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른 저녁.
땅거미가 아스라이 지면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나는 쭉 이어진 바위 지대를 점프하면서 빠르게 나아갔다.
“뀌이익!”
산자락에 머무르던 가시멧돼지들이 종종 달려들기도 했다.
“형 방해 마라.”
드드드!
길게 늘어난 손톱으로 가시멧돼지의 취약점을 그었다.
솟구치는 핏방울.
현재 내 스텟은 레벨 70대의 플레이어와 비슷한 수준이다.
아이템 보정이 거의 없으니 실 전투력은 50레벨 정도겠지만.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는 압도적인 스펙이다.
[포식을 사용했습니다.]
고꾸라진 가시멧돼지를 포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수는 다 모았지만, [용의 심장] 효과로 마력 스텟이 조금씩 쌓이거든.
0.1도 안 되는 포인트라서 늘어나는 게 미미하지만.
티끌도 쌓다 보면 태산이 된다고 하잖아?
몇 번 전투를 거치다 보니 산꼭대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어서 정상에 도달했다.
“하늘 참 예쁘네.”
검은색 잉크를 물에 풀어놓은 것처럼 시커메진 하늘.
보름달이 그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득 찬 달.
전처럼 은은한 빛 대신, 강렬한 푸른빛이 어둠을 몰아내며 하늘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환한 빛은 이윽고 내 망막조차 푸르게 물들였다.
블루문.
강력한 마력의 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블루문을 목격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마나 회복 속도가 50% 증가합니다.]
달빛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버프가 적용되었다.
에미리트산의 페널티를 상쇄하고도 남는 엄청난 버프!
뭐, 나한텐 의미가 없지만 말이야.
‘중요한 건 저게 블루문이라는 걸 확인했다는 거지.’
나는 씩 웃으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에미리트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두 가지다.
남쪽 - 완만한 길.
북쪽 - 낭떠러지.
형식상으로는 둘이지만, 북쪽의 절벽은 산세가 가파른 탓에 암벽등반 장비가 없으면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투툭, 발에 채인 돌 하나가 절벽으로 굴러떨어졌다.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돌조각.
이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면 나도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절벽을 내려가야 한다.
<보름달이 뜨는 날, 에미리트산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정상에서 보는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된 것도 잠시, 낭떠러지를 보던 중 희미한 빛을 발견했습니다.>
탐험가 로렌트의 발견.
그는 〔잊힌 신전〕에 이어서 레인보우 아일랜드의 숨겨진 요소를 찾아냈다.
5년 후에 알려질 사실.
미안하지만 이것도 내가 먼저 써먹을게.
[초음파를 사용합니다.]
[반경 100미터 안의 지형 구조를 읽어 냅니다.]
난 초음파를 발동한 채로 절벽에 다리를 내디뎠다.
90도에 가까운 경사.
발을 한 번이라도 잘못 디디면 천 미터 아래로 추락할 거다.
뭐, 이럴 줄 알고 정수들을 모아온 거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사용합니다.]
길게 늘어난 손톱을 마나로 강화까지 하고는 푹 찔렀다.
10센티 정도 들어간 손톱.
이 정도면 발을 헛디뎌도 몸을 추스를 수 있다.
‘믿는 구석이 있었지.’
흐흐흐.
나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끝없이 이어진 절벽.
나는 강화된 손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놓거나 방심하는 순간, 저 아래로 추락하겠지?
로렌트 녀석, 이런 절벽을 탈 생각을 잘도 했군.
에미리트산 절벽은 각종 정수를 포식해서 능력치를 올린 나조차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한데, 탐험가 로렌트는 압도적인 스텟이나 스킬 없이도 절벽을 내려갔다.
듣자 하니 탑의 초대를 받기 전에도 암벽 등반이나 오지 탐험을 주로 했다고 하던데.
튜토리얼에 참가할 때도 관련 장비들을 챙겨 왔다고 들었다.
‘그런 별종이니까 숨겨진 장소도 찾았겠지.’
