채로 바짝 붙었다.

내 발이 땅에 닿는 순간.

혈산군의 전신을 휘감던 붉은 궤적도 사그라졌다.

[맹렬한 돌진]의 사거리는 100미터.

사용 직후, 격한 기력소모로 혈산군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페널티가 있다.

내 노림수도 그거였고.

‘예상대로 움직여 주니 고맙네.’

혈산군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날카로운 손톱을 사용합니다.]

[괴력을 사용합니다.]

서걱!

푸른빛을 휘감은 손톱이 털가죽을 마구 헤집었다.

나는 300% 증폭된 힘으로 혈산군의 앞다리를 찢어발겼다.

“크허헝!”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 소리.

기다란 상흔이 혈산군의 팔뚝 위에 새겨졌다.

드득, 손톱이 뼈에 걸렸다.

여기서 힘을 더 주면 앞다리 하나를 완전히 잘라 버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러다가는 내가 죽어.’

난 욕심 부리지 않고 뒤로 빠졌다.

한발 늦게 휘둘러진 왼발.

바람이 쪼개지는 소리가 다시 한번 고막을 진동시켰다.

저걸 맞았으면 일격에 승부가 났겠지.

-인간. 감히!

진득한 살기가 혈산군의 눈동자를 뒤덮었다.

“왜. 좀 아팠나 봐?”

벌써부터 울상 짓기는.

난 이제 시작인데 말이야.

앞으로 더 아플 테니 눈물 꾹 참아 봐라.

* * *

잠자는 호랑이 콧털을 건든다는 속담이 있다.

아니, 호랑이가 아니라 사자였던가?

아무튼, 옛 성현들의 말씀 중에 틀린 게 없다는 걸 체감하는 중이다.

“어흐흥!”

혈산군의 앞발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친 것에 불과한데도 골이 살짝 울렸다.

압도적인 스펙 차이!

전투 초기에 혈산군의 앞발 하나에 상처를 입혔지만, 몰리는 건 나였다.

-인간! 인간!

“그만 좀 불러라.”

-도망가지 마라! 맞서 싸워!

혈산군의 눈가를 뒤덮은 살기가 더 진해졌다.

얌마, 두 눈에 쌍심지 켜고 그렇게 말하면 더 도망가고 싶어지잖아.

콰앙-! 바닥을 파헤치면서 생긴 고랑이 하나둘 늘어났다.

혈산군의 작품.

발톱에 실린 힘이 원체 대단하다보니, 바위도 못 버티고 쪼개졌다.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풀면, 푹 파이는 건 바위나 땅이 아니라 내 몸뚱이겠지.

[에너지 볼트]

손바닥에 맺힌 푸른 구체가 정면으로 쏘아졌다.

퉁, 에너지 볼트는 두꺼운 혈산군의 털가죽을 찢어 내지는 못하고 표피를 조금 그을리고 말았다.

‘놈이 빈틈을 드러낼 때까지는 거리를 벌려야 해.’

혈산군은 늑대왕 서린이나 딥 슬라임처럼 단순하지 않다.

무공을 익힌 것처럼, 모든 움직임에 허초와 살초가 섞여 있다.

신체능력도 나보다 월등하게 위여서, 어쭙잖게 빈틈을 노렸다가는 역공당하기 십상!

그런 의미에서 마나 사슴의 [에너지 볼트]는 적정거리를 유지하면서 견제하기에 좋은 스킬이었다.

“어흥! 어흥!”

거센 분노를 터트리는 혈산군.

오른쪽 앞다리가 다친 탓에 조금 절면서도, 여전히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놈의 다리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예의 주시하지 않았더라면 피할 틈도 없이 당했을 거다.

[가시 갑피]가 연신 달려드는 혈산군의 피부에 생채기를 하나둘 새겼다.

의도했다기보다는, 혈산군의 속도가 원체 빠른 탓에 가시에게 몸을 들이민 꼴이지만.

[날카로운 손톱을 사용합니다.]

놈이 앞발을 크게 휘두른 직후.

스치듯이 지나치면서 혈산군의 옆구리에 기다란 자상을 새겨 주었다.

“크헝!”

몸뚱이를 홱 트는 혈산군.

그와 동시에, 등 뒤에 달린 꼬리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내 복부를 후려쳤다.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63% 감소했습니다.]

움푹 파인 갑피.

갑피만으로는 꼬리에 실린 힘을 모두 해소하지 못한 듯, 20미터 뒤로 튕겨 났다.

“컥!”

한 줄기 비명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더럽게 아프다.

[가시 갑피]를 사용했는데도, 꼬리에 맞았다고 숨이 안 쉬어졌다.

갑피의 내구도를 반 이상이나 깎는 공격.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처음 받아 보는 충격이다.

“끄윽, 흑.”

나는 연신 헐떡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습니다. 대지모신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상처 및 소모된 체력이 빠르게 회복됩니다.]

[대지모신의 가호]가 흐트러진 숨을 빠르게 안정시켜 주었다.

역시 신의 가호!

“크허헝!”

혈산군이 짓쳐들어올 즈음,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복부가 뻐근한 건 여전했지만.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전혀 없었다.

한 치 차이로 몸을 던지면서 혈산군의 돌진을 회피.

[에너지 볼트를 사용합니다.]

2초 동안 마나를 충전한 뒤에 구체를 발사했다.

슈아악!

에너지 볼트가 방금 전에 만든 상처로 파고들었다.

쭉 찢어진 상처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카우우!”

혈산군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냈다.

뛰어난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을 지닌 건, 가죽뿐이거든.

무리하면서 기다란 상처를 낸 보람이 있군.

‘이번 승부. 끈기의 승부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혈산군과의 전투는 그 뒤로도 수십 분이나 이어졌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놈의 몸뚱이에 새겨진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죽어라. 인간!

혈산군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갑피의 내구도가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대폭 깎인 내구도.

혈산군의 발톱에 살짝 걸린 건데도, 피격 부위가 무수한 균열로 뒤덮였다.

하여간,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니까.

깨어진 갑피 사이로, 발톱이 내 살갗을 찢어발겼다.

푸학- 내 어깨와 팔뚝, 그리고 몸통에도 상흔이 생겼다.

칼에 베인 것처럼 예리한 상처.

난 고통을 참으면서 혈산군과 공방을 이어 갔다.

“크릉…….”

전투를 시작한 지 1시간 정도가 경과했을 때, 혈산군은 지친 기색으로 숨을 헐떡였다.

피로 젖은 가죽.

[날카로운 손톱]과 [에너지 볼트]로 만든 상처에서 붉은 액체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반면 내 상태는 비교적 멀쩡했다.

온몸을 땀으로 적신 것 빼고는 말이다.

혈산군이 낸 상처는 [대지모신의 가호] 덕분에 대부분 아물었다.

[갑피]로 최대한 보호한 덕에 치명상을 면한 덕분이다.

‘회귀하기 전처럼 되지는 않네.’

1시간 이상 전투를 지속하다 보니, 집중력이 고갈되었다.

회귀 전에는 몇 날 며칠을 치고받고 해도 멀쩡했는데 말이야.

이 부분은 정신력만으로 극복이 안 되는 모양이다.

-인……간.

“뭣 하러 힘들게 말하냐. 이제 좀 쉬어라.”

비틀거리는 혈산군.

이제는 달려들 힘도 잃어버린 듯했다.

난 [에너지 볼트]에 마나를 과충전했다.

최대치까지 커진 푸른 구체.

그 끝을 혈산군의 정수리에 겨눈 채로 방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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