얼마쯤 내려갔을까.
[초음파]가 움푹 파인 곳을 감지해냈다.
나는 양팔과 다리를 신중하게 움직이면서 푹 파인 곳으로 향했다.
푸른 빛이 새어 나오는 틈.
진땀을 흘리면서 가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했다.
“어휴, 숨지는 줄 알았잖아.”
나는 비명을 토하듯이 들숨과 날숨을 내쉬었다.
평평한 곳에 발을 딛자, 전신을 휘감은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회귀 전에도 이렇게 긴장한 적이 얼마 없었는데.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현재 당신의 위치는 달맞이 동굴입니다.]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처음으로 달맞이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마력이 5 상승합니다.]
달맞이 동굴 표면에 머무르던 빛 일부가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크으, 이래서 내가 숨겨진 요소를 놓칠 수 없다니까.
“잘 찾아왔네.”
나는 망설임 없이 동굴 안으로 걸어갔다.
달맞이 동굴의 구조는 단순했다.
일직선으로 뻗은 통로.
쭉 걷다 보면 50미터 크기의 공동이 나온다.
괴물이나 함정, 혹은 보물이나 히든 퀘스트 같은 건 없냐고?
‘응, 없어.’
달을 맞이하는 동굴.
그 이름에 담긴 뜻이 전부인 장소다.
<보름달이 가장 높은 곳에 올랐을 때, 달맞이 동굴의 천장이 열리면서 달빛을 모두 빨아들입니다.>
<빛나는 달맞이 동굴의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장관이란!>
나는 주머니에서 월석을 꺼낸 채, 공동을 쭉 돌았다.
툭- 툭- 월석이 공동 바닥에 하나둘 놓였다.
상회에서 구매한 월석 32개를 둥글게 깔아놓은 후에야, 마음 편히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제 세팅도 끝났으니 좀 쉬자.’
할 일은 다 했다.
남은 건 보름달이 가장 높은 곳에 떠오르는 순간을 기다리면 된다.
[달맞이 동굴에 방문자가 나타났습니다.]
[블루문이 방문자의 파장에 반응합니다.]
[동굴이 달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구구구궁!
동굴 천장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양옆으로 밀려났다.
갈라진 틈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
쭉 갈라진 천장 사이로, 완연한 보름달이 달맞이 동굴 위에 자리했다.
그때, 블루문을 휘감던 푸른빛이 폭포수처럼 동굴로 쏟아졌다.
‘와, 진짜 장관이네.’
나는 혀를 내두르면서 감탄했다.
오른손으로 달빛을 어루만져보았다.
형체가 없는 마나이자 빛인데도 이불자락처럼 보드라운 감촉이 손끝을 간질였다.
한계 이상으로 응축된 마나가 유형화된 현상.
강대한 마나를 품은 블루문의 에너지가 달맞이 동굴을 가득 메웠다.
우웅-! 바닥에 깔아 두었던 월석이 블루문의 빛에 공명했다.
제자리에서 떠오른 월석.
이윽고, 달맞이 동굴을 가득 메운 빛줄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좋아. 여기까지는 전에 들은 대로야.’
달맞이 동굴을 발견한 게 탐험가 로렌트라고 했지?
결과만 놓고 보면 반쪽짜리 발견이었다.
블루문에 모인 엄청난 마나가 달맞이 동굴에 쏟아지기는 하는데, 막상 플레이어한테는 어떤 버프나 축복도 주어지지 않았다.
‘2037년 즈음에 월석의 비밀이 밝혀졌을 거야.’
로렌트가 바벨탑을 오르기 시작한 해가 2030년이니, 그로부터 7년 뒤에 달맞이 동굴의 비밀이 알려진 셈이다.
약 10분이 지나자, 블루문이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 떨리는군.”
달맞이 동굴에서 벌어진 기현상.
회귀 전에는 듣기만 했을 뿐, 직접 구경하진 못했다.
난 떨리는 마음으로 월석을 집었다.
[달맞이 돌]
등급: 유니크[U]
분류: 소모품
블루문의 기운을 충만하게 흡수한 월석입니다.
달맞이 돌에는 강한 마나가 스며들어 있어, 복용 시 마력이나 내공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15일에 한 번 복용 가능.
“하, 하하.”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템 내역을 확인하니,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달맞이 돌.
무려 유니크 등급 영약을 32개나 얻었다.
* * *
달맞이 돌은 희귀한 영약이다.
오직 레인보우 아일랜드에서만 얻을 수 있고.
블루문이 뜨는 주기가 안 맞으면 그 회차에서 획득 시도조차 못 한다.
달맞이 동굴에 숨겨진 비밀이 밝혀진 후, 여러 길드에서는 달맞이 돌을 확보하려고 유망주들을 더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유니크 등급 영약이 그렇게까지 구해야 할 만큼 희귀하지는 않다만.’
탑을 오르다보면 [전설]이나 [초월] 등급 영약을 보상으로 얻기도 한다.
달맞이 돌은 그에 비하면 약효가 떨어졌다.
근데 왜 대형 길드에서 유망주를 육성하면서까지 달맞이 돌에 목숨을 거냐고?
그 이유는…….
‘내공 증진 영약.’
내공은 무공과 관련된 스텟이다.
마력 관련 영약은 탑에서 종종 보상으로 나오지만.
내공을 증진시켜 주는 영약은 종류도 많지 않을뿐더러, 얻기 훨씬 까다로웠다.
참, 그러고 보니 현시점에서는 무공이 천대를 받겠구나.
‘무공 관련 특성이 재조명을 받던 게 언제였더라?’
플레이어 중에는 [무공]과 연계를 이루는 특성을 각성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무공 관련 특성 보유자들은 비주류 취급이었다.
무공을 사용하려면 먼저 심법을 익혀야 한다. 어떤 종류든 심법을 안 익히면 [내공] 스텟이 안 생기거든.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내공 스텟은 마력과 달리 컨트롤하기가 엄청나게 까다롭다.
운용에 실패하면 내상을 입기도 하고, 심각하면 주화입마라는 상태 이상에 걸리기까지!
‘그래도 대성하기만 하면 엄청 강해지니까.’
무공을 익힌 플레이어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이번에는 그 시기가 조금 더 빨라질 수도 있겠어.
내가 있으니까.
‘적당한 심법을 익힌 다음, 달맞이 돌로 내공을 빠르게 늘린다.’
[용의 심장]이 늘려 주는 것은 마력뿐이다.
내공은 심법을 운용하면서 따로 쌓아야 하거든.
에미리트산의 숨겨진 요소, 달맞이 돌은 내공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거다.
난 바닥에 있는 달맞이 돌을 주섬주섬 챙겼다.
달맞이 동굴에서 얻을 수 있는 기연은 모두 챙겼다.
이젠 다른 정수를 포식하러 갈 시간이다.
돌아가는 길은 달맞이 동굴을 찾아올 때보다 훨씬 나았다.
블루문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벌어진 천장.
자세히 보면 사람 하나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갈라진 틈 사이에 위치했다.
‘이걸 설계한 놈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는 거지.’
[민첩한 뒷발을 사용합니다.]
동굴 바닥을 차면서 위로 도약했다.
오른손으로 계단을 붙들고는 자세를 잡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이 길도 가파른 건 마찬가지지만, 발을 디딜 곳이 있어서 암벽을 타는 것보다 한결 편했다.
‘내려올 때는 땀을 뻘뻘 흘렸는데 말이야.’
괜히 억울하네.
갈라진 틈을 벗어나니, 에미리트산 꼭대기가 나왔다.
내가 발을 떼자마자 달맞이 동굴로 이어진 길이 붙으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에미리트산에서 얻을 건 다 얻었고.’
나는 북동쪽을 바라보았다.
블루문의 달빛 덕분에 그 지역의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삼림 지역.
다음 목적지를 보면서 손을 꽉 말아 쥐었다.